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속을 걷다>
이동진 기자
이동진 기자와 함께 하는 겨울의 영화 여행
이동진, 그의 이름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영화가 떠오른다. 영화와 관련된 각종 매체에 그의 글이 있었고 크고 작은 영화제나 행사장에는 그가 마이크를 들고 있었다. 그 뿐인가? 다양한 영화 관련 방송이나 라디오프로그램까지 영화가 있는 곳에는 항상 함께 존재했던 이름이 바로 이동진이다.
그가 이번에는 <필름 속을 걷다>라는 여행 에세이집을 냈다. 물론 영화가 빠질 수 없다. 이동진 기자가 안내하는 영화 속으로 떠나는 여행, 그 판타지 속으로 들어가 본다.
-. 영화기자로 한길을 걸어오셨어요. 그 시작이 궁금합니다.
영화 쪽 일을 꼭 해야만 하겠다, 결심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시험을 치른 뒤 조선일보사에 들어갔어요. 그 때 제 생각은 문화부 기자를 하고 싶다, 정도였죠. 영화나 문학, 출판 쪽이 제 관심분야였으니까 굳이 '난 영화 아니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은 없었던 거죠. 그런데 제가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대학교 때 비디오 잡지 같은 곳에 기고도 하고 영화책도 썼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화 쪽으로 일을 맡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 영화를 처음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중고등학교 때도 영화를 즐겨 보긴 했지만 일반인 수준에서 봤어요. 차라리 영화보다는 문학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죠. 막연하게 나중에 글을 쓰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생각할 정도로요. 지금 생각해보면 영화라는 매체를 조금은 깔봤던 것 같아요. 문학에 비해서 영화는 재미 위주의 매체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이고. 그런데 대학에 들어와서 우연한 기회에 영화를 아주 좋아하는 선배 때문에 타르코프스키, 그리고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를 보게 됐어요. 보고서 충격을 받았죠. 영화라는 매체가 대단한 매체구나, 처음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영화의 표현력이라든지 깊이라든지 문학 못지않게 아니, 문학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구나,라는 걸 느꼈죠.
-. 여행과 영화는 둘 다 매력적이잖아요. 영화와 여행의 공통점을 몇 가지 꼽는다면요?
판타지죠. 둘 다 사람들이 로망으로 꿈꾸는 것들이잖아요. 저 같은 사람은 여행도 직업적으로 했었고 영화도 직업적으로 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이 두 가지는 팍팍한 현실에서 가장 쉽게 눈 돌릴 수 있는 판타지잖아요. 그 점이 가장 공통점인 것 같아요. 또 다른 공통점은 사람의 인생을 무대에도 비유하고 길에도 비유하잖아요.
어떤 영화라도 로드무비적인 속성이 반드시 있거든요. 그런 점에서 보면 여행과도 비슷한 것 같네요. 그런데 사실 이런 로망, 판타지를 가지고 직접 그 장소에 가보면 기대와 다른 경우가 태반이거든요. 영화도 그래요. 일주일에 한 편, 이 주일에 한편 친구들과 함께 영화 보고 재미없으면 쓰레기라고 돌 던지고, 좋으면 감동 받고 그럴 때 영화가 판타지가 되는 거지. 어떤 직업이든 그게 삶이 되고 생활이 되면 느낌이 전혀 다르죠. 여행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 몸 담고 있던 신문사를 떠난 이후로 여러 방면에서 더욱 많은 일을 하고 계신 것 같아요. 어떤 일에 가장 애착이 가시나요?
저야 당연히 글 쓰는 일이죠. 어떤 분들은 '푸른 밤 라디오 프로그램 너무 잘 듣고 있어요.'라고 하세요. 성시경 씨가 하는 라디오 방송을 제가 1년쯤 함께 하고 있는데 그 프로가 굉장히 인기 있더라고요. 또 어떤 분은 '이번에 내신 책 잘 봤어요. 조선일보 기사 잘 봤어요' 그런 분도 있고, '지난 번 행사 진행 잘하시던데요' 그런 분도 있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분들 모두가 고맙죠. 고마운 일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 중에서 책 잘 봤다는 말을 들었을 때가 가장 기뻐요. 제가 아무리 행사 진행을 잘 하고 방송을 잘 한들 그건 모두 가욋일이잖아요. 그건 못해도 돼요. 정 안 되면 방송 안 하면 되니까.
하지만 글을 못쓴다고 하면 이건 안 되거든요. 글 쓰는 게 제 직업이니까 그것만은 어떻게든 잘 쓴다는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하죠.
-. <필름 속을 걷다>는 영화 속의 배경을 찾아 가는 여행 에세이입니다. 앞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기대했던 환상이 깨진다거나 고생을 많이 하셨던 여행도 많았을 것 같아요.
책에 쓴 내용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티베트였죠. 그곳은 환상이 깨진다기보다는 고산병 때문에 너무 고생을 했었어요. 그 다음에 제가 <화양연화>를 굉장히 좋아해서 홍콩과 캄보디아를 찾았습니다. 이 때도 참 기대와 달랐어요. 일단 홍콩에서는 영화의 성공에 따르는 금전적인 부스러기 때문인지 서로 의상에 참여했다고 싸우는 가게를 만나 마음이 좀 안 좋았고요. 더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캄보디아의 수상마을에 갔을 때인데 이분들이 너무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었어요.
저는 <화양연화>에서 봤던 달콤한 사랑의 환상 따위를 보러 갔는데 현실이 너무 압도적이다 보니까 판타지를 찾아서 그런 곳을 여행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하찮은 일처럼 느껴졌어요.
-. 그래서인가요? 책 서문에 나오는 말이 '나에게 여행은 고행이다'라고 표현된 부분이었어요. 보통 독자들이 생각하기에는 의아한데요. 여행은 행복하지 않나요?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모든 여행이 행복하죠. 그런데 행복이라는 의미가 좀 다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영화도 느끼는 재미가 제각각 다르잖아요. 코미디 영화를 보면서 소리내 웃는 재미도 있을 테고 슬픈 영화를 눈물 흘리며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재미도 있을 테고.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잖아요. 제 경우, 여행의 행복이라는 건 막상 가서는 잘 모르겠지만 돌아 와서는 좋은 것 같아요.
언뜻언뜻 생각이 난다든가. 글을 쓸 때 떠오르는 이미지라든가. 그런 것들이 너무 좋아요. 여행을 하는 도중에는 일정이 빡빡하고 시간에 쫓기고 하니까요. 여행이 저한테는 업무잖아요. 물론 가면 좋아요. 누가 가란다고 갈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저 조금 투덜댈 뿐이죠.
-. 특별히 애착이 가는 여행이 있으신가요?
두 가지예요. 하나는 영화가 너무 좋아서 그 장소에 가고 싶은 경우인데 호주가 그랬고요. 반대로 어떤 장소에 가고 싶어서 영화를 고른 경우도 있어요. 쿠바가 그런 경우예요.<브에나비에타 소셜클럽>도 물론 좋은 영화지만 그 영화가 너무 좋아서 가고 싶었던 건 아니거든요. 쿠바 아비나에 너무 가고 싶은데 마침 그 영화가 눈에 들어왔지요.
-. 그렇게 두 가지 경우를 놓고 봤을 때 어떤 경우가 더 만족도가 높은가요?
글쎄요. 둘 다 좋아요. 특히 호주에 갔을 때 너무 좋았어요. 아무도 안 가는 대저택 같은 곳이었는데 영화 속 그 저택에서 혼자 하루를 보냈거든요. 사실 영화 속 감성에 젖어 들기 위해 가는 여행이잖아요. 대저택의 밤이 무섭고 신기하기도 하니까 이입의 농도가 진해지죠. 바로 이 점이 매력이에요. 남들 다 가는 파리나 뉴욕은 별로 재미 없거든요.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찍은 영화가 얼마나 많나요?
-. 여행 에세이집은 이번이 두번째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세번째 책도 계획 중이신가요?
네, 지지난 주부터 시작했어요. 마침 이 달에 13일 일정으로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에 다녀올 계획이에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해피 투게더>가 촬영됐던 곳에 가는 일정이에요. 남미는 가는 길이 워낙 멀어서 왕복에만 4일이 걸려요. 실제로 취재 가능한 시간이 일주일 조금 넘지요. 시간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지금 인터뷰 직전에도 항공권을 알아보고 있었어요.
-. 체력적으로 힘든 일이겠어요.
그럼요. 여행 뿐만 아니라 제가 하고 있는 일 90%가 중노동이예요. 사실 글 쓰는 일이 중노동이지요. 우아하게 시 한 줄 쓰고 두 달 여행 다녀오고 그런 라이터는 없다고 봐요. (체력이 많이 좋아 보이시진 않은데…) 기신기신하는 사람들이 또 오래 살잖아요.(웃음)
-. 겨울과 잘 어울리는 여행지 두 곳만 추천해 주신다면요?
<러브레터>와 <러브 액츄얼리>가 겨울 영화로는 안성맞춤이죠. 그 두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곳이 일본 오타루와 런던인데 한 곳에 가면 환호하게 되어있고, 또 다른 한 곳에 가면 실망하게 돼 있어요. 왜냐면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서구의 명절이라는 게 우리의 생각과 많이 달라요.
얼핏 생각하면 한국 흥청대는 것처럼 크리스마스의 원조인 서구는 얼마나 재미있겠냐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사실은 전혀 아니에요. 버스도 안 다니고, 전철도 안 다니고, 택시도 못 잡고. 네 끼 중에 세 끼는 햄버거 먹고 이랬으니까요.
-. 실제와 영화는 매우 다른 것 같네요.
그렇죠. 그런데 로맨틱 코미디가 다 그래요. 솜사탕처럼 달콤한 사랑의 환상을 파는 장르이기 때문에.
-. 일본 오타루는 영화 <러브레터>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눈이 많이 오나요?
제 고향이 강원도입니다. 근데 강원도에서도 그런 눈을 본 적이 없어요. 실제로 러브레터가 촬영된 모든 장소는 다 오타루예요. 단 한 곳, 히로코가 "오겡끼데스까?"를 외친 곳만 텐구야마라는 다른 곳이고요.
-. 영화 속 장면과 가장 어울리는 곳은 어디였나요?
후지이 이츠키의 집이죠. 제가 갔던 날도 눈이 엄청나게 왔는데 저 눈 속에서 쓰러진 손녀를 업고 2시간을 뛰었던 할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까, 절로 상상이 되더라고요.
-. 글쓰기에 관한 질문을 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기자님의 글은 무척 쉽습니다. 하지만 최근 영화와 관련된 글들이 어려워지고 현학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말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영화를 논하는데도 갖가지 의미를 끌어들이는 일들이 너무나도 흔해졌습니다. 기자님 견해는요?
일단 글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통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쉬워지는데 한계는 있어요. 신문사의 경우, 중학교 학생들도 읽을 수 있는 기사를 작성하라는 지침이 있어요.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사회면 기사 같이 사실만을 나열하는 기사는 이 지침이 유효할지 몰라요.
문화면에 실릴 기사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단적인 예로 영화라는 매체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선 약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다 못해 장르영화를 이해하는데도 그렇지요.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혀 보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독자까지 설득시키는 글을 쓰게 되면 글 자체의 질적 수준이 저하되는 경우가 있어요. 제 경우를 이야기하면, 전 쉽게 쓸려고 노력은 하죠. 그러나 반드시 쉽게 쓰려고는 하지 않아요. 어려울 땐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지적해주신 대로 영화를 다룬 글이 어려워지는 경향에 관해서는 저도 의아스럽게 생각합니다. 영화 한 편 이해하는데 왜 이렇게까지 어려운 도구들이 동원되어야 하는지, 다소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갖고 있어요. 어찌됐든 양자 모두 필요합니다.
글 │ 홍유진
사진 │ 지유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