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ielglattauer@AM.3.de
제목: 존경하는 다니엘 글라타우어씨 당신을 고소하겠습니다.
전 불과 닷새전까지만 해도 당신을 전혀 알지 못했었습니다.
외국에서는 흔하디 흔한 다니엘이란 이름이 '예언자'의 이름이라는 것은 오늘 알았구요.
참고로 당신이 2006년 독일어도서상 후보까지 올랐던(프로필에 '올랐던'이라고만 되어있으니
분명 수상은 하지 못했군요)'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란 작품이 새 서재에 얌전히 꽂혀 있는 것도
전혀 몰랐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바다 건너(네, 분명 '바다 건너'가 맞습니다. 당신과 나를 가로 막고 놓여있는 대서양이나 태평양을
건너와서도 온통 사방인 섬에 살고 있는 나에게는 '바다 건너'라는 표현이 아주 제격입니다.)
힘들게 짊어지고온 제 책들 사이에 당신의 책이 있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선 이 점에 대해 당신께 사과부터 해야겠군요.
대한민국 유수의 대 출판사인 문학동네가 2008년 4월 초판을 낸 이후 2010년 5월 초판의 9쇄를 찍어
세상에 내보냈고 그 책이 어찌어찌 내 손에 닿았다가 전혀 읽히지도 못한 채 서재의 한 귀퉁이에 쳐박혀야
했던 한심스런 상황에 대해 변명부터 하겠습니다.
일단 당신의 책을 출판했던 '문학동네'라는 출판사는 당신뿐만아니라 너무나 훌륭한 작가의 주옥같은 작품들을
너무 많이 출간을 하고 있다는게 일단 당신의 책을 알아보지 못한 첫번째 이유가 되겠습니다.
보석이 보석사이에 끼다 보면 제대로 빛을 구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당신도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내가 몹시 아끼는 출판사의 책들은 서로 자기를 알아봐 달라고 조르는 통에 얼굴도 모르는 두 주인공의 뜬금없는
'메일스타일 사랑'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저급한 수준의 눈을 가진 독자였다는 것이 두번 째 이유라고 해야겠군요.
그래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주요 포인트는,
진작 당신의 이 작품을 알아보지 못해 미안하다는 겁니다.
그것도 '문학동네 10월 이색리뷰대회 선정 도서'에 당신의 이 책이 선정되지 못했더라면 여전히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홀로 늙어가고 있었을거라는 걸 고백하자니 제가 너무 부끄럽군요.
양장본으로 된 당신의 책 표지에는 연두색 고운 띠지가 둘러져 있었습니다.
'올해 읽은 소설 중에 제일 재미있었습니다. 진짭니다!'
그런데 격이 높은 출판사가 내어 놓은 마케팅 광고문구로는 너무 아니지 않나요?
조선일보에 인기리에 연재되고 있는 '책 읽어주는 남자' 김광일 기자의 추천사라니 마음이 혹하긴 하지만
진짭니다!..라는 이 부분이 걸렸습니다.
보통 진짜가 아닌 경우에 '진짜'라고 외치는 사기꾼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신다면 제 이런 마음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근데 만약 다시 이 책이 재판을 해서 세상에 나온다면 그 기자의 '진짭니다!'라는 문구 밑에 밑줄을 주욱 긋고는
'믿어보세요 진짜라니까요!'라고 더 진하고 큰 글씨로 '독자 아무개'를 꼭 넣어주기를 부탁할 겁니다.
2010년만 진짜 재미있는 책이 아니고 누가 읽던 그 해에 가장 재미있는 책이 될거라는 걸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일단, 어느 새 손편지가 사라지고 메일로 대체된 사랑의 통신방법이 좀 아쉽긴 하지만 시대가 그런 걸 어쩌겠습니까.
아, 그래도 여주인공인 에미는 다행스럽게 자신이 주고 받은 메일을 몽땅 인쇄를 해놓았다더군요.
어느 순간 공중에 흩어지는 글자가 아닌 손에 붙잡을 수 있는 종이로라도 증거를 남겼다니 정말 남자주인공인 레오의
실체를 느끼고 싶었구나..가슴 깊이 와 닿더군요.
아마 저라도 에미처럼 그렇게 했을겁니다.
안타깝게도 그 인쇄본이 들키지만 않았다면 에미와 레오는 여전히 메일을 주고 받았을까요?
간혹 어떤 독자들은 한 번의 만남도 없이 얼굴도 모르는 상대와 단지 메일을 주고 받음으로써 사랑이 싹틀 수 있냐는
항의를 받지는 않았나요?
뭐 나도 책을 읽는 초입에서는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당연하지요.
제대로 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만나보지 않은 상대와 글로써 사랑에 빠진다는 걸 상상하기는 쉽지가 않을겁니다.
하지만 책을 많이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글이라는게 글을 쓴 당사자를 가장 진실되게 만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입으로는 거짓을 말하기 쉽지만 글로는 쉽지 않습니다. 일단 흔적을 남기는 이런 소통의 방법에는 대체로 신중하기 마련이니까요.
암튼 '더 이상 귀사의 잡지는 구독하지 않겠다'는 에미의 메일이 잘못된 메일주소로 보내지는 바람에 시작된 두 사람의 사랑은
신선했고 가슴 설렜고 가슴아팠습니다.
와인 혹은 위스키병을 바닥내면서 간절히 만나기를 기원했던 두 사람의 만남을 감질나게 지켜봐야 했던 독자들은 당신에게
욕을 해댈 수도 있지만 나는 기어이 그 두사람이 만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점에서 당신의 결정에 박수를 보내는 바입니다.
물론 메일이라는 통신을 통한 두 남녀의 간절한 사랑이라는 주제를 선택한 당신의 안목에는 경의를 표하는 바이구요.
대단합니다. 저도 하마터면 레오의 메일을 기다리고 있는 에미처럼 자꾸 메일함을 열어볼 뻔 했으니까요.
어쩌면 실제로 이런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많다는 걸 혹시 당신은 알고 있었나요?
그리고 또 잠깐 남자 주인공이 혹 당신의 모습을 닮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보통 작가들은 작품속의 인물에 자신을
투영하기도 하거든요. 흠..그렇다면 당신은 따뜻하고 자상하고 때로는 실랄하기도 하고 열정적이기도한 사람이겠군요.
화이트와인을 마시고 자신에게 와 달라고 떼를 쓰는 레오는 모습은 너무나 인간다워서 자극받은 모성이 혹은 달구어진 감성이
먼저 택시를 잡아타고 달리고 있었으니까요. 누가 택시비를 낼 것인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입니다. 상상은 참으로
달콤하고 편리합니다.
잠시 레오의 메일이 끊기면 안달을 하거나 실랄할 저주 혹은 살짝 애교스런 앙탈을 부리던 에미의 모습이 사랑스러웠습니다.
분명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그린게 분명하다고 단언하고 싶네요.
레오의 여동생이 짐작했던 '세 명의 에미'중에 분명 가슴이 큰 에미가 당신이 점찍은 에미가 분명하죠?
흠..당신은 레오의 입을 통해 "왜 내가 가슴이 큰 에미'를 당신일거라고 생각하죠?"라고 점잖고 격이 높은 남자인 척 했지만
당신도 역시 그런 면에 열광하는 남자가 아니던가요? 대답을 들을 수는 없겠지만 스스로에게 정직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확실히 독특하고 제대로 재미있었습니다.
메일이든 사랑이든 중독이 되면 끊기가 어려운 법이죠.
튼튼한 엔진을 장착한 무쇠돌이 자동차를 닮은 당신네 나라에서도 '사랑하였으므로 보내주노라'같은 신파가 아직은 존재하는군요.
아 정작 당신을 왜 고소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았네요.
당신은 간절히 수면을 원하는 한 여자를 새벽 세시까지 붙들어 놓고 당신의 책을 읽기를 강요하였으며
더불어 '바람이 부나요'하면서 답장을 은근히 요구했습니다.
메일로 나눴던 두 사람의 사랑에서는 상대의 머리카락을 스치는 미세한 바람조차 느낄 수 없었겠지만
당신의 책에서 나는 당신이 우리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간절한 바람을 마구 느껴져서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니까요.
됐나요?
그리고 이렇게 당신에게 가 닿지도 못할 메일을 그것도 장시간에 걸쳐 쓸 수밖에 없게한 당신의 기발함과
터져나오는 웃음때문에 숙면중이었던 가족들에게 심한 원망을 들었다는 것도 당신을 고소해야하는 조그만 이유가 되겠네요.
레오이기도 하면서 당신이기도 한 남자주인공의 이 말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는 걸 그냥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내가 이따금 당신의 집이 되는거, 좋아요! -293p
이런 센스쟁이 같으니라구! 당신은 분명 바람둥이 이거나 바람둥이가 될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난 알아챘거든요. 여자들이 이런 말에 훅 넘어간다는거..알고 있다니.
아 그리고 이 드라마같은 작품의 뒷 이야기인 '일곱번째 파도'란 작품에 대해서도 큰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출판이 되었는지 검색을 해봐야겠지만요.
이제 당신의 차기 작품들을 눈여겨 보는 매서운 독자가 한 명 늘었다는 걸 알고 계시길 바라며
저도 레오의 답장을 기다리며 안달하는 에미처럼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책이 나온지 몇 년후에 생뚱맞게 당신의 작품을 읽고 왕독자인양 설치고 있는 한국의 독자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