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는 소리를 나는 가슴으로 먼저 듣는다.
유년(幼年) 에도, 꿈 많던 청춘시절에도,
미혹(迷惑)의 강을 훌쩍 건너
슬프다!
“비로소 하늘과 통하게 되었다”는 지천명(知天命)에 이른 지금까지
가을을 맞이하는 내 증상은 한결 같다.
여름 끝물의 어느 상큼한 아침,
처서(處暑) 지나 한결 달라진 소슬한 바람 끝에서
가을의 쓸쓸한 서정을 느낀다.
한낮 동안 그악스럽게 울어대던 매미소리 대신
크레파스 낙서 어수선한 낡은 바람벽 어디쯤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높아지면
나는 그 때 부터 말을 잃고
가슴으로 지나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끙끙 앓기 시작한다.
세상이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던 꿈 많던 청춘시절의 들뜬 가슴이
서른 해가 훨씬 지난 오늘까지 계절병처럼 앓는 것으로
그렇게 가을은 시작된다.
여름내 작렬하는 태양 빛에 추레해지고 낡아있는 육신,
그리하여 마른 먼지만 풀풀 날릴 것 같은 깡마른 가슴에
서서히 그리움의 싹이 틔기 시작하고
한여름 동안 잊혀졌던 나의 내면을 향해 깊은 응시를 던지는 계절.
가을, 조락(凋落)의 계절이다.
조락은 가장 은밀하고도 깊은 가슴의 울림으로 우리에게 온다.
여름내 무성한 잎을 자랑하며 그 그늘에 매미를 불러 들여
우리를 즐겁게 해주던 뜰 앞 자작나무가 하나 둘 잎을 떨구고
스산한 바람에 바스락 흔들리는 가을이 오면
비에 젖은 낙엽을 밟으며 이리 저리 걷기도 하고
귀뚜라미소리, 풀벌레 소리 더 없이 고적한 어느 가을밤,
문득 완행열차라도 집어타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기도 하는 계절,
가을이다.
우리는 흔히 감성(感性)을 사춘기 한 때의 거추장스런 열병이나
비생산적인 센티멘탈리즘으로 치부하고는 한다.
그러나 감성이 없는 인간이란, 그러한 삶이란,
대저 얼마나 삭막하고 막막 할 것인가.
감성과 함께 논리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이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 인간의 의식이다.
이성은 대상에 대해 객관적이고 분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현대의 눈부신 과학문명은 그러한 이성의 소산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만을 중시해서 만사를 이성적으로만 생각하고 처리한다면
과연 이 세상은 어떠할 것인가.
그때의 인생은 마치 기계가 돌아가듯 정확할지는 몰라도
차갑고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마치 정교한 로봇이 되어 살아가는 세계가 될 것이다.
아!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감성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효소이며,
육체와 정신을 이어주는 가장 높고 아름다운 촉매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야...가을이다.
감성의 계절. 정말이지 릴케의 시처럼
‘읽고 쓰며 잠자지 않고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우리들의 계절,
가을이다.
나는 과연 무엇인가?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가슴으로 스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여 볼 일이니,
모름지기 그대들이여,
귀뚜라미 소리 높아 가는 이 가을에
좀더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해> 지는 것은 어떠실지...
-가을의 길목,
내설악 한계령에서
적막강산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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