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과 함양 (上)
글 .사진 / 김경식
삼복더위가 지나고 난 후 어느 날 아침, 공기의 촉감이 서늘하게 느껴지면 초가을의 시작이다.
소슬바람이 아침과 저녁으로 불어오고 시원한 공기 알갱이들이 살결에 닿으면 여행을 떠나고 싶다.
열대야와 불쾌지수가 높은 여름날이 사람들에게는 짜증스럽지만, 나무와 식물 곤충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의 시기다.
이런 여름의 절정이 지나고 불현듯 찾아온 초가을 바람이 불면 까맣게 잊고 지내던 사람들이 그리워 만나고
싶어진다.
이럴 때 마음이 통하는 이와 더불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마음속에는 그리움이 일렁이고 푸른 하늘가로 뭉게구름들이 목화처럼 피어오르면, 여름내 은밀하게 감추어
놓았던 방랑자적 그리움이 가슴을 자극한다.
함양의 산야
행복한 순간은 찰라적인 현재의 삶에 존재하지만, 기행을 통한 깊은 정서적 충만의 행복감은 오래간다.
특히 문학기행을 통한 작가의 삶이 바로 지금 자신에게 전달되어 가슴을 흔들기라도 한다면, 평생을 자극하는
삶의 의미가 되기도 하리라. 역사적인 실체가 사라진 현장에서 작가의 작품과 기록으로 작가를 기억하려는
노력은 숭고하다.
어쩌면 사라지고 없어져 버린 것들이 우리의 영혼을 울릴 때가 있기 때문이다.
9월에는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로 자신의 삶에 충실하며 아름다운 낭만적인 삶을 갈구했던 문학가이며 사상가를
만나러 간다.
연암 박지원 선생이다. 가는 곳은 경남 함양 땅이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1737년(영조13년)2월5일, 서울 반송방 야동에서 출생하였다.
이곳은 지금의 서대문 근방인데 필자도 아직 생가 확인은 하지 못했다. 1805년 10월 20일 69세에 세상을 떠나
장단 송서면 대세현에 묻히게 되는데 북한지역이라 방문이 불가능하다. 함양은 연암이 5년간 현감이란 직책으로
재임하면서 남한에서는 유적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결국 연암을 알기 위해 우리가 유일하게
찾아 갈 수 있는 곳이 함양땅 뿐이다.
함양 (화림동 계곡)
함양은 삼국시대 때 이미 신라와 백제의 문화가 만나는 장소였다.
조선시대 함양은 서원과 향교 누각이 많아서 ‘좌안동, 우함양’ 이라 불릴 만큼 선비들이 많았던 곳이다.
지리산과 덕유산을 비롯한 높은 산들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함양군은 역사적인 명승지가 자연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고을이다.
멀찌감치 밭 매는 늙은 노인들의 모습에 가슴이 아리던 산골마을 달린다. 다랑이 논배미가 유년의 추억을
기억하게 만드는 산마을 보면서 달린다.
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 수량이 많은 여울물은 함양의 들판을 적시면 마을과 마을의 생명수가 된다.
경남 함양은 유명한 몇 명의 대문장가를 수령으로 모셨던 고을이다. 최치원, 정여창, 김종직, 박지원 이름만
대면 알만한 문장가들이 대대로 함양군민들을 사랑했다.
당시 함양군민들을 위해 헌신한 이들이 남긴 유적들이 현재는 관광지가 되어 조상들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대전에서 진주로 연결된 대진고속도로를 타고 내리 달리면 이내 함양 I C다. 경남 땅이라고 아주 먼 곳 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싱겁게 느껴질 정도다.
함양군청 건너편에는 고운 최치원 선생과 조선시대 무와사화와 인연이 있는 누각인 학사루가 서 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함양 태수로 재임 때 이 학사루에 올라 시를 짓고 생각에 잠겼던 곳이라 하니 천년이 넘은
누각이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사연도 많은 이 학사루는 임진왜란 때 불타고 조선 숙종 때 다시 건립된다.
크기가 정면 5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이 학사루는 사연도 많은 조선 최초의 사화였던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기도 한다.
이 고장의 군수를 지낸 점필재 김종직은 영남지방의 사림파의 거두로 정여창, 김일손 김굉필등의 제자들과 함께
훈구파와 대립한다.
이 무렵 함양 군수였던 김종직이 학사루에 걸린 경상도 관찰사인 유자광의 시가 걸린 현판을 불태워 버린다.
학사루
이것을 알고 난 유자광은 김종직에게 마음속 깊게 원한을 감추고 성종이 세상을 떠난후 성종실록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연산군에 보고하여 사림파 제거의 발단을 마련한다. 조의제문은 세조가 단종을 폐위한 것을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초나라 의제에 비유하여 세조를 비판하고 단종을 위로했다는 것을 트집 잡은 글이다.
김종직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기에 무덤에서 꺼내 다시 목을 자르는 부관참시를 한다. 그의 제자들인 김일손과 많은 사림들이 죽음을 당하고 정여창은 유배를 떠난 함경도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사람이 품은 마음속의 원한은 이렇듯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내고 만다.
함양초등학교 교정에는 수령이 약 500년이 넘은 잘 생긴 느티나무가 서 있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직접 심은
느티나무라고 전해진다. 이 느티나무에는 김종직 선생에 관한 슬픈 사연이 있다. 함양 군수로 재임 때 아들을
낳았는데 안타깝게 5살 때 홍역에 걸려 죽는다.
아들이 죽고 다음해 임기를 마치고 함양을 떠나며 죽은 아들을 그리워 하며 심은 나무가 이 느티나무다.
김종직이 사십이 넘어 본 아들이었으니 오죽하면 이 나무를 심어 아들을 기억하려 하였겠는가.
그런 아들을 잃은 슬픔이 그대로 묻어 나는 김종직의 시 한 편이 '점필재집'에 전해온다.
내 사랑 뿌리치고 어찌 그리도 빨리 가느냐
다섯 해 생애가 번갯불 같구나
어머님은 손자를 부르고 아내는 자식을 부르니
지금 이 순간 천지가 끝없이 아득하구나.
처연한 사연이 깃든 이 느티나무는 아들의 목숨까지 보태어 지금까지 살아남아 함양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이 느티나무는 함양초등학교 교정에서 국가 보호수인 천연기념물 제407호가 되어 아주 오랫동안 김종직의 죽은 아들의 혼을 달래게 될 것이다.
새포름한 물결이 사운거리는 낭랑한 여울물소리가 몇 시간 달려온 나그네의 성정을 자극한다.
상림숲에 어제 내린 빗방울이 이슬방울처럼 영롱하다. 우주의 역사속에 인간의 수명은 어쩌면 연꽃에 맺힌 이슬방울 같은 존재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듯이 모든 사물과 사람들의 마음도 순간마다 조석지변으로 변한다. 그러나 변화는 소멸을 의미하고 사라지기 때문에 소중하다. 꽃은 지기 때문에 귀하다.
꽃이 만약 지지 않는다면 그 신비함과 아름다움은 반감될 것이다. 우리 국토의 어디고 사람이 낳고 죽어갔다.
역사적인 유물도 시대의 흐름에 퇴락하고 사라지곤 했다. 여행을 떠나는 일은이런 사라진 것들을 상상하고
존재하는 것을 만나러 떠나는 행위다.
상림을 조성한 이는 신라때 대문장가 최치원이다.
최치원(857~ )은 당시 천령(함양) 태수로 부임한 후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길이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제방을
쌓았다.
넓은 습지대에 나무도 심었다. 이것이 오늘날 함양의 명물 상림(천연기념물 154호)이다. 1,100년 전의 일이다.
이런 의미를 이해하며 최치원 시 한수 읽으며 상림숲을 거닐면, 인공숲을 조성한 그에게 조금이나마 예를 표하는
것이리라.
秋 風 惟 苦 吟 (추풍유고음) 가을바람에는 괴로운 시 뿐이든가
世 路 少 知 音 (세로소지음) 세상에는 나를 알아주는 친한 벗 드물어라.
窓 外 三 更 雨 (창외삼 경우) 한밤중 창 밖에 보슬비 내리나니,
燈 前 萬 里 心 (등전만리심) 등불앞의 내 마음은 그저 아득하여라.
--- 최치원 시 추야우중(秋夜雨中)
고운 최치원 신도비
최치원은 12살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한다.
그곳에서 여러 벼슬을 하고 신라에 돌아와 한림학사 등의 벼슬을 지내기도 한다.
그러나 복장한 신라조정은 그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늙어 있었다.
그는 홀연히 합천의 가야산에 들어가 여생을 보내게 된다.
당나라에서 문필이 뛰어나 당나라에서 황소의 난을 글로 진압하기 위해 황소(黃巢)의 난을 성토하는 격문을
지어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던 그였지만 만년은 고독했다.
인공제방에 조림공사후 함양은 홍수의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5Km 제방을 따라 길게 이어졌던 상림숲은
현재 1.6km만 남아 있지만, 그 역사성에 숭고한 서기가 스며있는 곳이다. 120여종의 약 2만 그루의 활엽수와
낙엽수가 계절마다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상림에는 나무와 식물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은리석불, 함화루, 사운정, 초선정 등 숲속에 조화를 이우어 숲을 더욱 품위있게 만드는 역사적인 유적들이다. 사실 이런 유물들은 본래 상림과는 인연이 없던 것들인데 이후 이곳 숲속에 자리 잡았다. 상림숲을 걷다보면
모든 것을 수용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슴이 넓어진다.
늙은 나무들이 하늘을 덮은 상림 숲길은 걷다보면 침묵으로 다가서는 초가을을 느끼게 된다.
상림 내에는 볼 만한 유적이 몇 있다. 정면 3칸의 우람한 누각은 함화루도 그중 하나다. 원래 함양읍성의 남문
이었는데 일제가 성을 헐 때 상림으로 옮겨 왔다. 지리산을 바라본다 하여 망악루(望岳樓)라 불리어 오다가
함화루라 고쳐 부르고 있다.
숲길을 걷다보면 상림숲 서쪽 방향으로 최치원 선생의 신도비가 서 있다.
함양 상림 숲
함양의 상림 숲길을 걷다보면 연리목이 눈에 있다. 뿌리가 다른 나무의 두 줄기가 하나로 합쳐진 것을 연리목
이라 부른다. 상림숲에는 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가 나무의 아랫도리부터 서로 포옹을 하듯 접목되어 있다.
이런 모습 때문인지 연리목 앞에는 부부나 연인이 손을 잡고 있으며 사랑과 애정이 깊어진다고 이곳 사람들은
믿고 있다.
우스꽝 스런 얼굴 표정으로 늙은 거북이 한 마리가 지고 있는 신도비는 비록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일제 시대에 민족정신의 발로로 세웠을 것이다. 또한 함양 군민들의 홍수피해를 덜어주기 위해 숲을 만든 지 천년이 넘어 세웠지만 어느 신도비보다 값지다. ‘이은리석불’은 상림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망가사라는 절터에서 홍수 때 떠내려 온 것으로 추정된다. 1950년 이은리 냇가에서 발견되어 상림으로 옮겨졌다. 두 손이 떨어져 나갔으며 배 아랫부분은 훼손이 심하지만 그 불상속에는 상림의 기운을 받아서 인지 불심이 일렁인다.
무엇보다 이 상림 숲에는 함양을 빛낸 '역사인물공원'이 있다. 아름답게 조성된 이 역사공원에서 필자는 연암 박지원 흉상앞에 오래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애절한 삶과 죽음의 인연들에 관한 이야기를 머릿속에 정리해 보았다.
연암 박지원은 1787년에, 자신의 형인 박희원 (1722~1787)이 세상을 떠나고 난후 그 슬픔을 한편의 시로 남겼다. 이 시는 연암의 정과 심경을 잘 표현하고 있다. 형이 세상을 떠나고 난 여름 어느날 연암은 개울가에 앉았다. 그 물속에는 자신의 얼굴속에 형의 얼굴이 있음을 본다.
우리 형님은 누굴 닮았나
아버지 생각나면 형님을 보았지.
이제 형님 생각나면 그 누굴 보나
시냇물에 내 얼굴을 비추어 보네.
-- 박지원 시 ‘형을 생각하며’
상림 숲속을 흐르는 개울가에서 불현듯 이 시를 생각하게 된 것은 어인 일인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정치를 하였으니 얼마나 백성들에게도 정성을 다였겠는가.
사람과의 인연은 시간이 지나 갈수록 이별하는 과정이리라. 연암은 1월에 아내가 세상을 떠난 얼마 후 맏며느리가 죽는다. 설상가상으로 그 해 7월에 형이 세상을 떠난다. 이런 죽음들을 보면서 어느 시냇가에 앉은 연암은 삶의 슬픔에 견딜 수 없었으리라. 이 시에는 그런 연암의 감성이 묻어난다. 2남 2녀 중 막내였으며 조실부모하였던 연암에게 15세 연상의 형은 어버지나 다름이 없던 존재였다.
이덕무(1741~1793)는 이 시에 대해 “정이 지극하여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게 하니, 정말 진실되고 절절하다.”며 “내가 선생의 시를 읽고 눈물 흘린 것이 두 번이었다” 고 했다. 다른 한편의 시는 연암이 큰 누나가 세상을 떠났을 때 쓴 ‘누님을 보내며’라는 묘지명에 쓴 시이다. 그 시를 한번 읽어보자.
아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 화장하던 것이 어제 일만 같구나.
나는 그때 막 여덟살이었네.
(중략)
말을 세워 강 위를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은 바람에 펄럭거리고,
돛대 그림자는 물 위에 꿈틀거렸다.
언덕에 이르러 돌아가더니
나무에 가리어서 다시는 볼 수가 없어라.
강 위 먼 산은 검푸르러 마치 누님의 쪽진 머리 같아라.
강물 빛은 누님의 화장 거울 같고,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아라.
울면서 빗을 떨구던 일을 생각하나니
유독 어릴 적 일은 또렷하고 또 즐거운 기억이 많네.
세월은 길어 그 사이에는
언제나 이별의 근심을 괴로워하고
가난과 곤궁을 근심하였다.
인생살이 덧없기 마치 꿈속과도 같구나.
형제로 지낸 날들은 또 어찌 이다지 짧았더란 말인가.
떠나는 이 정녕 뒷날의 기약을 남기지만
보내는 이 오히려 눈물로 옷깃 적시네.
조각배 이제 가면 언제나 돌아 오려는가.
보내는 이 무심하게 언덕 위로 돌아가네.
-- 연암 박지원 시 ‘누님을 보내며’ 중에서
연암 박지원(1735~1805)은 실학자이자 소설가다. 연암은 청나라 방문 때 그 곳의 선진 기술을 눈살미 있게 익힌다.
이것을 안의 현감 재임 때 국내 최초로 물레방아를 제작하여 백성들에게 보급한다.
오래전부터 디딜방아로만 곡식을 찧는 작업을 하던 사람들에게 이 물레방아는 신기하고 놀라운 기구였다.
연암 박지원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난다. 그는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한 할아버지 박필균에 의해 양육된다.
15세까지 그는 문맹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1752년 17세의 나이로 이보천의 딸과 결혼한 후 학문에 정진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결혼 후에 이양천에게 비로소 학문을 익힌다. 스승 이양천은 성호 이익의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 홍문관교리를 지낸 사람이다. 이때부터 3년 기간 사람들과 담을 쌓고 공부에만 전념한다.
이즈음부터 ‘광문자전’과 ‘민옹전’을 비롯한 9편의 단편소설을 창작한다. 스승 이양천의 도움으로 ‘사기’를 비롯한 역사서적등을 탐독하고 문장 쓰는 법을 배운다. 처남 이재성도 그의 학문 정진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연암의 나이 19세 때에 이름이 나기 시작할 무렵 스승 이양천이 세상을 떠난다. 스승의 죽음으로 인해 인생의 덧없음과 낭만적인 삶을 추구하게 된다.
이 시기에 양반전을 비롯한 소설을 창작하기 시작한다.
1760년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결혼생활은 가난에 허덕이게 된다. 과거에도 응시하였지만 낙방한다. 과거시험을 단념하고 그는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한다. 1768년 그의 나이 31세 때, 지금의 파고다고원 근처로 이사를 한다. 이때 이웃에 살던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등과 사상적이며 학문적인 동지애로 인연을 맺는다.
연암 박지원 흉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