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동산병원 인근.
우리 일행은 메가폰을 둘러맨 문화해설사 뒤를 엄마 닭 쫓는 병아리들처럼 쫄래쫄래 따라다니고 있었다.
한 톨이라도 흘릴세라 해설사의 입에서 떨어지는 설명을 일용할 모이처럼 주워 먹던 참이었다.
스미스 선교사의 자택을 지나, 공연 무대가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귀퉁이에 ‘청라언덕’이라는 기념비가 보이자 이내 ‘동무생각’ 노래까지 부르며 해설이 늘어졌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청라 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이 <고향생각>은 박태준 선생님이 만든 곡으로....’
‘백합’같은 내 동무라고요? 해설사의 설명이 계속되는 동안, 백합과 동무 사이의 무슨 연관성 같은 걸 생각하고 있었다.
남자 중. 고등학교만 다녀서인지는 몰라도 거뭇거뭇하고 북슬북슬한 덤불이나 건초에 더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암튼 좌로 보나. 우로 보나 백합은 아니올씨다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터>의 저자이자 정원사인, 박상현에게 '백합'은 어떤 의미의 꽃이었을까?
노랫말에서의 백합이야 박태준이 짝사랑했던 신명학교 여학우를 의미한다.
하지만 더 나아가 저자의 고백처럼, 인생길에서 만나는 동무들의 고마움과 우정이야말로 백합 같은 향이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끼니 걱정을 하던 친구에게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이던 한 끼를 나눠먹은 일화, 7명의 친구들과 지켜온 30년의 우정이라면 백합보다 더 한 향도 나겠다.
저자에게 백합은 아득하지만 절절한 친구의 우정으로 발그레하고 은은한 향이 나는 꽃이다.
개인적인 추억에 덧붙여, 정원사로서의 전문지식 이를테면, 백합이 구근식물로 폐와 기침에 효험이 있다는 도감에나 나올법한 정보들도 유감없이 보여준다.
저자, 박상현의 이력은 독특하다.
언론사와 방송사에서 근무했던 그는, 불혹의 나이에 캐나다 서부 해안 밴쿠버의 도시, 빅토리아로 '이식'(移植)을 감행한다.
좋은 환경을 찾아, 꿈을 찾아, 열망을 찾아, 뿌리라도 다칠세라 조심하며 빛 잘 드는 곳, 고르고 골라 식솔들과 뿌리를 내렸다.
그러기에 부차트 가든은 최적의 장소였다.
여의도공원과 비슷한 7만 평의 규모에 정원사만 60명 ~ 600명까지, 여름 꽃 축제를 위해서 5월 하순부터는 500여종, 50만 송이의 꽃들이 심기는 곳, 110년 역사에 한 해 10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찾아 오는 곳. 바로 이곳이었다.
그런 부차트가든은 저자에게 일터이자, 배우는 교육의 장이고, 꽃과 사람에 대해 성찰하는 '선방'이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터>는 바로 그 결과물을 모아놓은 5년간의 소중한 기록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묘미는 어울릴 듯 말듯하면서 꽃과 사람이, 그리고 화제와 주제가 끈끈하면서 말랑하게 이어진 구성에 있다.
그 연결이 작의적이거나 성급하지 않고 거북스럽지 않은 호흡으로 이어진다.
꽃과 나무에 대한 해박한 지식, 추억의 자세한 고증, 기자 출신다운 탄탄한 배경지식은 이 책을 더욱 풍요롭고 흥미롭게 만들어준다.
모양과 냄새가 부조화의 극치인 '프리틸라리아' 꽃에서는 이해인의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을 거쳐서 향기로운 이웃의 이야기와 사람의 향을 내고자 하는 자성으로 흐른다.
다른 종과 어울릴 줄 아는 '철쭉'은 다민족 다문화의 모자이크 사회를 말하고 김치와 토시 등의 별종이 수용되는 분위기를 대변한다.
울도 담도 되는 '측백'에서는 넉넉한 울타리가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가시가 뾰족한 탱자나무보다 넉넉한 측백'같은 사람이 되길 희망한다.
박상현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 터>를 통해 다시금 생각해야 될 것은 꽃과 나무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내 일터의 소중함' 같은 것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안정된 자리와 눈에 보이는 계획적인 삶을 포기하고 이민의 결단을 하는 것이 용기와 다채로운 삶을 위한 '카덴차'라는 점에서는 존경스럽기도 하고 멋지다.
게다가 정원사, 박상현의 ‘부차트 가든’은 분명, 아름답기까지 하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일터는 ‘부차트 가든의 선 큰 가든’에 비해서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성에 차지 않은가.
하지만 다시금 생각해볼 것은 꼭 꽃과 나무만이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터’는 아닐 것이다.
머나먼 이국땅에 와서 새벽 5~6시부터 종일 흙을 파고, 꽃과 씨름하는 노고는 화려한 가든 뒤에 숨겨진 '노역'일 것이다.
결코 화려하거나 폼나지만은 않다.
그 점에서 ‘부차트 가든’은 다시 읽혀야 한다.
설령, 화려하지 않아도 나와 당신의 ‘부차트 가든’ 역시, 아름답다.
더 멋있는 '부차트 가든'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전지가위'로 가지를 쳐주고 '콤포스트 티(액상비료)'로 손 부지런하게 꾸려왔을 테니 말이다.
떠나고 싶고, 도달하고 싶은 곳 일수도 있지만, 어쩌면 다정하게 봐주기만 하면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와 당신이 밟고 있는 곳이 이미, ‘부차트 가든’이란 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