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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삶을 그리는 '길의 화가'

작성자: 사색의향기 / 작성일 : 2008-06-05 16:20

댓글 : 4 / 조회수 : 9,280

삶을 그리는 '길의 화가' 이영희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태양이 사라지고 길 위에 남은 한 조각 빛의 잔상이 가만가만 우리네 마음을 다독인다. 끝없이 이어진 저 길 어디쯤 우리 쉴 자리가 있을까. 한 걸음, 한 걸음 힘주어 오르막길을 오르다보면, 밥 짓는 연기가 올라가는 고향집이 비로소 보이지 않을까.

이영희 화가의 그림 속에 표현된 길은 평범한 시골길이 아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쉼 없이 이어지는 길이다.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수를 놓듯 세밀한 붓으로 그려나간 풍경 앞에서 관객들은 일순 눈을 감게 된다. 가장 한국적인 붓 터치로 가장 한국적인 길의 풍경을 십수 년간 그려온 이영희 화가가 이번에는 북한의 길을 테마로 전시를 열었다. 6월 10일까지 인사동 노암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북녘의 땅 - 고향 찾아가는 길'이 바로 그것이다. 시골의 웬만한 길마저도 모두 아스팔트로 포장된 한국에서 더 이상 소재를 찾을 수 없었던 그가 눈길을 돌린 곳이 바로 북한. 물론 가는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대통령에 청원도 넣고 통일부 장관에게 투서도 넣었지요. 3년 안에 북한의 길을 그린 작품으로 전시를 해야겠다, 다짐했는데 북한 땅을 밟기도 전에 3년이 흘러버렸어요."

길은 의외로 쉬운 곳에 있었다. 학교 후배의 소개로 남북경제문화교류재단의 도움을 받게 된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길을 돌아 북녘의 땅을 밟은 것이 2006년. 지금까지 그는 4번이나 북한을 찾았다.

"태초에 인간이 있었고 길이 생겼습니다. 사람의 걸음으로 만들어진 길에는 삶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 있지요. 그래서 저는 인공적인 길을 그리지 않습니다. 북한에는 있는 그대로의 길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그림의 소재를 많이 찾을 수 있었지요."

수직으로 하늘과 땅을 가르는 지평선이 놓인 오르막길, 촉촉한 논바닥 사이에 꼬불거리며 자리잡은 논둑길, 광활한 황야에 자연스럽게 생긴 황톳길 등 그가 그린 북녘의 땅엔 북한 사람들의 땀과 피와 애환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했다.

"옛날에 어떤 작가는 '예술은 사기다'라고 했다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예술은 진실입니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관객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저의 작품을 보러 오신 분들은 '마음이 확 뚫린 느낌'이라며 좋아하시더군요."

그는 '한국의 길'을 그림으로써 '한국인의 희망'을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끝도 없이 펼쳐진 길이 지평선에 닿으면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온 환한 하늘이 고난의 길을 걷고 있는 인간을 너그러이 맞는다. 사람의 발길이 닿아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길, 한걸음, 한걸음 힘주어 내딛어야하는 인생의 오르막길, 오르다보면 어느새 저 하늘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래서 희망을 주는 끝없는 인생 길. 이영희 화가의 작품에서 우리네 인생을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까닭이리라.

"제 작품에 유난히 고갯길이 많은 이유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굴곡을 만납니까. 하지만 저 너머에 희망이 있다고 믿기에 힘들어도 길을 가는 겁니다. 그게 인생이죠."

글 │ 홍유진
사진 │ 지유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