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석 김인겸과 공주
윤고방
공주에 들면서
동공주 남공주가 있어 잠시 어리둥절했을 뿐 공주로 드는 길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IC를 내려오자 초겨울의 한가한 들길과 논밭 그리고 드문드문 자리 잡은 인가들이 휴식을 준비하고 있는 듯 편안한 모습이다. 곧이어 시내 한 복판을 흐르는 금강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한 눈에 보기에도 비단강이라 할 만큼 흐름이 부드럽고 햇살에 온몸을 드러내고는 수줍은 듯 반짝이고 있다. 우선 금강대교를 건너, 강가의 그리 높지 않은 해발 110m 언덕 위에 자리 잡은 공산성에 다다랐다.
공산성
이 성은 백제 문주왕 원년(475)에 한산성(漢山城)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였다가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에 걸쳐 64년 간 도읍지였던 공주를 수호하기 위해 축조한 것이다. 강 건너 북쪽에서 보기에 마치 ‘公’자의 형상을 닮았다 하여 공산성이라 이름 붙여진 것인데, 당연히 공주(公州)의 명칭 유래와도 직접 관련되므로 공주시를 대표할 만한 역사 유적이다.
산성 바로 앞 큰 길 건너에 자리 잡은 ‘고마나루쌈밥집’의 음식 맛을 탐색도 할 겸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들어섰다. 수많은 골동 민속품들이 정든 옛 주인의 손길을 떠나 흙벽 여기저기에 걸려 있고, 구석마다 옛 물건들이 웅크리고 앉아 제각기 다른 세월의 향내를 풍기고 있다. 넓은 전망창 가득히 공산성 서쪽 언덕이 병풍처럼 펼쳐졌는데, 경관도 뛰어나거니와 ‘고마나루’란 상호가 우선 범상치 않다.
고마(固麻)는 우리 민족의 옛 종족명인데 아시아 북방민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토테미즘(totemism)에서 비롯된 말이다. 즉 단군신화에도 등장하는 곰의 고어이며, 백제시대의 곰(고마)나루[熊津]이나 고마성[熊津城]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어의 ‘가미’ ‘가무’나 사이타마현에 있는 백제 고구려인의 유민 정착지 이름도 고마[高麗]라 하고 있으니, 백제 멸망 후 중국이 한자식으로 붙였던 웅진도독부에서 비롯된 웅진(熊津)이란 지명의 원 이름이 고마나루인 것이다. 고려 태조 때(940) 공주로 개칭되었는데, 이보다는 오히려 고마나루가 훨씬 더 친근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웬일인가?
마음은 퇴석 김인겸의 가비(歌碑)를 찾는 일에 쏠려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도 우선 공주 전역을 조망하며 탐색의 방향을 잡아야 하겠기에 공산성에 먼저 올랐다. 사실은 성에서 가장 높은 임류각(臨流閣)에 올라 그 옛날 백제의 숨결을 한 모금이라도 어서 마시고 싶고, 심호흡과 함께 사진도 한 컷 스케치도 한 장 해 보고 싶은 욕심이 앞섰다고 해야 할까?
금서루
우람한 석축 위에 위용을 자랑하며 금서루(錦西樓)가 먼저 맞이한다. 약간 더 위쪽으로는 당시 신하들의 연회 장소로 쓰인 임류각이 소나무와 고목들 사이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마침내 언덕 맨 위에 오르니 일시에 확 펼쳐지는 동서남북 온 천지가 시야와 함께 가슴마저 환히 열어 놓는다.
비단강과 공산성의 시들
공주시를 동에서 서로 가로 지르는 강줄기는 시가지 구석구석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터를 비옥하게 가꾸며, 공산성의 발목을 적시고 허리께를 감싸며 흘러서 부여쪽으로 천천히 방향을 바꾸고 있다. 저 유유한 흐름 따라 세월도 역사도 흐를 것이다. 누군가 세월은 흐르는 게 아니고 쌓인다고 했던가?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역사는 쌓인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마저도 저 강물처럼 흐르다 비바람에 깎이어 점차 야위어지고 쇠락하여 더러 망각의 깊은 늪 속에 빠져 버리는 게 아닌가 싶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 안타까움의 끝자락에 문학기행이 있다. 이 땅 위에 새겨진 땀 어리고 피 어린 삶의 기록인 문학 현장을 찾는다. 더러는 가물가물 사라져 가는 그 현장에서 무심한 세월을 탓하기도 하고, 후손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뼈저린 자책에 빠져 들기도 한다. 이미 세월 밖으로 떠나 버린 그분들의 흔적을 더듬어 정성된 마음으로 매만지고 쌓인 먼지를 털어낸다. 이미 자랑스런 우리 역사의 일부가 된 그들의 향기로운 체취를 함께 나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아름다운 역사의 일부가 된다. 이것이 바로 문학 기행이다.
공산성에서 바라본 금강
저 푸른 금강 물결은 어떤 역사의 밝고 어두운 뒤안길들을 기억하며 흐르고 있을까? 과연 백제 흥망의 증인이요, 동학농민혁명 마지막 전투의 그 뜨거운 피와 살들을 받아내고 묻어 준 강물이라면 그 눈빛이 예사롭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저리도 편안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 주는 강 물결에게 신동엽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 시인은 저 하류 쪽 부여에서 태어나서 ‘진정한 자유’를 꿈꾸었던 사람”이라며, 서사시 ‘금강’의 첫머리를 들려주었다.
금 강(錦 江)
<제 1장>
우리들의 어렸을 적
황토 벗은 고갯마을
할머니 등에 업혀
누님과 난 곧잘
파랑새 노랠 배웠다
울타리마다 담쟁이 넌출 익어가고
밭머리에 수수모감 보일 때면
어디서라 없이 새 보는 소리 들린다
우이여! 훠어이!
쇠방울소리 뿌리면서
순사의 자전거가 아득한 길로 사라지고
그럴 때면 우리들은 흙토방 아래
가슴 두근거리며
노래 배워 주던 그 양품장수 할머닐 기다렸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신동엽은 1967년 38세 때, 펜클럽 작가기금을 받아 4800여 행의 장편 서사시 <금강>을 짓게 되는데, 이 시는 1894년 3월 동학혁명, 1919년 3월 기미독립선언, 1960년 4월 학생혁명을 한 맥으로 꿰뚫어 ‘민중의 자유 의식’을 불러일으키려는 주제를 담고 있다. 이야기가 시작부터 좀 무거워지나 보다. 동학 얘기는 뒤에 가서 우금티동학전적비 대목에서 더 하기로 하고 시원한 공산성 바람을 좀 더 쐬어야겠다.
좀 전에는 먼 경치를 보았고 이번엔 시선을 낮추어 가까운 데로 옮기니, 성벽 사이사이로 바람에 나부끼는 마른 풀잎들이 보인다. 얼마 전 여름날에는 온갖 빛깔의 아름다운 꽃들을 피우며 푸른 잎새를 자랑하던 그들. 그들은 1500여 년 전 이 언덕에서 서성거리며, 울고 웃던 사람들, 성을 지키다 신음 속에 죽어간 이름 없는 병사들, 이 땅의 주인이던 높거나 혹은 낮은 백제의 사람들이기도 할 것이다.
마침 문효치 시인이 1999년에 펴낸 국토여행 에세이 <시가 있는 길> 속에서 발견한 시 한 편이 있다. 그는 임류각 아래 풀밭에 앉아 야생화들을 바라보며, 아쉬운 세월의 한 모서리를 이렇게 어루만지고 있다.
공산성의 들꽃
이름을 붙이지 말아다오
거추장스런 이름에 갇히기보다는
그냥 이렇게
맑은 바람 속에 잠시 머물다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즐거움
두꺼운 이름에 눌려
정말 내 모습이 일그러지기보다는
하늘의 한 모서리를 조금 차지하고 서 있다가
흙으로 바스라져
내가 섰던 그 자리
다시 하늘이 채워지면
거기 한 모금의 향기로 날아다닐 테니
이름을 붙이지 말아다오
한 송이 ‘자유’로 서 있을 뿐
한 송이 풀꽃에게만 ‘자유’를 부여하지 않았음은 너무도 분명하다. 이 성벽 위를 내달리던, 거닐던, 앉았던 모든 백제의 사람들과 그 후예들 그리고 끊임없이 목숨 피었다 진 모든 중생들에게 영원한 자유의 징표를 건네주는 진혼시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에세이를 따라 성벽을 좀 더 거닐어 보자.
공북루
성벽은 일렬로 이어지다가 금강을 만났다. 공산성의 북측이다. 여기에 오면 산성은 금강과 나란히 누워 있어, 마치 잠자고 있는 지어미 옆에 부채질이라도 해 주며 앉아 지키고 있는 지아비의 모습이다. 공북루에 잠시 올라 산성의 지어미 같은 금강을 한번 안아 보는 맛이 좋다. 공북루는 강남과 강북을 왕래하는 관문이었다. 이 아래 어디쯤엔 꽤나 큰 나룻배가 닿아 있었을 것이고, 보따리를 이고 진 백제인들이 옷자락을 펄럭이며 배에 올랐을 것이다.
저 금강물에 실려 흘러가 버린 백제여. 그러나 이곳을 찾는 후예들은 이 성벽에 귀를 대고 그 시대의 사투리를 들으며 추억할 것이다.
조선의 시인 김진(金榗, 1585~?)의 시가 생각난다.
백제 회고(百濟 懷古)
빗긴 햇살 잔잔히 물에 젖는데(斜陽劒盡大江平)
천고 흥망 한 가닥 피리 소린가!(千古興亡一笛橫)
배에 가득 가을 풍경 싣고 가면서(閒載滿船秋色去)
백제성에 쌓인 원한 조상하는고야(百濟宮北弔孤城) <황병국 역>
김진도 백제가 그리워 이 강 기슭 어디쯤에 이르러 이 시를 읊지 않았을까? 그러나 백제도 가고 백제를 친 신라도 가고 김진도 가고 얼마쯤 세월이 가면 나도 갈 테니, 세상 일이란 이리도 허망하기만 한 것인가?”
여기서 문 시인이 발길을 돌렸듯 필자도 부지런히, 하루해를 재촉하는 하늘을 배경으로 공산성을 뒤로 하고, 이번엔 백제큰다리를 건너 김인겸의 가비가 있다는 금강변공원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퇴석 김인겸의 가비(歌碑)를 찾아서
자동차들이 쌩생거리며 찬바람을 일으키는 길가를 내려가 우선 공원 안을 살폈다. 강가의 수만 평 됨직한 고수부지를 편편하게 다듬어 놓고 군데군데 오륙 년생 나무들을 심어 놓은 공원은 초겨울의 마지막 저녁 햇살을 받아서인지 황량하고 멀쑥해 보였다. 저녁 걷기 운동을 하는 몇몇 사람에게 물어 봐도 모르겠단다. 다시 관광 홍보과에 전화로 문의를 해도 강변 공원 안에 있다는 말만 되풀이. 해는 한 뼘밖에 안 남았는데 일단 공원을 한 바퀴 숨차게 돌아도 보이는 건 쇳조각으로 만든 외로운 철곰 한 마리뿐. 그런데 저기 공원으로 내려오기 전 큰 길 쪽에 흐릿한 채로 무슨 비석 하나가 보인다.
비석은 바로 길 가에 자리 잡았다. 사물이란 너무 가까이 있어도 잘 안 보이는 법이다. 퇴석이 서울로 자주 나들이하던 고마나루 옛터에 세운다고 세웠는데 좀더 여유롭게 작은 비석 공원이라도 만들고 찾는 사람들도 숴어 갈 수 있게 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사진을 한두 장 찍는 사이 벌써 해는 공산성 어깨를 집고 꼴깍 넘어가 버렸다. 금강은 엷은 주홍빛 노을에 물든 공산성의 그림자를 안고 천천히 몸을 누인다.
퇴석 김인겸 가비
비명은 전서체(篆書體)로 ‘퇴석김인겸가비(退石金仁謙歌碑)'라 썼다.
기단석은 화강암으로 튼실하게 받쳐 놓고 그 위에 가로 1m 세로 40cm되는 오석에다 비명 일곱 자를 양각으로 뚜렷하게 새겼다. 그 위로 다시 넓은 오석을 얹어서 세로 글씨 행서체로 제목을 다시 쓰고, 그 왼쪽에는 퇴석의 앉은 모습을 음각으로 새긴 다음, 일동장유가의 대표적인 가사 한 구절을 고문 글씨 그대로 새겼는데, 날이 어두워져서 도무지 읽어낼 재간이 없구나. 조금만 더 일찍 도착할 것을......안타깝게 비 뒷면으로 서둘러 시선을 옮겨야 했다.
그 대신 뒷면은 남은 노을빛을 받아 희미한 글씨나마 점자책 더듬어 읽듯이 억지로 메모하여 여기에 옮길 수 있으니 다행이지만, 선생의 뜨거운 충정에 비하면 답사자의 정성이 부족함은 매 한 가지가 아니겠는가?
가비에 실린 일동장유가 일부
“선생의 휘는 인겸이며 자는 사안(士安) 호는 퇴석이다. 안동 김씨 15세로 청음(淸陰) 상헌님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창복 어머니는 장씨시다. 단기 4040년(1707)에 나서 4105년(1772) 6월 16일에 졸했다. 47세에 진사, 57세에 계미통신사의 삼방서기로 일본을 다녀왔다. 뒤에 지평 현감을 지냈다. 저술로는 한문 동사록(東槎錄), 동사수창록(東槎酬唱錄), 가사 일동장유가가 있다. 성품이 곧고 깨끗했으며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고 멋과 익살을 알며 의협심이 강하고 풍류를 즐긴 분이셨다. 한 하늘 아래서 같이 살 수 없는 일본인들에게 명문장으로 국위를 떨치고 국문학사상 불후의 명작 일동장유가를 지으신 지 225년이 되는 오늘, 선생의 인품과 유문(遺文)을 사모하는 후진들이 각자의 정성을 모아 생시에 선생이 옷자락을 펄럭이며 건너다니시던 이 오얏나루 언덕에 조그만 돌덩이를 세워 선생의 자취를 다음과 같이 명을 지어 기록한다.
비단 가람 유유한데 물은 돌에 빛이 맑다. / 굳은 성품 밝은 행실 불의부정 못 보았네.
아름다운 글재주는 동해 건너 드날리어 / 임진왜란 그 큰 죄를 한 붓으로 다스렸네.
이국에서 만난 표민(漂民) 지친처럼 보살피고 / 문필보국 마친 뒤엔 원님 되어 제민했네.
가는 세월 멀어지니 퇴석리가 무릉동(武陵洞)돼/ 아는 사람 없건마는 끼친 향낸 피고 피네
4322년(1989) 7월, 후학 희당 최강현이 가사체로 짓고 모산 심재완 쓴 것으로 돼 비석은 꽤 정성을 기울여 세운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아무리 정성을 기울인들 후세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쳐 버리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일반인들과 자라나는 한글 세대들이 알아 볼 수 있게 꼭 돌비가 아니더라도 녹슬지 않는 재질로 한글 해설판 하나 세웠으면 좋겠구나 싶다. 강둑 아래로 좀 여유 있는 작은 비석공원을 하나 만들었으면 더욱 좋겠고 말이다.
가사는 어떤 노래인가?
먼저 간략하게나마 가사(歌辭)의 특징과 형식에 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일동장유가는 가사이고 그 중에서도 기행가사이기 때문이다.
잘 알려 진 대로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시가는 고구려 2대 유리왕이 지었다는 황조가이다. 그 이후 신라시대에 한창 번성했던 서동요, 처용가 등 향가 25수가 있고, 고려시대의 귀족사회 가요인 경기체가, 청산별곡 가시리 등 서민사회의 고려가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사는 고려 말엽에 발생했다고 보는 게 정설인데, 지난 번 여주기행에서 잠깐 살펴보았던 신륵사를 사랑한 승려 나옹화상이 지었다는 서왕가(西往歌)를 가사의 효시로 쳐 가는 추세다. 종래에 첫 작품으로 보았던 조선 성종 때 정극인의 상춘곡(賞春曲)은 너무 완벽한 형식을 갖췄기 때문이다.
이렇게 발생하여 시조와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노래가 된 가사는, 정철의 관동별곡, 성산별곡 등으로 번창하다가 근세에 와서는 계몽사상을 담은 개화가사로 전승되기도 했다.
가사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지만 간단히 특성을 말하라면, 형식은 운문이면서 내용은 수필인 이중구조의 문학 형태이다. 운문과 산문이 엄격히 구분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굳이 두 가지로 분류한다면,
시가 즉 운문으로 볼 수 있는 가사로는 상춘곡(정극인), 성산별곡(정철), 노계가(박인로), 어부사(이현보) 등이 있으며,
수필 즉 산문으로 볼 수 있는 가사로는 관동별곡(정철), 오륜가(정철), 일동장유가(김인겸), 농가월영가(정학유) 등이 있다.
가사의 구체적 형식은 3.4조 내지 4.4조의 구절(율각)이 짝을 이루어 거의 무한정 길어지게 되는데, 일동장유가의 경우 8200여구(모산 심재완 박사의 교합본)에 해당하는 매우 방대한 국문 필사본의 장편 기행수필인 것이다.
우리는 일동장유가를 통해서 약 250여 년 전 조선 외교사절단의 규모와 노정, 그리고 양국의 외교 방법, 일본의 풍속 등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가의 예리한 관찰력과 비판의식을 통해 임란 이후 일본에 대한 가셔지지 않은 감정에서 오는 지식인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장편기행가사 곳곳에는 수필적 요소에 해당하는 산문적 기술뿐만 아니라, 시로 보아도 하등의 결함이 없을, 퇴석 개인의 풍부한 시정(詩情)이 넘쳐나는 구절들이 많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동장유가 첫머리에
퇴석(1707~1772)은 46세(영조 29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56세에는 계미통신사행의 삼방서기(三房書記)로 임명되며, 왕을 배알하여 어전에서 시를 지어 영조의 큰 칭찬을 받고는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엘 다녀오게 된다. 일정을 보면 공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왔다가 8월 3일에 출발, 양재역을 거쳐 용인-충주-문경-예천-안동-영천-경주-울산-동래- 부산에 도착한다. 9월 25일에 배를 타고 떠나 여러 곳을 거쳐 약 10일 만에 대마도에 도착하기까지가 1책의 내용이며, 2. 3. 4책은 일본에서의 기행이다. 요약하자면, 출발부터 다시 서울에 도착하여 복명하기까지 왕복 11개월에 걸친 여행기가 일동장유가이다.
1763년 출발하는 날의 기록을 보자.(註는 필자)
평생에 소활(疎闊)하여 / 공명(功名)에 뜻이 없네.
진사청명(進士淸名) 족하거니 / 대과(大科)하여 무엇하리.
장중제구(場中諸具) 다 없애고 / 유산행장(遊山行裝) 차려내어
팔도로 두루 놀아 / 명산대천(名山大川) 다 본 연후에
풍우를 희롱하고 / 금호(錦湖)에 누웠더니
북창에 잠을 깨어 / 세상 기별 들어 보니
‘관백(關白)이 죽다’ 하고 / 통신사 청한다네.
* 소활(疎闊) ; 성격이 엉성하고 짜임새가 없음.
* 장중제구(場中諸具) ; 대과를 보기 위한 제반 도구
* 금호(錦湖); 금강을 지칭하나 여기서는 공주를 가리킴.
* 관백(關白) ; 일본의 총리급 요직인 덕천가중(德川家重)을 말함.
퇴석은 느지감치 진사시에 급제했으나 대과의 과정에 부정이 횡횡함을 알고는 벼슬길을 단념할 정도로 의기가 원래 강고한 사람이다. 통신사의 일행 중 가장 나이 많고 비교적 직급이 낮은 삼방서기(三房書記)였지만 부당한 일을 당해서는 결코 상관 앞에서도 물러섬이 없었다.
출발하기 전 어느 날, 정사(正使)가 탈 배의 책임자인 상방선장(上房船長)이 정사의 권위를 믿고 부사(副使)의 서기인 문사를 욕보인 뒤에 사과하지 않아 시비가 일어나자, 선장의 오만불손한 태도의 부당함과 문사의 위신 확립을 정사에게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한 예로 보아, 그는 굽힘 없는 선비 정신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가사 내용은 생략함)
강개지사(慷慨之士) 김인겸
부산의 영가대(永嘉臺)에 올라서는 치욕의 임란을 회상하고 있다.
슬프다 임진년에 이같이 좋은 자리
충무공 이장군이 지키어 방비터면,
왜병이 강타한들 제 어이 등륙하리(중략)
간신이 오국하여 강화는 무슨 일고?
부끄럽고 분한 길을 열한 번째 하는구나
한 하늘 못 일 원수 잊고 가게 되니
장부의 노한 터럭, 관을 질러 일어선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160여 년이 지났지만, 우리 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참혹했던 이민족 침략 전쟁을 치르고 난 후 뼈저리게 각성하게 된, 일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이 충무공이 아니었다면 과연 이 나라가 어찌 되었을까 하는 경각심과 추모의 정이 넘쳐 난다. 또한 일본은 한 하늘 아래 같이 살지 못할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라는 투철한 애국심이 여과 없이 분출되고 있다.
1764년 1월 대판(大坂)에서는,
식전부터 왜놈들이 무수히 와서
필담이 난감하고 수창(酬唱)도 지질하다.
병들어 어려우나 나라에서 보낸 뜻이
이 놈들을 제어하여 빛 있게 하심이라.
병이 비록 중할진들 어이 아니 지어 주리.
* 수창(酬唱) : 시가를 불러 서로 주고 받음.
다소 균형감이 부족한 감정적 표현이긴 하나, 역시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과 함께 그들의 문화에 대해 경멸을 금치 못하고 있으며, 그들의 과거 만행에 대하여 비분강개하는 강직한조선 선비의 모습이다.
그의 배일의식이 강하게 표현된 구절을 하나 더 보기로 하자. 경도(京都)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산형이 웅장하고 수세도 환포하여
옥야 천 리 생겼으니, 아깝고 애달플손
이리 좋은 천부 금탕 왜놈의 기물되어
칭제 칭황하고, 전자 전손하니,
개돝 같은 비린 유(類)를 다 몽땅 소탕하고,
사천 리 육십 주를 조선 땅 만들어서
왕화(王化)에 목욕 감겨 예의국 만들고파(하략)
일본인들을 개와 돼지로 표현하고 그들의 산천을 모두 빼앗아 조선의 땅을 만들고는, 그곳에 사는 주민들을 예의국민으로 만들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고 있다.
통신사 수행원으로서는 다소 부적절하고 과격한 표현이겠으나, 그로서는 오래도록 쌓여 온 참담한 심경을 이렇게라도 쏟아내지 않고서는 도무지 참아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역사상의 항일 지사들
신라시대,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눌지왕의 아우 미사흔을 구해내고 자신은 잡혀 갖은 악형을 받으면서도 “신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진 않겠다“며 그들의 회유에 응하지 않고 장렬한 죽음을 택한 충신 박제상이 떠오른다.
퇴석이 떠난 지 120여 년이 지난 1890년대 일본은 과거 임란으로 폐허를 만들었던 조선에 또다시 마수를 뻗친다. 임란이 끝난 지 400여 년 만에 다시 침략의 악령이 되살아날 줄을 백의겨레는 정녕 몰랐단 말인가?
여기서 잠깐 붓의 방향을 바꾸어 ‘사색의향기 속 문학의 향기방’으로 들어간다. 때마침 거기 수필가 유민자님이 최근에 쓴 <누가 나를 부를까>가 눈에 띄었다. 구한말의 역사서 매천야록(梅泉野錄)을 쓴 시인으로서, 충절의 선비였던 황현(1855~1910) 선생의 절명시(絶命詩) 얘기이다.
매천 황현 선생 시비
“앎의 욕구를 키우는 좋은 자리를 서성이면, 역사속의 조상의 얼이 가슴을 파고듭니다. 지식인의 눈으로 바라본 개화와 망국의 역사, 황현의 <매천야록>을 읽습니다. 갑오년 1894년 고종 "운현궁 왕기가 서리더니 임금이 태어나다" 부터 경술년 1910년 순종, "군청에서 합방령이 반포되자 그날 밤 아편을 먹고 이튿날 운명했다. 시 네 수를 남겼다."까지 조근조근 소리 없이 읽습니다. 매천이 순절한 대월헌(待月軒)에 앉습니다. ‘달을 기다리는 집’이라는 그의 서재에서 돌비석에 아롱진 세 번째 연을 읊조립니다.
새와 짐승도 슬프게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의 온 세상이 이제는 쓰러져 가노라.
가을 등불 아래에서 책을 덮고 지난날을 생각하니
인간세상에서 글을 아는 사람의 노릇이 참으로 어렵기만 하구나!
鳥獸哀鳴海岳嚬 (조수애명해악빈)
槿花世界已沈淪 (근화세계이침륜)
秋燈掩卷懷千古 (추등엄권회천고)
難作人間識字人 (난작인간식자인)
- 절명시(絶命詩) 부분 3수/ 황현 -
화사한 생명력으로 차오르는 산과 강. 그 강산이 찡그려지고 온 세상이 쓰려져가는 어두운 앞날을 나타낸 절명시가 처절함으로 통곡하는 듯 우리네 앞에 섭니다. 귓가를 어른대며 사각거리는 봄소리가 황현의 비탄에 젖은 심장소리로 뒤바꾸어 그의 절명시가 되어 가슴을 타고 줄줄 흐릅니다. 조선왕조가 명운을 다한 날. 우리들의 모든 통치권을 합법으로 가장한, 경술국치일로 시간을 돌립니다.
저 멀리, 고독한 그가 가물거립니다. 그 시대의 황현은 한 개인의 죽음이었을까요? 그는 아들의 죽음을 보며 울부짖던 한 어머니의 장남이기도 했고, 한 아내의 지아비이기도 했고 자식을 둔 아버지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지켜낸 것은 개인 욕심을 선뜻 버린 채 민중의 가슴을 흔들어내려는 민족정신이기도 하고, 고향 사람들의 가슴에 높이 매어 달 저항정신입니다. 그의 용기가 이루어 낸 자결은, 영혼의 부활입니다.“
항일지사의 강고한 모습이 어찌 이뿐이겠는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면암 최익현이 있고 피 흘리며 죽어 간 숱한 의병들이 있고 윤동주, 이육사, 한용운 그 밖에도 이름 없이 충혼을 바친 항일투사들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국서(國書) 전달식에 불참한 퇴석
그가 동경에 이르러서는 결국 일본 국왕에게 바치는 국서(國書) 전달식에 참석하지 않고, 혼자 숙소에 남아서 이렇게 가사로써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혼자서 생각하니, 이 몸이 선빈지라
부질없이 들어가서, 관백에게 사배하기
욕되기 가이 없어, 아니 가고 누웠으니
사상이 하오시되, 예까지 와 있으니
한 가지로 들어가서, 굿 보고 오는 것이
해롭지 아니하니, 있지 말고 가쟈 커늘
내 웃고 하온 말이, 국서 뫼신 사신네는
부끄럽고 통분하나, 왕명을 전하오니
하릴없어 가려니와, 글만 짓는 이 선비는
굿 보려고 들어가서, 개돝 같은 왜놈에게
배례하기 토심(吐心)되니, 아무래도 못 갈로다.
* 토심(吐心) : 좋지 않은 느낌으로 남을 대할 때, 상대편이 느끼는 불쾌한 마음.
퇴석 자신은 도무지 불편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고, 그로 인해 상대편이 토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나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했다. 얼어 죽는 한이 있어도 겻불은 쬐지 않겠다던 조선 선비-남산 딸깍발이의 굽힘 없는 기개를 그저 깐깐한 고집이라고만 제쳐 놓을 수 있겠는가?
퇴석의 인정미와 해학
일본으로 떠나기 전 부산의 해운대에서 어부들이 생복 따는 광경을 보고는,
삼십 명 포잠한(鮑潛漢)이 일시에 옷을 벗고
허리에 망태 차고 노 끝에 뒤웅 매어
억만 장 풍도 중에 거꾸로 뛰어 들어
땅으로 머리 가고 하늘로 발이 가게
헤엄하여 가는 상이 개구리 모양이다
호흡을 두루고서 또 다시 들어가니,
인인 군자 보게 되면 생복을 먹을소냐?
* 포잠한(鮑潛漢); 물질로 고기를 잡는 사내. 당시엔 해녀만이 아니라 해남도 있었음을 알게 해 주는 표현이다.
서민들의 애환을 놓치지 않고 노래에 담았으되 연민의 정이 가득하다. 이 외에도 대마도에서는 고구마를 처음 먹어 보고 ‘이 씨를 얻어다가 아국에 심어 두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흉년에 먹게 했으면 좋겠다’ 하고 씨 얻을 궁리를 한다. 이런 사례는 가사 곳곳에 발견되지만 지면상 생략하기로 한다.
서울을 출발하여 예천에 당도했을 때에 일어났던 일이다. 다소 긴 내용이지만 사건 전개가 속도감 있고 기발한 해학성이 숨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종사상의 병방군관 색중의 아귀로서
서울서 떠나면서 여러 역참에서
행수 호장 명령하여 고운 차모 추심하며
오히려 나삐 여겨 내게 와 간청하되,
예천은 색향이라 날 위하여 먼저 가서
일등 미인 뽑아내어두었다가 나를 주오.
들으매 짓이 미워 한 번을 속여 보세.
헛 대답 쾌히 하고 정중히 상약하여
동정자 지나와서 예천 읍내 들이달아
뭇 기생 불러 세고 그 중에 말째 기생
늙고 얽고 박박색을 고르고 골라내어
이방에게 분부하고 병방차모(兵房茶母) 정한 후에
외막에 앉았더니 전배로 먼저 와서
상방에 잠깐 뵙고 내게로 급히 와서
웃으며 이른 말이, 청한 말 어찌된고?
거동이 절도하되, 웃음을 겨오 참고
은근히 대답하되, 동행의 그만 청을
내 어찌 허루하리, 이 중의 제일색을
가까스로 뒤져 내어 그대 차모 정하였네.
하처로 어서 가서 불러 보면 아니 알까?
서시 옥진 절대 색도 예서는 못 나으리.
오늘 밤 합친하고 내 덕으로 아오소서.
들으매 웃는 입이 함박귀만 하는구나.(중략)
이윽고 현신하니, 저 차모 모양 보소.
쑥 같은 짧은 머리, 실로 땋아 마주 매고
눈꼽 끼인 오른 눈을 희부시시 겨우 뜨고
옻 초롱 같은 낯이 멍석처럼 얽었구나.
무명 반물 뒤롱다리 귀까지 담뿍 쓰고
헌 저고리 짧은 치마, 현순백결(懸鶉百結)하였구나.
동구 안 삼월이는 예 비하면 일색이라.
* 현순백결(懸鶉百結): 꼬리 짧은 메추라기처럼 볼품 없고 누더기를 걸친 모습.
조선조에서 관비였던 차모의 불쌍한 처지는, 의협심 많고 인정미 가득한 퇴석에게 측은하기 짝이 없는 대상이었으리라. 서울에 있던 관청의 총칭인 경각사(京各司)에 딸린 관비 여인들이 얼마만큼이나 인권사각지대에 있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나이 지긋한 선비로서 꽤나 권세 있는 병방군관을 골탕 먹이는 익살스러움과 해학을 접하면서는 파안대소와 함께 당시의 어두운 사회상에 쓴웃음을 금할 수 없다.
경주 기생의 탈출을 돕는 일에도 앞장을 선다. 통신사 일행이 부산에 당도하여 출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경주의 한 기생이 정인 이비장(李裨將)을 찾아서 홀로 200리 길을 밤낮으로 달려 부산으로 왔다 한다. 이 사실을 안 경주백(慶州伯)은 추노군(追奴軍)을 풀어 그 기생을 잡아 오라 명하였다. 그러자 관기의 정인 이비장은 퇴석에게 그 기생의 구출을 호소하게 된 것인데, 인겸은 쾌히 승낙하고 나선다.
“이 기생은 정인을 향한 절개가 하늘과 땅을 감동시킬 만하고 그 행동이 용기 있고[豪俠] 가상하니, 이리도 좋은 풍류사를 성취하게 하소서.”하고 요로에 부탁하여 마침내는 아무 일 없이 무마시켜 이비장과 그 기생이 너무 좋아서 기뻐 뛰게[작약(雀躍)] 하였다 한다.
이 얼마나 훈훈한 정감 넘치는 이야기인가?
그 밖에도 친구의 애첩이 낳은 딸이 관비가 되어 고생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기행 중에 의흥에 들러 일부러 모녀를 찾아보고, 끝내 그녀를 관비에서 해방시켜 주는 일까지 한다.
일본에서도 따뜻한 인간미를 바탕으로 뛰어난 관찰력과 거침없는 필세는 계속된다.
퇴석의 눈에 비친 일본
대마도 근처에서 모진 풍랑을 만나 일행의 선박이 서로 헤어졌다가 겨우 어떤 섬의 포구에 모이게 되었다. 그곳에는 당진의 어부 남녀노소 11명이 3월 초에 출어했다가 풍랑 속에 표류하기를 한 달, 4월 1일에 사신 일행이 유숙한 곳에 도착했다. 사신 일행은 곧 에도 정부에 연락하여 귀국하도록 절차를 밟고 표류민에게 식량을 공급하였다. 퇴석도 이들을 친히 불러 위로하였다.
나도 불러다가 쌀 어물 많이 주니
감격하고 기뻐하여 부모 본 듯 반겨한다.
한 나라 사람으로 이국에 와 만나 보니
반갑고 귀하기가 어이 아니 그리하랴.
일본인에 대해서는 증오와 경시로만 일관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긍정적인 면, 아름다움을을 발견하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기도(壹岐島)에서 사신 일행을 봉행하는 왜인 하나가 전복을 일절 입에 안 대기에 인겸이 그 연유를 물었다. 왜인이 말하기를, 자기의 부친이 풍랑을 만나 배가 대파되어 물이 새어 들어오는데, 마침 커다란 전복 하나가 그 구멍을 막아 화를 면하게 되었다 한다. 그 후 부친은 생명의 은인인 전복은 먹지 말라고 유언했다는 것이다.
들으매 기이하다 비록 몹쓸 왜놈이나
아비 유언 지키는 듯 인심(人心)이 있다 할까
다음은 파마주(播磨州) 실진(室津) 인근의 야경을 기록한 글이다.
파루에 올라 앉아 사면으로 바라보니
풍청낭정(風淸浪靜)하고 수천(水天)이 일색이다.
이윽하야 달이 뜨니 장함도 장할시고
홍운이 지피는 듯 바다가 높나는 듯
크고 둥근 백옥 바퀴 그 사이로 솟아난다.
찬란한 금기둥이 만리에 뻗쳐 있다.
아국에 비하면은 배히나 더하노라
부상(扶桑)이 가깝기에 그렇다 하난고야.
낮은 뫼 작은 들이 흰 보로 친 것같이
건곤이 조요하야 호말을 헤리로다.
천하의 장한 기경(奇景) 이에서 또 없으니
사나히 장한 줄을 오늘이야 알리로다.
성산별곡, 관동별곡 등에서 받은 영향이 군데군데 보이긴 하나, 이런 대목의 묘사는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아름다운 자연과 좋은 풍속에 대해서는 편견과 주관을 버리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일본인들의 풍속과 환경
왜인에 대한 묘사는 비교적 자세한데 왜인 남자와 여자를 관찰한 내용을 보자.
굿 보는 왜인들이 뫼에 앉아 구경한다.
그 중에 사나이는 머리칼을 깎았으되
꼭 뒤에만 조금 남겨 고초 상투 하였으며
발 벗고 바지 벗고 칼 하나씩 찼으며
왜녀의 치장들은 머리는 아니 깎고
밀기름 잔뜩 발라 뒤흐로 잡아 매어
족도리 모양으로 둥글게 꾸며 있고
그 끝은 휘어다가 비녀를 꽂았으며
의복은 보아 하니 무늬 없는 두루막에
한 종단 좁은 소매 남녀 없이 한 가지요,
넓고 크게 접은 띠를 느즉이 둘러 띠고
일용 습물 온갖 것을 가슴 속에 다 품었다.
조그만 상투에 칼을 찬 왜인 무사들의 모습이 역연하고, 큰 머리에 기모노를 입은 왜녀들의 모습도 눈앞에 떠올려지도록 실감 있게 표현했다.
남편 있는 겨집들은 까맣게 이에 칠하고 뒤흐로 띠를 매고
과부 처녀 간난이는 앞으로 띠를 매고 이에 칠 아녔고나.
유부녀와 그 밖의 여인들을 구분하기 위한 일본 특유의 풍습을 보았는가 하면, 일본 여인들이 바지를 입지 않고 소변을 서서 보는 기이한 풍속까지 기록하고 있다.
속바지 아니 입었기에 서서 오줌 누게 되면
그녀의 사내 종이 명주수건 가졌다가
손으로 씻겨 주니 들을수록 희안하다
또 형이 죽으면 형수와 같이 살아 착하다는 칭찬을 받지만, 제수는 그렇지 못하다는 풍속도 소개하고 있다.
제 형이 죽게 되면 형수를 겨집 삼고
데리고 살게 되면 착하다고 기리지만
제 아우 길렀다고 제수는 못한다네
예법이 없어 금수와 다를 바 없구나
조선의 한류(韓流) 스타가 된 퇴석
당시 왜인들은 조선 관리들의 시(詩)를 얻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지필묵을 가지고 와서 공손히 인사를 하고 글을 받은 다음에는 약간의 선물을 주고 가는데, 퇴석은 일절 선물을 받지 않았다. 간혹 언사가 불손하면 의연히 거절하고 만다.
우리를 보려 하고 이삼 천 리 밖의 놈이
양식 싸고 여기 와서 대엿 달씩 묵었으니
만일 아니 지어 주면 낙망하기 어이할꼬
물론 노소 귀천하고 다물속 지어 주니
이것은 에도에 입성하기 전에 무수한 왜인들이 몰려 와서 글을 받아 가는 정경을 그린 것이다. 어떤 때는 미처 글을 못 써서 여러 사람에게 한 장을 써 주면 서로 가지려고 싸우기 일쑤다. 나중에 귀국하여 왕에게 복명하는 자리에서, 수천 장을 써 주었다는 기록이 나오는 걸 보면, 요즘 부쩍 융성하는 한류가 이미 조선 시대에 시작된 게 아닌가 하고 생각이 들 정도이다. 가히 작시외교(作詩外交)의 생생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남자들은 조선 선비들의 글솜씨에 흠뻑 매료되어 고한류(古韓流)를 이루었는데, 그렇다면 일본의 여성들은 어떠하였을까? 물론 어느 나라에나 거리의 여인들이 있게 마련이고 일본 여인 대다수에게 보편화할 수는 없는 게 당연하기에 독자의 이해를 전제로 잠깐 소개하기로 한다.
일기도(壹岐島)에서 축전(筑前)으로 가는 도중, 모처에 배를 대고 있는 중, 부둣가에 많은 왜녀들이 나와서 통신사 일행을 유혹하는데, 어떤 여자는 “오늘 우리 집에 와서 나와 함께 자고 가소.”하고 소매를 잡아끄는 등, 매우 저돌적으로(?) 조선의 순진한 선비들을 욕심냈던 모양이다.
젖 내어 가리키며 고개 조아려 오라 하고
볼기 내어 두드리며 손 저어 웃음 짓고
치마 들고 아래 보며 부르기도 하더라.
이 정도로 노골적인 유객 행위가 있었던 모양이다. 퇴석은 이를 보고 심히 개탄했다.
염치도 바이없고 풍속도 음란하구나.
통신사의 전모를 밝히다
우리 역사상 외국에 보냈던 사신은 잘 알려진 대로 일본에 한학을 전한 아직기와 왕인을 비롯해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무수히 많다. 그러나 통신사란 명칭은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사절단에 국한된다. 일본에서는 조선내빙사(朝鮮來聘使) 또는 빙례사(聘禮使) 했고 조선에서도 사안에 따라 회례사(回禮使) 또는 회답사(回答使)로 부르기도 했다.
1590년 당시 일본을 제패한 도요데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끈질긴 요청으로 황윤길과 김성일이 통신사로 갔다가, 각기 자신들의 당파를 대변하는 상반된 보고로 임란의 화를 자초하는 데 일조했던 일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보내는 인원은 적을 때는 100여 명, 많을 때는 500여 명이었는데, 이때는 526명이라는 가장 많은 사람을 보냈으며, 이들을 보내기 위해 10만 냥의 돈을 들여 모두 6척의 배를 건조하고 있다. 통신사 총 비용은 약 100만 냥이나 되었다 하니 양국의 자존심 싸움이었을까? 문화 교류의 호사로운 장터였을까? 드디어 양국은 조선 말기에 와서 이 막대한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규모를 축소하기로 합의하게 된다.
통신사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 주는 여러 대목이 있지만 지면상 생략하기로 한다. 단지 여기서는 국서를 봉정하는 곳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제술관(製述官) 남옥에게서 들은, 일본의 구중심처인 관백궁에서 국서를 바치는 장면 묘사로서 일동장유가에 대한 탐사를 마칠까 한다.
각방(各房)에 노자(奴子) 들고 호사가 찬란하다.
좌우에 쌍견마요 한 놈은 우산 받고
한 놈은 등을 들고 한 놈은 그릇 메어
한 사람이 거느린 수 여덟씩 들었구나.
나하고 삼문사(三文士)는 가마 타고 먼저 간다.
< 중 략 >
오던 길로 가서 다섯 정문 지나
다리 넷과 성문 셋을 차례로 지나서
관백궁 다다르니 제1문 다리 우에
하마비 세웠기에 상관들 하마하고
군물 고취 머무르고 담뱃대도 금하는고
제2문 제3문에 가마 탄 이 다 내리니
제4문 제5문에 사상(使上)네 하교(下轎)하네.
< 중 략 >
앉았다가 도로 나와 국서를 뫼시고서
들어가 사배하고 사례단 들이고서
또 배례하온 후에 관백전에 또 절하고
하직할 제 또 절하니 전후에 네사밸세
당당한 천승국(千乘國)의 예물예단 가져와서
개톹 같은 족류에 사배하기 어이할꼬.
선비의 자존심은 여전하다.
퇴석 김인겸은 지조 곧은 조선의 선비로서 통신사의 서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도 임란의 막심한 피해로 인한 오래 묵은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양국의 당시 정치 사회 제도, 풍습과 문화, 민담이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비교 관찰하고 비판했다.
그의 따뜻한 인간미에 대하여는 가슴 훈훈한 감동을, 국가와 민족을 위한 굳은 지조와 지사적 면모 그리고 뛰어난 통찰력에 대해서는 존경의 염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독도 문제, 식민 문화 청산 문제, 정신대 문제 등 오늘의 일본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에도, 매우 의미심장한 가르침이 되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울려오는 듯하다.
우금티[于金峙]에 타오르는 영원한 불꽃
우금티전적지에 있는 동학혁명위령탑
철마산(345m)을 배경으로 공주시 금학동, 공주시청과 국립공주교육대학의 뒤쪽에 자리 잡고 있는 우금티는 동학농민혁명의 최후 격전지로서, 현대 저항시인 신동엽이 심혈을 기울여 쓴 장편 서사시 <금강>의 주요 무대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동학농민혁명의 간략한 전개 과정과 신동엽의 시에 나타난 동학의 모습을 중심으로 그의 시의식을 살펴보기로 한다.
동학농민혁명이 1860년(철종11년)에 유학자 최제우에 의해 창도된 신흥종교인 동학을 정신적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당시 어린 헌종의 즉위로 인한 외척의 세도 정치와 혼란, 그리고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간섭, 유교와 불교의 부패로 인한 상실감, 서학의 전래로 인한 신구사상 관습의 갈등과 충돌 등 매우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한 동학농민혁명은 맹렬한 기세로 확산된다. 하지만 곧 사교(邪敎)로 지목 받으면서 초대 교주 최제우와 2대 교주 최시형 등 신자 수십 명이 처형당함으로써 지하로 숨어들어 교세를 확장한다.
잘 알려진 대로 급기야는 1894년 전라남도 고부군의 탐관오리 조병갑의 수탈에 견디지 못한 고부 접주 전봉준이 동학농민군의 첫 횃불을 들게 되는 것이다.
동학군은 황토현의 대승 등 기세를 몰아 전라남북도를 중심으로 거의 전국에 걸쳐 세를 크게 떨쳤으나, 관군의 재정비,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참전 등으로 점차 수세에 몰리게 되며, 동학군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면서 같은 해 10월 21일, 전봉준의 호남 10만군과 손병희의 호서 10만군이 공주군 우금티를 향해 집결해 왔다. 그러나 이미 관군과 일본군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민족과 동족의 신식 무기 앞에서 죽창, 괭이, 삽자루들은 힘없이 무너져 갔다. 몇 번의 승리가 있었지만, 결국은 일방적인 참혹한 살육일 뿐이었으니, 어찌 눈 뜨고 볼 일이며 통탄치 않을 수 있겠는가?
갑오년 봄에서 다음 해 봄까지 전국에서 50만 명이 봉기했으며, 이 중 10만 명이 죽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집을 잃었다.
신동엽은 <금강> 제20장 뒤쪽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금티에서 / 동학군은 고군분투했다.
상봉 능선에 / 일렬로 배치 / 불을 뿜는
왜군 제 5사단의 / 최신식 화력
야전포 / 기관총 / 연발 소총 / 수류탄
꽃이 지듯 / 밑 없는 어둠으로
수백 명씩 / 만세를 부르며
흰 옷자락 나부껴 / 수천 명씩
차례차례 / 뛰었다.
< 중 략 >
지글거리는 / 역사의 밭이여
불꽃 튀기는 / 피의 잔치여
내가 왔노라 / 이제야 왔노라
뼈를 남기고 / 승천하는 / 승리여
내 여기서 / 불타며 승리했노라.
만세 / 만세를 불렀노라
노래했노라 / 우리의 형제들은
다음 날의 / 백화(百花) 요란한
하늘 밭 위해 / 우리의 목숨을
거름밭에 던졌노라
용감히 노래하며 / 던졌노라.
알맹이를 발라서 / 던졌노라
그 후 우리들의 조국은 엄청난 혼란과 격동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그렇게 세월은 지금 이 순간에도 흐르고 있고, 우금티의 아픔마저도 망각 속으로 떠내려간다. 그렇지만 우금티를 비롯해 우리의 땅 구석구석 그들이 흘린 핏자국이 모두 지워졌다고 할 것인가? 저 풀잎과 새소리와 나무와 바람소리로 남아서 자유의 고귀함을 깨우쳐 주고 있을 것이다.
<금강> 제 9장에서 신동엽의 외침을 듣는 것으로 우금티를 떠나려 한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고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 속 구름
아침 저녁
네 마음 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 중 략 >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는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닫혀 있던 당시의 시대 현실을 치열한 의식으로 열고자 온몸으로 부딪쳤던 우리 시대의 민중시인 신동엽은 <금강>외에도 <껍데기는 가라> <산에 언덕에> <진이의 체온> 등 주옥 같은 시들을 남기고, 1969년 40세 되던 해에 간암으로 짧은 일생을 마감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공주 문학기행은 황새바위천주교순교지와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고분군을 거쳐 박동진판소리전수관에까지 이를 것이므로, 참으로 보배롭고 알찬 기행이 될 것이 분명하다. 지면과 시간이 발목을 잡으니 필자의 걸음은 예서 멈출 수밖에 없어 아쉽다. 하지만 문화해설사들의 친절하고 아리따운 목소리가 곳곳마다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출발 날짜를 손꼽아 기다릴 뿐이다.
[참고]
* 황새바위천주교순교지
황새바위천주교성지 입구
황새바위천주교성지 전경
천주교 박해가 극심했던 1800년대 즉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했던 조선조 시대에 충청도의 각 지방에서 잡힌 서학죄인들이 숱한 고문에도 배교하지 않았을 때 충청도의 감영이 있던 공주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다시 배교를 강요당한 후 그래도 배반하지 않으면 감사의 명에 의해 사형대에 오르게 되어 있었다. 죄인들의 공개 처형지였던 이곳 황새바위는 황새가 서식했던 곳이기에 황새바위라고도 하고 이곳에 있던 바위가 죄수들의 목에 씌우는 칼이 황새 모양으로 생겼고, 목에 큰 칼을 쓴 죄인들이 이 언덕바위 앞으로 끌려 나와 죽어 갔으므로 황새바위라고도 한다.
* 송산리 고분군 - 무령왕릉
송산리고분군모형관 입구
고분벽화 재현본
충남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백제 웅진도읍기에 재위하였던 왕과 왕족들의 무덤으로 무령왕릉을 포함한 7기의 무덤이 모여있는 곳이다.
백제가 문주왕(475~477), 삼근왕(477~478), 동성왕(479~501), 무령왕(501~523), 성왕(523~554)까지 64년간 도읍지로 삼았던 곳인 웅진(지금의 공주)에 조성된 왕과 왕족의 무덤으로 해발고도 130m의 송산(宋山) 남쪽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다. 송산 서쪽으로 금강이 굽이쳐 흐르고 동쪽으로는 공산성이 보인다. 송산리 고분군에는 벽돌무덤과 할석 ·괴석으로 만든 돌방무덤 2가지 유형이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왕릉의 분포를 보면 계곡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6호분, 동쪽에는 1~4호분이 있다. 1~5호분은 궁륭으로 된 천장식 돌방무덤인데, 1~4호분은 백제가 공주로 천도한 직후부터 6세기 초반에 출토된 것으로 보인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터널형 천장의 벽돌무덤으로서 백제시대의 벽돌무덤으로는 이 두 개만이 남아 있다. 6호분은 벽 네 면의 일부에 사신도를 그려넣은 벽화고분으로서 긴 배수구가 널길을 향해 밖으로 뻗고 있으며, 벽돌의 무늬와 축조방법상 무령왕릉보다 조금 앞선 6세기 초의 무덤으로 보인다. 6호분의 배수로가 5호분의 널방[玄室] 아랫부분을 지나고, 무령왕릉의 배수로 상면에 5호분의 봉토 일부가 걸리는 점으로 보아 무령왕릉 역시 5호분보다 일찍 축조된 것으로 추측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