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카메라를 통해 음미하는 느림의 미학
이상엽 <이미지 프레스> 발행인
시간의 흐름은 한 방향으로만 치닫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쌍방향성을 띤다.
'빠름'으로 치닫는 시대 흐름 속에 '느림'을 갈구하는 목소리가 커져만 가고 파편화의 속도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유대'를 모색하는 움직임 역시 빨라진다.
기술진보도 마찬가지 아닐까. 기술진보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하지만 기술진보가 거침 없이 진행될수록 과거의 기술에 대한 향수는 더더욱 깊어만 간다.
최근 몇 년 사이 이 땅에 불어닥친 사진 열풍. 이 열풍은 카메라 기술의 급속한 발전, 그리고 대중화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다. 게다가 디지털 기술이 접목된 카메라의 등장으로 사진 열풍은 더더욱 거세지기에 이른다.
그러나 쌍방향성은 이런 흐름에도 예외 없이 작용한다. 디지털이 몰고온 거센 파고에 밀려 구닥다리로 치부된 수동카메라가 새로이 주목을 받고 있다. 얼핏 외관만 보았을 때, '과연 사진이 찍힐까'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하는 구식 카메라 - 그러나 구식 카메라가 만들어낸 결과물엔 디지털 이미지가 담아내지 못하는 특별한 그 '무엇'이 스며 있다.
디지털의 거센 파고에도 매니아들을 주축으로 꾸준히 존재를 과시하던 클래식 카메라 - 자칫 과거의 유산으로만 기억될 뻔 했던 클래식 카메라는 다큐멘터리 웹진 이미지 프레스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이미지 프레스가 2004년 펴낸 <낡은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는 매니아들 사이에서만 회자되던 전설의 명기들을 대중 앞에 선보임으로써 디지털에 익숙하던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선사해줬다. 클래식 카메라가 지닌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 둘씩 늘어갔고 - 당연하게도 - 클래식 카메라의 판매량도 증가했다.
<낡은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의 성공에 고무되었을까? 2년 뒤 이미지 프레스는 <낡은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 속편을 내놓는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속편 역시 클래식 카메라에 대한 예찬이 지면을 메우고 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시대적 대세인 디지털에 밀려 사양길로 접어드는 옛 카메라에 대한 안타까움도 엿보인다.
<낡은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 2>에서는 또 어떤 이야기를 풀어 놓았을까?
이미지 프레스 발행인인 이상엽 작가를 만나 클래식 카메라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 발행인님께서는 <낡은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 1편과 2편을 통해 클래식 카메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드러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드는 의문점인데 작가님께서는 작업을 클래식 카메라로만 수행하고 있나요?
아니에요. 최근 유행하는 디지털 일안반사식 카메라(DSLR)은 초창기부터 사용했습니다. 2003년 처음 접했는데 당시는 500만 화소대였었지요. 러시아 취재는 2004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 취재 당시에는 소비에트 시절,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1930~50년대에 생산된 클래식 카메라(사진)와 디지털 카메라를 같이 사용했어요.
사진도 디지털과 필름이 섞여 있습니다. 지금도 작업 전부를 디지털로 하지 않아요. 디지털과 필름의 비율은 50대 50대 정도. 최근 디지털 기종을 장만하면서 디지털의 비중이 70% 정도로 약간 높아졌습니다. 그 이유는요 35mm 판형을 놓고 비교했을 경우, 필름 감도(필름이 빛을 인식하는 정도 - 편집자)가 아무리 낮아도 디지털의 화질을 쫓아오지 못해요. 디지털이 우위에 있다는 이야기죠.
그래서 35mm 판형에서 굳이 디지털을 쓸 이유가 없어졌어요. 필름은 중형급만 사용하지요. 롤라이 플렉스와 하셀 블라드에서 제조한 X팬 파노라마 카메라를 써요.
-. 디지털과 클래식 카메라가 가진 특성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각자가 특성이 달라요. 지금 시판중인 디지털 카메라는 만능이에요. 셔터를 누를 힘만 있으면 돼요. 노출 측정, 초점 조절 등 촬영의 모든 과정들을 카메라가 다 해줘요.
하지만 클래식 카메라는 그렇지 않아요. 노출계도 없지요. 초점도 손으로 맞춰야 합니다. 촬영자가 모든 촬영의 과정을 하나하나 계산 해서 사진을 찍어야 해요. 쉽게 이야기하면 천천히 빛을 관찰하고 각도도 보고, 프레이밍, 앵글 등등을 다 고려해서 한 장씩 촬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상당히 속도가 느려요. 시간이 걸리죠.
클래식 카메라의 사용은 교통수단이 발달한 세상에서 걷기와도 마찬가지 일이죠. 느려요. 느림의 미학이 있어요. 하루에 정성들여 촬영을 해도 2~3통을 넘어가지 않아요.
디지털은 어떻죠? 하루동안 취재하면 1천 장 촬영은 일도 아니에요. 게다가 디지털은 필름이 아깝지 않아 얼마든지 누를 수 있어요. 메모리 카드만 바꿔 끼면 됩니다. 필름은 그렇지 않아요. 일단 필름은 물질이죠. 그리고 현상-인화를 거쳐 물체로 나타나게 되지요. 직접 보고 만질 수 있어요. 반면 디지털의 데이터는 컴퓨터라는 매체를 필요로 합니다. 즉 컴퓨터가 있어야 디지털로 찍은 데이터를 볼 수 있지요.
정리 하자면 제가 클래식 카메라에 천착하는 이유는 '느림'이 좋아서 입니다. 지금은 젊지가 않아요. 젊었던 시절엔 무엇이건 빠른 것이 좋았어요. 빨리빨리빨리....
그렇지만 지금은 육체도, 사고도 속도를 쫓아가기 힘들어 졌어요. 조금 느리게 사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제가 사진에 모든 열정을 바친지도 올해로 20년이 됩니다. 지난 20년이 너무나 빠르게 흘러갔어요.
-. 어떤 카메라를 가장 아끼시나요?
라이카 M3, 그리고 바르낙형 Ⅲf 카메라를 가장 소중히 합니다. 제가 사랑하는 카메라고 이 카메라들은 벌써 아이들이 선점해 놓았어요. 제가 세상을 떠나도 제 아이들은 이 카메라를 처분하지 않고 잘 사용해 줄 것으로 확신합니다.
-. 앞서 취재에 임할 때 디지털과 필름의 비중이 반반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디지털의 비중이 약간 높아졌다고 하셨지요. 향후 디지털의 비중을 높여나갈 계획이신가요?
예. 물론입니다. 지금 디지털의 발전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요. 디지털은 대세입니다. 전문 사진가들은 이제 디지털을 거부할 수 없어요. 다만 클래식 카메라는 디지털이 갖지 못한 미덕을 보조하는 역할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 디지털 카메라가 갖지 못한 미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바로 '느림'입니다. 클래식 카메라는 세상을 좀 더 깊이 관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요.
-. 책 내용에 대해서 질문 드립니다. 본문 가운데 <오지가 아닌 오지를 찾아서>라는 기사가 있었어요. 오지를 탐방한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나요?
본문에도 언급했지만 이제 사실상 '오지'라고 불리울만한 곳은 없어요. 전세계가 가까워지고 또 전세계 사람들이 위성 TV를 통해 바깥 세상을 들여다 보는 요즈음에 어디가 오지입니까? 대신 오지라고 '불릴 만한' 곳이 가끔은 있어요.
현장까지 닿는데 며칠이 걸리는 곳은 있어요. 비행기든 모든 교통수단을 동원해도 3~4일이 소요되는 그런 곳. 그렇다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세상을 모르는줄 아세요? 천만에요. 이 사람들도 세상 흐름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곳 사람들도 TV를 통해 정보를 얻고 있어요.
제가 기사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바는 이 사람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이들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들일 뿐이에요. '오지'라고 하는 장소에 대한 막연한 기대, 호기심, 선망 등등은 실망감만 증폭시킵니다. 이런 것들을 머리 속에 담아간 분들 대부분이 막상 오지를 접하곤 크게 실망했어요. '아 이건 아닌데'하며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그들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들이고, 이들이 다소 불편하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이해만 해준다면 좋지 않겠어요?
-. 책 서문에 "필름 사용자들의 간을 졸이는 비보들이 잇달아 들려온다"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수동 카메라 산업이 사양산업이 될 것으로 보시는지요?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북극 등 극한상황에서 디지털은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고 봅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해 볼 때 수동 카메라 산업이 아주 없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봅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디지털 카메라의 기능은 더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시중에 나와있는 일부 제품은 완벽하게 방진 방습이 되는데다 초저온에서도 가동될 수 있는 배터리를 장착하는 기종도 나와 있어요. 디지털 카메라의 발전을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흐를 수록 강력한 기능을 갖춘 카메라가 등장할 것입니다.
이런 흐름에 익숙하다보니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하지요. 왜 클래식 카메라를 고집하느냐고. 이유는 간단합니다. '구닥다리'가 불편하니까 어거지로 쓰지요. 희소성, 매니아적 기질, 역사에 대한 존중 등등의 이유로 인해 클래식 카메라를 사용해요. 이런 성향을 막을 수도 없고요.
-. 어떤 측면에서 보면 고집이 아닐까요?
맞아요. 고집입니다. 왜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진공관 오디오를 듣겠어요? 엄청나게 좋은 디지털 제품들이 많은데. 클래식 카메라에 대한 선호도 마찬가지 입니다. 클래식 카메라는 양산된 제품이 아닌 장인들이 공들여서 만든 보석 같은 제품들이기 때문이지요.
-. 최근 디지털 사용자 가운데서 '인간적'이라는 이유로 구식 카메라로 선호의 대상을 옮기는 이들이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이들은 한결 같이 필름을 사용하는 편이 더 인간적이라고 하지요. 디지털과 아날로그,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엇이 인간적인지에 대한 의문의 해답은 결국 사진이 말해줍니다. 카메라는 도구일 뿐입니다.
-. 마지막으로 책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시죠. 1편의 경우 취재 내용과 카메라 소개가 뒤섞여 있어 다소 산만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2편은 1편에 비해 편집이 깔끔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독자들에게 이 책 <낡은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 2>가 어떻게 읽혀지기 바라는지요?
의외로 2편이 1편에 비해 인기가 없어요. 2편의 편집이 더 깔끔하다고 해도 많은 분들이 1편이 더 재밌다고 해요. 참 독자들 알 수 없어요. 2편은 독자들이 분명히 지적한 바를 반영했어요. 그럼에도 독자들은 이 책을 접해보고는 이마저도 차갑다고 해요. 독자들 대하기 참 어렵다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이 책은 '여행', '사진', '클래식 카메라' 이렇게 세 주제가 병치돼 있습니다. 얼핏 혼란스럽게 비칠 수도 있지만 이 주제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어요. 이 세 가지 주제가 적절이 조화를 이루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어떻게 담아낼까, 즉 카메라를 들고 여행을 다니면서 무슨 사진을 찍을까? 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있지요.
* 현재 이상엽 작가는 인사동 아트비트 갤러리에서 <레닌이 있는 풍경> 사진전을 열고 있다.
전시회는 12월 4일까지.
글, 사진 | 지유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