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과 함양(下)
글. 사진 / 김경식
이제 함양의 옛 선비들과 문인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정여창과 김일손이다.
함양은 정여창 같은 대 선비가 있었기에 ‘우함양’이라는 소리를 들었을지 모른다.
이런 사실을 증명 받기 위해서는 남계서원과 정여창 고택을 탐방하면 의문이 풀린다.
일두 정여창(1450~1504)은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에서 부친 정육을과 모친 경주 최씨 사이에 태어났다.
3남 1여 중 장남이었다.
부친 정육을은 이시애 난을 진압하다가 함경도에서 사망하였는데, 17세였던 아들 정여창이 시신을 옮겨와 장사 지낸다. 그의 나이 22세 때는 경기도 이천의 이관 선생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지리산에 입산하여 3년간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가 유학자로 이름을 드높일 수 있었던 것은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에 입문한 것이리라.
그의 나이 마흔살에는 16일간 김일손과 더불어 지리산을 등정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그는 국토 사랑을 몸소 느끼게 된다. 그가 다시 함양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안의 현감을 자원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안의에 서 있는 광풍루 란 누각은 이때 정여창이 세운 것이다.
정여창 선생 동상
5년 동안 함양 안의 고을의 현감으로 근무하면서 정사를 공평정대하게 처리하였다. 안의 고을이 학풍으로 계속해서 유명해진 것은 정여창이 함양 고을에 근무하면서 서원에 준하는 학교를 세워 백성들을 가르친 것에 기인된다.조선시대 대표적인 도학자이며 성리학의 이기론을 기초로 소학과 가례의 실천적인 효행에 모범을 보인 정여창은 문학적인 조예도 높았다. 그의 시 한편을 읽어보자.
바람부들 너울너울 가벼니 나부끼니
사월의 화개땅엔 보리가 이미 가을이구나
두류산 천만첩을 보두 다 둘러보고
외로운 배는 또다시 강물따라 내려가네.
-- 정여창 시 ‘ 두류시’ 전문
이 시는 김일손과 함께 지리산을 여행하면서 지은 시인 듯 한데 서정성이 돋보인다. 두류는 지금의 지리산이다.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586번지에 위치한 남계서원은 함양에서 안의로 이어진 국도변에 자리 잡고 있다.
1552년에 건립되어 소수서원 다음으로 오래된 서원이다.
서원입구에는 홍살문과 하마비가 서 있다. 서원 정문인 ‘풍영루’는 고색창연하게 서 있다. 누각에 올라 서원을 보면 연못과 강당인 명성당, 동재인 애련헌, 서재인 영매헌이 한눈에 들어온다. 무싯날 오후에 필자가 방문하니 마침 강당인 명성당의 큰 마루에는 동네 노인들이 모여 좌담을 하고 있다. 노인들은 내게 묻는다. "어디서 오셨슈"
사당이 있는 높은 언덕에는 남계서원 전경과 남계천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이 서원이 있었기에 함양의 선비들은 어깨를 펼 수 있었을 것이다. 서원은 조선시대 사학으로 선비들과 학생들이 모여 학문을 논하면서 석학이며 충절로 세상을 떠난 분을 제사하는 곳이다.
남계서원은 조선시대 두 번째로 설립되었으며, 일두 정여창 선생의 학덕을 선양하고 추모하기 위해 이 고장의 큰 선비 개암 강익(1523~1567)과 유생들이 건립하였다.
강익 선생은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로 평생을 정여창 선생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기 위해 살다가 죽은 사람이다. 사람의 일생이 누군가를 위해 바쳐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서원에는 정여창, 강익, 정온 이 세 사람을 배향하고 있는데 정온이란 사람이 궁금하다.
동계 정온( 1569~1641)은 병자호란 때에 이조참판으로 최명길의 화의 주장을 적극 반대한 인물이다. 강화도가 함락되고 항복이 결정되자 자살을 시도하였으며, 끝내 덕유산에 입산하여 움막을 짓고 조를 심어 생계를 유지하다가 세상을 떠난 분이다.
남계서원
정여창은 한때 연산군의 사부가 되기도 하였지만, 무오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은 자신의 스승을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보낸다. 9년 시한으로 유배를 떠난 종성에서 정여창은 관청의 화부로 노동을 감수하면서 살아야 했다.
결국 유배 6년차 이던 1504년, 그의 54세에 유배지 함북 종성에 사망한다. 제자들이 그곳까지 가서 시신을 운구하였는데 2개월이 걸렸다. 스승과 제자 관계를 지금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뿐만 아니라 남계서원을 지어 영원히 그를 배향하게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3년 후에 신원이 복원되고 우의정에 추증되어 문헌공 시호까지 받은 일두 정여창 선생은 동방오현의 한 사람이 된다. 정여창이 동방오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목숨을 걸고 그의 신원운동을 한 함양의 선비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으리라.
동방오현은 어떤 사람들인가. 퇴계 이황, 일두 정여창, 환훤당 김굉필,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등 5명이다. 신라 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동국 18현에도 그의 이름은 들어 있다. 신라시대에는 설총, 최치원, 고려 시대 안향과 정몽주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황, 이이, 조헌, 김장생, 김집,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김인후, 성혼, 송준길, 송시열, 박세채 모두 이름을 대면 알만한 거목들 속에 그의 이름과 함께 지금껏 불러지고 있다.
창파만경로성유(滄波萬頃櫓聲柔): 푸른물 넘실넘실 노소리도 부드러워
만수청풍각사추(滿袖淸風却似秋): 스쳐가는 맑은바람 가을인양 서늘해라
회수갱간진면호(回首更看眞面好): 다시한번 돌아보니 진정코 아름다워
한운무적과두류(閒雲無跡過頭流): 흰구름 두둥실 두류를 넘어가네.
이 시는 김일손(1464∼1498) 선생의 작품이다. 지리산을 기행하며 지은 시인데, 초가을에 어울리는 시다.
35세라는 짧은 생애로 떠난 김일손 선생은 역사학자였지만, 시인이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선생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게재하였다가 유자광의 모함을 받아 연산군에 처형당한다.
그를 배향하는 청계서원(淸溪書院)과 정여창 선생을 모신 남계서원이 100여m 간격을 두고 도로변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으니 이는 함양 땅이 어떤 곳이란 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정여창과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다. 이 들 세 사람은 함양땅에서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맺고 중앙정계에서 큰 활약을 하다가 사화에 희생된 인물들이다. 이런 인물들의 정기가 배어 있는 듯 남계 서원이 있는 마을은 조용하고 따듯한 정감을 느끼게 한다.
청계서원은 일찍이 김일손이 공부하던 청계정사를 후대 선비들이 서원으로 재 건립한 것이다. 무오사화로 자식들마저 모두 처형당한 비운의 역사학자인 김일손 선생의 삶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리다.
남계서원에서 멀지 않은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에는 아직도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이 여러 채 남아 있다. 마을입구가 아름다워 가고 오는 일이 쉽지 않은 마을이다. 집들도 고색창연하다.
이런 고가중의 한 곳이 ‘일두 정여창 고택’이다. 이 집이 유명하게 된 것은 KBS 드라마 ‘토의 촬영지였으며, 유홍준의 ‘나의문화유산’이란 기행집에 크게 소개가 되었기 때문이다.
3,000 평의 대지에 12동의 한옥이 잘 배치된 경남 지방의 대표적인 양반 집이다.
정여창 선생 고택
솟을대문 상단부에는 자주색 바탕의 편액 5점이 걸려있어 처음 방문자에게도 예사집이 아님을 알려준다.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소박하게 서 있다. 일각문 우측으로 'ㄱ'자 형태의 사랑채가 기풍있게 앉아 있다. 일두 정여창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그를 기리기 위해 100년 후에 지어진 집의 가풍이 볼만하다. 사랑채 우측에 서 있는 늙은 소나무가 이 집의 역사를 대변한다. 인공적으로 조성한 정원인 석가산(石假山)을 보면서 조선 선비집의 품격에 자부심이 든다. 10칸의 곡식창고는 경주 최부자집의 곡간과 비교 되는 규모다. 한창때 이 집의 부를 실감할 수 있다.
이 사랑채는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흥선대원군 등 조선의 유명 인사들이 많이 묵고 갔다. 사랑채 벽에 크게 써 있는 '忠孝節義(충효절의)'란 글씨의 작가는 아직 미상이다. 사랑방에는 추사가 쓴 ‘百世淸風’이란 글귀가 마음을 당긴다. ‘백년 동안 맑은 바람이 부는 집’ 이란 뜻에 세상적인 욕심을 잠시나마 잊어 본다.
이제 정자문화의 보고 화림동 계곡으로 떠나야 한다.
화림동 계곡은 안의마을에서 전북 장수군으로 가는 국도 26호선을 따라 약 4㎞를 가면 오른쪽에 나타난다, 아름답게 흐르는 개울가에 음식점들이 많은 마을이 나타나면 그곳이 화림동의 농월정이 있던 곳이다. 화림동 계곡은 남덕유산에서 발원하는 물결이 흘러 팔담팔정을 이루어 여러 곳에 아름다운 정자를 세웠다. 깊은 계곡을 따라 너럭바위 위로 흐르는 물소리가 청아하다.
화림동 계곡 (농월정 있던 자리)
'달을 희롱하며 논다'는 농월정은 우리 선조들의 풍류의 멋이 머무는 곳이다.
이곳에 있었던 아름답던 정자인 농월정은 2003년 화재로 인하여 전소되었다. 결국 이곳은 이제 농월정의 흔적만 남아 있게 되었다. 1,000평이나 되는 넓은 바위에 쓰여진 이 글귀가 없었다면 서운하였으리라.
주춧돌만이 농월정이 있던 자리를 알려준다. 농월정은 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낸 지족당 박명부가 건립한 정자다. 화림동계곡 달바위(월연암)라고 부르는 반석위에 세운 2층 누각이었다.
넓은 바위는 여인의 살결처럼 부드럽고 하얀 매끈하다. 소용돌이치는 물줄기를 바라보면 세상사 시름을 잊어본다.
‘花林洞’ 이라는 큰 글자가 보이고 그 위로 길게 서 있는 '지족당장구지소'란 글귀를 읽는다.
'장구'란 지팡이와 신발이니, 이 정자의 주인이었던 지족당 박명부가 지팡이 짚고 신발을 신고 거닐던 곳이란 뜻이다.
지족당장구지소
우리나라에서 정자가 가장 많으면서 집중된 곳은 경남 함양과 전남 담양이다.영남의 정자들은 산속 깊은 계곡 바로 옆에 건립하였다면 호남의 정자들은 생활의 근거지가 되는 곳에 세웠다. 이런 이유로 영남의 정자들은 자연을 다스리는 듯한 높은 모습을 보여주고 호남의 정자들은 주변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서 있는 것이 예사다.
전남 담양은 가사문학의 본거지답게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독수정, 취가정, 명옥헌, 송강정, 풍암정, 면앙정 등이 당시 문인들의 삶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경남 함양의 정자들은 황석산의 화림동계곡과 기백산의 용추계곡에 주로 건립되었다.
백석운천면 白石雲千面 흰 바위 흰 구름 천 가지 얼굴
청라직만기 靑蘿織萬機 푸른 덩굴 만 개의 베틀로 짠 듯
막교모사진 莫敎摸寫盡 모두 표현하지 말게
내세채미귀 來歲採薇歸 내년에 은거하러 오게
춘풍삼월무릉환 春風三月武陵還 봄바람 부는 삼월 무릉도원 돌아오니
제색중류수면관 霽色中流水面寬 비 개인 날 개울의 수면도 넓구나
불시일유비분사 不是一遊非分事 한번 노는 것 분수밖의 일이 아니네
일유인세역응난 一遊人世亦應難 한번 즐기는 일 세상에 어렵구나
-- 남명 조식 선생의 ‘遊安陰玉山洞’ 중에서
이 시는 남명 조식 선생이 함양군을 기행하며 쓴 시다. 화림동 계곡을 읊은 이 시 속에는 아름다운 풍경속에 살고 싶은 조식 선생의 인간적인 모습이 담겨 있다.
이제 함양을 떠나야 한다. 화림동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육십령이다. 고개가 하도 험해 산적이 많아서 60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다는 육십령은 이제 터널이 생겨 산을 휘어 감아 오르는 차는 별로 없다. 다시 안의를 거쳐 지곡 IC 방향으로 차를 운전하며 함양의 정기를 느끼고 싶다.
아름다운 함양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화림동 계곡의 흐르는 여울의 수면을 본다.
그리고 연암 박지원의 애절한 시 한편를 조용히 소리내어 읽어 본다.
"형을 생각하며" 다. 이 시에서 흘러나오는 넓고 깊은 감동에 가슴이 흔들린다.
그의 인간성과 문학성에 다시 경의를 표하며 함양을 떠난다.
우리 형님은 누굴 닮았나
아버지 생각나면 형님을 보았지.
이제 형님 생각나면 그 누굴 보나
시냇물에 내 얼굴을 비추어 보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