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삼 시인과 사천
글/사진 김경식
유년시절의 가난한 상처를 아름다운 시어로 승화시킨 사람이 있다.
가난의 서러움과 원망 대신에 인간의 내면과 자연의 섭리를 마음에 그리는 서정시를 쓰면서 평생을 살았다.
지독했던 가난과 외로운 시절의 한을 추억으로 바꾸며, 병마와 싸우면서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시적인 언어들은 희망의 시가 되어 고단한 삶과 절망한 사람들에게 위안이다.
그는 누구인가. 박재삼 (1933~1997)시인이다.
삶은 비록 가난하고 병마와 싸워야 했지만, 일상의 사소함에서 행복을 찾으며, 소박한 행복을 추구하였던 시인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솔직하고 아름답게 풀어내는 그의 문학의 세계는 유년의 한과 눈물이 원천이다.
삼천포는 그의 유년의 가난과 눈물이 어떻게 아름다운 서정적인 시인으로 인도하였는지 탐구할 수 있는 장소다.
삼천포항구
가난한 삶은 이념과 대립과 증오를 키울 수도 있지만, 박재삼 시인은 용서와 화해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우리 언어의 서정성에 정성을 기울였다.
사천시는 예전에 삼천포로 알려진 수도권에서는 먼 곳이다. 바다와 섬, 육지가 함께 어우러진 사천 기행은 우리 국토가 지닌 아름다움의 절정이다.
이곳이 한려수도의 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남해바다의 아름다움과 사천이 간직한 역사의 궤적을 찾아 떠나며, 경남의 지도를 펼친다.
가난과 병마와 싸우면서도 우리 현대시의 아름다운 서정성을 한 단계 발전시키고 떠나간, 박재삼 시인의 삶과 문학의 탐방을 위해 삼천포로 떠난다.
1) 사천(삼천포)의 지리와 역사
서울에서 삼천포는 천리 길이다. 경부고속도로에서 대전과 통영간 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내리 2시간을 달려야 한다. 진주를 지나 사천나들목을 나와 3번 국토를 타고 30분쯤 달리면, 옛 삼천포다.
육지의 끝, 땅끝 마을이다.
“삼천포로 빠진다”라는 말이 자주 사용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 말을 삼천포 사람들은 싫어한다. 사천군과 삼천포시가 통합 될 때, 통합시 이름이 사천시로 결정한 것은 삼천포의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인지 모른다.
어둠속에 사천시에 도착했다. 아니 자정이 지나고 있었다. 숙소도 정해지지 않았다.
토요일밤이 지나고 있었다.
주일 답사 전 예배를 위해 아내는 교회를 찾아야 한다고 숙소보다 예배 처소를 걱정했다.
좀 심한 주장이라고 생각 하다가도 아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간절한 기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야심한 밤에 삼천포의 거리와 골목을 누볐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처음에는 삼천포중앙교회를 예배처소로 정했다가 마지막에 삼천포교회로 결정했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였다. 노산공원 주변은 환락가였다. 삼천포항구가 인접해 있기 때문이다. 밤에 노산공원을 찾기는 힘이 들었다. 노산공원이 가장 인접한 모텔에 숙소를 정하고 답사를 위해 사전 탐색을 하던 밤은 짧았다.
이내 새벽이 왔기 때문이다.
노산공원에서 바라본 삼천포항구 등대
노산공원이 이번 문학기행의 중심지가 되었다. 인근에 박재삼 시인이 살던 집이 있었지만 지금은 김밥집으로 변했다. 작가의 고택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박재삼 시인은 노산공원에 자주 올랐다. 아니 노산공원은 그의 안식처였다. 그런 곳에 그의 문학관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노산공원은 1956년 삼천포가 시로 승격되면서 시내 남쪽 노산에 조성한 공원이다.
산책로를 따라 정상에 오르면 박재삼문학관이 앉아 있다. 바다를 향해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에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위엄을 자랑하며 서 있다. 이곳은 전망이 좋아서 와룡산과 삼천포항, 한려수도의 크고 작은 섬들이 내려다보인다.
사천시는 동쪽으로는 고성군과 서쪽으로는 하동군과 경계를 이룬다. 남쪽으로 남해군, 북쪽으로 진주시에 접한다.
부산과 순천간의 남해고속도로가 관통하여 지나간다. 진주와 삼천포 간의 국도가 사천시의 동부를 남북으로 뻗어 있다. 철도는 경전선이 곤명면을 경유하여 시의 서북부를 스쳐 지난다. 모충공원과 남일대 해수욕장을 연결하는 해안도로가 있어 관광에 용이하다. 사천공항 인근에는 항공산업 단지가 조성되었다.
노산공원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
지형적으로 소백산맥의 작은 지맥이 이곳까지 뻗어 있어 평탄하지 않고, 북쪽과 동쪽은 산지에 둘러싸여 있다. 남쪽은 해안선이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며 곤양만은 사천시를 동부와 서부로 나눈다.
주요 산으로는 와룡산(799m)이 있으며, 구룡산에서 발원한 죽천은 동쪽으로 사천만을 따라 흐른다. 하동군에서 발원한 곤양강은 사천시의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흘러내리다가 서포면의 광포만으로 흘러든다. 이 유역에 평지가 넓은 이유이다.
이 지역의 지질은 대부분 중생대 백악기 경상계 지층이다.
기후는 난대성기후이다. 내륙보다 대체로 온난한 편인데 사천만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사천시의 인구는 2007년 기준으로 11만 명이 조금 넘는다.
노산공원
사천시는 삼한시대 때는 사물국에 속했다. 신라(사물현), 통일신라(사수현), 고려(사주현), 조선(사천현)으로 변천해 오다가 1895년 진주부 사천군이 된다.
1918년 수남면과 문선면을 합하여 일제는 삼천포면을 설치한다. 삼천포면은 1931년 읍으로 승격된다. 1956년 삼천포읍은 남양면과 통합하여 삼천포시로 승격된다.
1956년 삼천포읍이 남양면과 통합하여 삼천포시로 승격하고 사천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95년 5월 삼천포시와 사천군이 합쳐 도농복합형의 통합시가 되면서 사천시로 불려지면서 오늘에 이른다.
사천의 역사는 사천읍성과 사천향교를 탐방하면 그 깊이와 넓이를 이해할 수 있다.
사천읍성
사천읍성과 사천향교는 지척이다. 먼저 사천읍성으로 향한다. 주차장에 승용차를 주차하고 오른쪽 숲길을 따라 오르면 이내 산성입구에 닿는다.
지금의 산성공원 전 지역이 옛 읍성지(邑城址)이다. 사천읍성을 쌓은 시기는 1442년이다.
세종대왕 집권 24년에 병조참판 신인손이 책임자가 되어 성을 쌓았다.
성의 규모는 둘레 약 5000척, 높이 11척이었다.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으나 임진란 때 왜적에게 함락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사천읍성 수월루
1598년 9월 28일경, 정기룡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과 명나라 원군이 연합하여 사천읍성을 탈환한다. 대 혈전으로 명나라의 유격장 노득공(盧得功)이 전사한다. 현재의 산성공원은 옛 읍성의 일부다. 소나무 숲이 아름다운 산성공원은 사천 시민들이 많이 찾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수양루(洙陽樓)와 팔각정에 앉아 생존을 위해 성을 쌓았던 사람들과 왜적과 싸우던 모습을 상상한다.
사천향교는 성전봉(聖殿峯)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사천읍 선인리 119번지다.
향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에 계승된 지방의 학교다. 오늘의 학제에 적용한다면 공립중고등학교에 해당된다.
조선조에는 부(府), 목(牧), 군(郡), 현(縣) 등 고을마다 의무적으로 1곳의 향교를 세웠다.
향교는 고을의 크기에 따라 대설위(大設位), 중설위(中設位), 소설위(小設位) 등의 3등급으로 나누었다. 큰 고을에는 교수와 훈도 각 1명씩, 작은 고을에는 훈도가 교육하였다.
사천향교는 ‘전학후묘형(前學後廟型)’의 소설위 향교였다. 훈도(선생) 1명에 교생은 30명이었다.
사천향교는 1421에 창립되었다. 가장 먼저 향학당(鄕學堂)을 창건하고, 치성재(致誠齋), 동서양재(東西兩齋), 풍화루(風火樓), 명륜당(明倫堂) 등을 지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모두 불이 타버렸다. 1645년 정동면에 있던 옛 향교 터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신축했다.
조선 중기 이후의 향교는 과거의 준비장이 되어간다. 서원(書院)이 지방에 많이 세워 지자점차 쇠퇴한다. 1894년 말에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향교의 역할은 막을 내린다.
다만 문묘를 향사(享祀:제사)할 따름이다. 문묘향사와 건물관리를 위하여 전교(典校:향교의 대표자)가 근무하고 있다.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석전제(釋奠祭)라 하여 문묘제사를 지낸다.
사천향교
사천시 향촌동에 위치한 남일대 해수욕장은 이곳 주민들에게는 명소다. 이곳이 어디 있는지 상세하게 알고 있으며, 이곳을 안내하는 이정표도 많다. 시내 중심가에서 동남쪽으로 2km 거리에 있는 위치한 남일대로 가는 길은 한적했다. 그러나 남일대 해수욕장 입구 길은 좁았다. 피서 철에는 주차난이 심각할 것이다. 길이 700m, 폭500m의 백사장이 반긴다. 백사장을 걸어 왼편으로 돌아서자 기암절벽이다.
햇살이 뜨겁다. 걷기가 쉽지 않다. 1km 동쪽 해안으로 코끼리바위가 보인다. 사천8경중의 한 곳인 남일대는 이 고장의 자랑이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절벽에서 남해를 바라보며 경관이 남해 제일이라 하여 남일대(南一臺)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남일대
삼천포는 남해군과 닿아 있다. 삼천포대교가 연결 시켜준다.
삼천포대교(三千浦大橋)는 남해군의 창선과 연결된 연륙교다. 2006년도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서 대상을 수상하였다. 건설교통부와 한국도로교통협회에서 주최하였기 때문에 권위가 있는 상이다.
이 다리를 건너며 보이는 한려해상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삼천포가 한려수도의 중심도시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야간의 다리 조명과 어울리는 바다는 서로 조화를 이루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삼천포대교
사천에는 미륵보살을 기다렸던 조상들의 염원이 서려 있는 곳이 있다.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 산 48번지에 있는 매향비이다. 1387년에 세운 것이니 고려 말 우왕때다. 당시 남해바다에는 왜구가 출몰해 약탈이 심하여 평화로운 삶이 보장되어 주지 않았다. 향나무를 묻고 그 위에 비를 세워 두는 매향비는 전국에 몇 군데 있다.
이곳은 당시 불교신자들이 향계를 조직하고 ‘나라가 태평하기를 미륵보살에게 기원“하는 204자의 글을 비문에 새겨 놓아 오늘에 전한다.
향나무를 땅에 묻어 미륵보살을 공양하던 옛 사람들의 이런 행위는 현실적인 고난의 시기에 사는 것보다 내세에 왕생(往生)하고자 하는 종교의식에 해당할 것이다.
향은 불태워서 하늘의 신을 모셔오는 것으로만 알고 있지, 향을 묻어 다시 올 세상을 향한 민중들의 염원을 강구한 것은 700년 전에 살았던 이 고장 사람들의 삶의 기원에 감동의 파도가 밀려온다.
2) 박재삼 시인의 삶과 문학
가) 박재삼의 삶
박재삼(朴在森,1933~1997)시인은 일본 동경에서 태어났다.
삼천포국민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중학교 입학을 하지 못한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삼천포여자중학교 사환으로 근무하면서 야간중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삼천포여자중학교 교사이던 시조시인 김상옥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시를 쓰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이다. 삼천포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한다.
1953년 ‘문예’에 시조 <강가에서>를 추천받은 이후, 1955년 ‘현대문학’에 시〈섭리〉<정적〉등이 추천되어 등단한다.
현대문학사 기자(1955~1964)를 거쳐 대한일보 기자(1965∼1968) 1969∼1972년 삼성출판사 편집부장(1969∼1972년) 등을 거치며 우리 문학을 이해하게 된다.
기자로 근무 하면서 예리한 성격의 소유자가 될 수 있었지만 그의 천성은 순진했다.
가난과 설움에서 흘러나온 정서를 정성을 다해 짜내어 문학의 강에 풀어, 아름답고 푸른 강물을 만들어 내었다. 이 강물은 아직도 우리 문학의 지향점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
노산공원 박재삼 시비 뒷면
김소월, 정지용, 서정주로 이어지는 우리의 전통 서정시의 맥은 박재삼 시인에게 이어져 있다는 평론가들도 있다.삼천포로 떠나며 나는 우리민족의 정서가 한이라면, 그 맥이 그에게 닿아 있는 것이 일견 옳다고 생각했다.
삼천포는 비록 그가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만 4세 때부터 자란 곳이다. 일본에서 가족들이 귀국하여 삼천포 노산(魯山) 아래 자리를 잡았다. 서금동의 팔포바닷가 마을에 정착하며 그들 가족의 고생은 시작된다.
지금도 그가 성장했던 집터는 남아 있다.
1층에는 ‘땡초김밥’이라는 식당이 있고 2층에는 박재삼의 형 봉삼(80)씨가 생존해 있다.
그러나 이번 기행에는 그 형을 만날 수 없었다.
박봉삼씨는 박재삼의 시 ‘추억에서30’에 등장한다. 이 시를 읽으면 가족애에 눈물이 난다.
비록 가난한 삶이라고 하더라도 가족의 구성원들이 각자 인내하고 헌신하는 행위는 희망과 꿈을 심어준다.
행복은 이때 다가오는 것이리라.
박재삼의 시집들은 유년의 추억이 가득하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들은 오히려 따뜻하고 감동을 준다. 아버지는 행상을 하고 어머니는 생선장수를 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하던 과거를 따듯하게 보듬는 그의 시의 세계를 내가 더듬어 가고 싶어지는 이유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형은 삼천포의 여관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한다. 배가 고파 찾아간 소년 박재삼에게 그의 형은 손님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싸서 건네주곤 했다.
당시 그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다음의 시를 읽어보면 가슴이 울렁인다.
유년시절의 박재삼 시인 (오른쪽)
국민학교를 나온 형이
화월여관 심부름꾼으로 있을 때
그 층층계 밑에
옹송거리고 얼마를 떨고 있으면
손님들이 먹다가 남은 음식을 싸서
나를 향해 남몰래 던져 주었다.
집에 가면 엄마와 아빠
그리고 두 누이동생이
부황(浮黃)에 떠서 그래도 웃으면서
반가이 맞이했다.
나는 맛있는 것을
많이 많이 먹었다며
빤한 거짓말을 꾸미고
문득 뒷간에라도 가는 척
뜰에 나서면
바다 위에는 달이 떴는데
내 눈물과 함께 안개가 어려 있었다.
- 박재삼 시인의 시 ‘추억에서 30’
누구는 이 지경의 가난이면 생각하기도 싫어 실토하지 않고 과거를 혐오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박재삼 시인은 가난을 천복으로 여겼다. 시의 원천이 가난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유년기에도 그는 가슴에 따듯한 감성을 잃지 않았다. 지적 탐구를 향해 그는 야간중학교의 문을 두드린다. 고학을 하면서 그는 많은 독서를 하게 된다. 이 독서는 그에게 희망을 주었고 작가로 인도했다. 삼천포의 바람도 그를 키워주었다.
<추억에서 31>를 읽어보면, 이미 그는 중학교 입학 무렵에 눈물을 흘리며 꿈을 꾸고 있었다. 세상을 멋지고 훌륭하게 살겠다는 결심이었다.
노산공원 호연제
해방된 다음해
노산(魯山) 언덕에 가서
눈 아래 무역회사 자리
홀로 삼천포중학교 입학식을 보았다.
기부금 삼천 원이 없어서
그 학교에 못 간 나는
여기에 쫓겨 오듯 와서
빛나는 모표와 모자와 새 교복을
눈물 속에서 보았다.
그러나 저 먼 바다
섬 가에 부딪히는 물보라를
또는 하늘하늘 뜬 작은 배가
햇빛 속에서 길을 내며 가는 것을
눈여겨 뚫어지게 보았다.
학교에 가는 대신
이 눈물 범벅을 씻고
세상을 멋지게 훌륭하게
헤쳐 가리라 다짐했다.
그것이 오늘토록 밀려서
내 주위에 너무 많은 것에 지쳐
이제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그것만 어렴풋이 배웠다.
- 박재삼 시인 시 ‘추억에서 31’
초등학교를 졸업한 박재삼은 기부금 삼천 원이 없어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한다.
동네 친구들은 교복을 입고 교모의 모표를 만지작거리며 자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죽지 않았다. 바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다를 향해 작은 배가 항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희망을 간직한다. 세상을 아름답고 멋지게 살 것이라는 다짐을 하기에 이르면 눈물 범벅이 되었다.
그는 40년 동안 시를 쓰는 일을 천직으로 알며 살았다.
전통적 가락에 향토적 서정성을 섞어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는 시를 썼다.
이것을 인정받아 많은 상을 받기도 했다. 한국시인협회상, 노산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평화문학상, 중앙시조대상, 조연현문학상, 애서가상(1996), 은관문화훈장(1997) 등이다.
그러나 정작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혈압, 위궤양 등 병마에 시달리며 만년을 보내야 했다.
독자들이 아직도 그의 삶을 애석하게 생각하는 이유다.
나) 박재의 문학과 시의 세계
박재삼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산공원에 있는 <박재삼문학관>이 제격이다.
1층에는 한국서정시의 정통계보에 박재삼 시인이 속해 있다는 것을 전시한 공간이다.
시낭송 전용공간이 있고 박재삼 시인과 함께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장소도 조성했다.
박재삼 시인의 육필원고와 유년시절의 사진 문단에서 활동할 때 사진들과 각종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다른 문학관에 비해 세련된 공간으로 조성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2층은 다목적실, 문예창작실, 박재삼 소장 도서 열람실이다. 3층은 옥상휴게실이다.
이곳에 올라보면 이곳이 한려수도의 중심지임을 느낌으로 알 수 있다. 삼천포대교와 삼천포항구를 비롯한 주변 바다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박재삼문학관
가난과 병마와 싸우면서도 그가 발견한 것은 자연의 섭리였다.
그의 대표 시 천년의 바람을 읽어보면, 역사의 순리와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을 알게 된다.
천 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 박재삼 시인의 시 ‘ 천년의 바람’ 전문
천년의바람 시집
<천년의바람>은 박재삼 시인의 제3시집의 제목이다.
이 시를 통해 그는 독자들과 평론가들로 부터 많은 찬사를 받았다.
결국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자연의 영원성과 인간 삶의 유한성을 비교하며,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는 교훈적인 시다. ‘보아라 보아라’에는 강한 명령조의 표현이지만 결코 무례하지 않다. ‘사람아 사람아’라고 부르는 소리에는 사람에 대한 그의 애정이 담겨있다.
교훈적이며 명령적인 표현에도 사람들이 거부하지 않는 것은 ‘장난’과 ‘간지러움’같은 어휘가 풍기는 가벼움 때문이리라. 고작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들이 지금 하고 있는 모습이 가엾기 때문에 이 시를 통해서 세상에 외치고 있는 것이다.
박재삼 시인 육필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 사천(삼천포)에서 자랐다.
삼천포는 그의 유년의 삶이 오롯이 녹아 있는 땅이다.
그의 어머니는 이곳에서 멀리 진주장터로 생어물 장사를 하러 떠났다. 삼천포는 그의 아버지가 지게품팔이를 하던 곳이다. 지독한 가난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해방을 맞이한다. 동아일보 신문배달원, 삼천포 여중 급사로 근무하며 야간 중학교의 문을 두드린다.
상식이 통하지 않던 세상살이에도 그는 맑고 순결한 청년이 되어간다.
가난이 그의 시적 세계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토대이면서 계급과 정치로 변질되지 않은 이유다. 그에게 가난은 그냥 가난이 아니라 추억이다. 누구든 가난은 상처를 남긴다. 그러나 그에게 가난은 오히려 그 상처를 아름다운 언어로 교환하는 문학적인 서정이 더 크고 행복했다. 고통과 슬픔을 승화시키며 추억으로 승화시키던 그의 고향 삼천포로 떠나면서도 가슴이 설레는 이유다.
진주장터 생어물 전에는
바다 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
진주 남강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밤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 박재삼 시인의 시 ‘추억’ 전문
시를 읽어보면 그곳에 가난의 흔적이 묻어난다. 진주 장터로 생선을 팔기 위해 떠나던 시인의 어머니를 추억하며 그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계절은 겨울, 바다 밑까지 깔릴 정도로 어둠이 덥여 왔다. 그러나 시인의 어머니 광주리에는 아직 팔리지 않은 생선 몇 마리가 남아 있다. 박재삼 시인은 생선들의 눈빛을 기억하며 당시 어머니의 마음을 읽고 있다.
박재삼 시인의 시 원고
어머니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어린 자식들을 집에 남겨 두고 이른 새벽길을 떠났다. 장터의 노상에서 생선을 팔다가 밤늦게 별빛을 받으며 지친 몸으로 돌아오는 어머니의 마음 상태를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표현은 객관적 물체를 지정하여 시인이 자신의 어머니 마음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였다. 가난과 한(恨)이라는 정서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이 작품을 몇 번 읽다보면, 그가 슬프고 서러운 유년의 삶을 얼마나 절제된 시어로 그려내려고 했는지 알 수 있다.
결국 이 시는 시적 화자의 어릴 적 가난했던 생활을 회상하며, 어머니의 슬프고 한스러운 삶을 절제된 어조로 그려내고 있다.
당시 아버지의 첫 손님은 진주로 고기를 팔러 가는 어머니였다.
지게 품팔이도 일거리가 없던 시절이다.
시의 성격은 회고적이며 영탄 적이지만 향토적인 시어들은 당시 삼천포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대변한다.
가난의 상황들을 직접 표현하였다면 독자들로부터 외면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생선의 눈깔’과 ‘옹기전의 옹기들’ 등의 사물을 통해 시인의 어머니가 지닌 보이지 않는 현실적인 슬픔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경남 사천(삼천포) 주변의 구체적인 지명과 사투리를 활용하여 유년기의 정서를 어머니의 삶과 결부한 이 시는 슬픈 서정성의 전형이다.
박재삼문학관 내부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진주 장터에 깔리는 어둠”이다. 어물전의 어둡고 쓸쓸한 분위기 2연은 현실적은 가난으로 한이 맺힌 어머니의 삶에 대한 회고를 하고 있다.
“팔고 남은 생선에서 빛나던 한(恨)”에는 깊고 넓게 가난을 이해하려는 시인의 마음이 녹아 있다.
진주의 어느 생 어물전은 시인의 어머니가 어린 남매를 위한 생계의 터전이다.
남강과는 대조적이다. 남강은 처절한 가난을 극복하려는 맑고 아름다운 장소이기 때문이다.
“해 다 진 어스름을” 이란 표현을 통해 작품 전체에 어둡고 슬픈 분위기 조성한다.
울엄매(우리 엄마)의 경상도 사투리는 어머니에 대한 친근감의 표현이지만 ‘울고 있는 엄마’라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리라.
시와 노래는 추억을 생각하게 만든다.
주변 사람에게 실망하고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나는 여행을 떠난다.
여행에서 만나는 산과 들 강과 나무들은 내게 용기와 희망을 주곤 했다.
박재삼 시인의 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내게 추억을 생각하게 하는 시다.
이 시를 읽으면 20년 전의 고향마을 생가와 고샅길, 어머니 묘소를 생각하게 한다.
빚을 내어 고향의 생가를 구입하려고 할 무렵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이었다.
가난이 원망스러웠고, 세상의 비정함에 주먹을 흔들었다.
형제와 친척, 친구들도 돈 앞에서는 냉정했다.
단지 내게 용기를 준 사람은 아내였다. 당시 나는 책에 미쳐 있었다.
지극한 사랑을 주셨던 할머님도 세상을 떠나셨다.
방이 비좁아 책을 보관할 곳이 없었다. 공간이 필요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생가는 헐값에 누군가에게 팔려나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퇴직금을 미리 받아 구입한 생가에서
‘나는 누구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다.
시집을 읽으며 마음을 달랬다.
이 무렵 많은 시 속에서 가슴을 울렁이게 만든 시가 박재삼 시인의 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이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빛으로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 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 박재삼 시인의 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전문
나는 박재삼 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여러 번 읽고서야 그를 비로소 시인으로 인정했다. 그 무렵 나는 정의와 비판, 이념적인 문학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91년대 봄에 나는 형이 팔아버린 괴산에 있던 생가를 사서 단장하는 일을 했다. 가을 무렵 어느 정도 일이 진척되어 갈 무렵에서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다. 은행나무 아래서 많은 시집을 읽었다. 이때 이 시를 발견했다. 참 좋은 시라는 생각을 했다. 이때부터 저녁노을이 아름다우면 이 시를 생각했다.
눈물을 머금고 노을이 지는 가을 강을 바라보아야 이 시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인정하면, 세상살이의 이치를 자연에 몰입 할 수 있게 된다.
그 당시에 '저녁노을'을 삶속의 울음에다가 비유한 표현은 내 가슴을 적시곤 했다. 아름다움도 슬픔이 될 수 있음을 그 무렵 알았다.
박재삼 시인이 인간적인 시인 같아서 세상 떠나기 전에 몇 번 만날 기회가 있을 때 인사를 하기도 했다. 슬픔도 절제하면 때로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 이 시가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유인지 모른다.
문학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경험의 산물이다. 물론 전적으로 상상으로 쓰여 질 수 있지만 경험은 작가의 가장 큰 글쓰기의 원천이다.
가난한 경험과 투병생활은 작가로서는 문학의 원천을 얻는 샘이 될 수 있다. 작가의 심성이 맑으면 슬픔의 경험도 때로 아름다운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는 이유이다.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는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 이야기일 게다. 또한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지 모를 일이다. 울음이 타고 있다는 표현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노을을 울음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 사람은 보통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작가는 삶속에서 경험하고 탐구하여 말을 발견하고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사랑의 경험과 이런 저런 사연이 없는 사람이 새로운 말을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눈물을 흘리며 응시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이 시를 이해하게된다. 노을에 불타는 가을 강은 아름답지만 그곳에 자신의 삶에 슬픈 사랑이 녹아 있지 않다면 이 시의 감동은 반으로 줄어든다. 노을이 아름다운 것은 슬픈 사랑으로 인함이다.
저것 봐, 저것 봐' 라는 감탄사는 슬픔과 아름다움이 만들어 낸 황홀한 절정의 순간에 터지는 시어이다.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의 절규의 소리를 대신 시인이 외치고 있다. 시인은 강물이 바다에 합류하면서 토해내는 소리를 듣는 존재이다.
작가가 이런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사람살이의 고단함을 자연과 합류시키지 못하면 글을 쓰는 행위는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나는 이 시를 읽으면 20 년 전 고향의 생가를 기억한다. 은행나무 아래서 꿈꾸던 길을 지금 나는 걸어가고 있다. 행복하다.
그의 첫 시집은 1962년에 발간한 <춘향이 마음>이다. 이 시집에는 30편의 시가 실려 있다. 그가 등단 전후에 쓴 시다. 박재삼 시인은 생전에 15권의 시집을 출간한다. 그러나 첫 시집<춘향이 마음>은 그의 정서적인 토대가 되는 시집이다.
당시 서구편향적인 분위기의 시가 아니면 조명받기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박재삼 시인은 시집<춘향이 마음>에서 한국적인 미학의 깊이와 격조를 보여주었다.
<춘향이 마음>의 시편들은 고통의 마음이 스며 있다. 고난과 아픔을 인내하기 위한 서러움과 그리움의 마음이다. 자신의 사랑, 이몽룡이 떠나고 난 빈자리에서 변학도에 성적인 확대를 당하는 처절한 고통과 절규의 몸부림이다.
집을 치면, 정화수 잔잔한 위에 아침마다 새로 생기는
물방울의 신선한 우물집이었을레. 또한 윤이 나는 마루의,
그 끝에 평상의, 갈앉은 뜨락의, 물냄새 창창한 그런 집이었을레.
서방님은 바람 같단들 어느 때고 바람은 어려울 따름,
그 옆에 순순한 스러지는 물방울의 찬란한 춘향의 마음이
아니었을레.
하루에 몇 번쯤 푸른 산 언덕들을 눈 아래 보았을까나.
그러면 그 때마다 일렁여 오는 푸른 그리움에 어울려 흐느껴
물살짓는 어깨가 얼마쯤 하였을까나.
진실로, 우리가 받들 산신령은 그 어디 있을까마는,
산과 언덕들의 만 리 같은 물살을 굽어보는,
춘향은 바람에 어울린 수정 빛 임자가 아니었을까나.
- 박재삼 시인의 시< 수정가>에서
그리움과 한의 정서를 형상화 한 ‘수정가’의 시편은 춘향이의 마음의 결정체이다.
이도령을 향한 춘향의 그리움을 맑고 투명한 이미지를 가진 사물을 통해 시적 이미지를 형상화 하였다. 이때의 사물은 춘향의 집이다.
평범한 일상 언어와 영탄적인 표현들은 독자들에게 비애의 감정을 지니게 만든다.
맑고 깨끗한 춘향의 집에는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수정처럼 맑고 정갈하다. 이 물을 떠서 정화수로 삼아 이도령을 향한 마음을 보여 준다. 이몽룡과 이별한 춘향의 그리움은 수정 같을 물살에 푸르고 깨끗한 산과 들, 바람과 순결한 춘향이 마음이 들어 있다.
춘향은 하루에도 몇 번씩 푸른 산과 언덕들을 바라본다.
그리움은 푸른 그리움과 함께 물살처럼 일렁이고 끝내 어깨를 흔들며 흐느낀다.
젊은날의 박재삼 시인
뉘라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 아는 내 마음 꽃나무는
내 얼굴에 가지 벋은 채
참말로 참말로
사랑 때문에
햇살 때문에
못이겨 그냥 그
웃어진다 울어진다 하겠네.
- 박재삼 시인의 시 <자연> 전문
<자연>에서 말하는 있는 사람은 춘향이다. 춘향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적인 사랑을 꽃나무에 비유하고 있다. 전통적이며 독백적인 이 시를 읽다보면 진정한 사랑이 얼마나 진실성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랑은 자연적으로 솟아오른 감정이며 기쁨과 슬픔도 이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사랑으로 인한 기쁨과 슬픔의 현상들은 모두 자연적인 현상임을 표현한 작품이 <자연>이다. 이 시는 서정주 시인의 시<추천사>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보인다.
서정주 시인의 시 <추천사>에서는 춘향은 변학도에게 당하고 있는 현실의 고통과 고난을 괴로워한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사랑으로 인한 고독과 절박이다. 그러나 박재삼 시인의 <자연>에서는 춘향은 자신의 고난과 슬픔을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인다.
'내 마음 꽃나무'라는 표현은 사람과 자연이 지닌 동질성의 상징어다. 사랑의 상징어인 꽃나무는 인간의 마음에 닿아 있다. 사랑의 감정은 억제하기 어렵다. 사람의 힘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것이다. 마치 꽃나무가 피고 지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웃고 울 수 있는 것도 사랑과 햇살 때문이다. 햇살은 자연의 상징어다.
자연은 마음을 대신 표현해 준다. 결국 자연의 섭리처럼 사랑하고 살아갈 때 고통과 절박한 사랑의 갈등에도 상대를 향한 마음은 변하지 않고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수 있다.
박재삼 시인은 누구든 환경과 현실적인 상황을 이유로 불행을 자초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건네는 시를 썼다. 그의 문학이 소중한 이유다.
3) 구계서원과 사천
구계서원은 사천시 사천읍 구암리 산 42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만축산 중턱에 1569년 이정 선생이 구암정사를 완성하였는데, 그곳에 1611년 구산서원을 창건한 것이다. 1676년 (숙종2년) ‘구계’라는 사액을 받는다.
그러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에 따라 훼철된다. 1931년 구산사서원과 동재 서재 내삼문 풍영루를 중건한다. 일제하에 서원을 복원하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이 고장 사람들은 이정 선생의 학문과 덕을 빛내기 위해 구계서원을 복원한 것이다. 내가 구암 이정 선생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남명 조식 선생 때문이다.
몇 년 전에 남명 조식 선생의 삶과 철학을 탐구하다가 사천 출신의 구암 이정 선생을 만났다.
구계서원
사천은 이정(1512~1571년)의 고향이다. 관향은 사천이며 호가 구암이다.
부친 이담과 모친 진주 정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5세 때 조부에게 천자문을 배우며 학문의 길을 들어선다. 12세 때 경상도에서 실시하였던 여름별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니 그 실력을 알만하다. 23세에 규암 송인수 선생의 제자가 되고, 1537년 그의 나이 25세 때에 문과별시에 장원급제한다. 이듬해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서적을 구입하여 가져와 독서한다. 1558년 남명 조식과 함께 지리산을 기행한다. 그의 나이 47세 때다. 49세 때에는 경주부윤이 되어 천년고도 신라 땅 경주가 황페화 되는 것을 막는다. 왕릉이 밭으로 변하는 것을 방지하고 무열왕릉과 김유신장군 묘에 제사한다.
58세에는 고향에 구암정사를 완성한다. 퇴계 이황이 방문하여 구암정사를 대관대서재라는 이름으로 지어준다. 동재를 거경재, 서재를 명의재로 이름을 붙인다.
1571년 7월16일 60세로 구암리에서 세상을 떠난다. 선생의 묘소는 진주시 정촌면 대축리 산 240-2번지 선영에 있다.
사천 이정이 집이 있던 구암은 남명 조식 선생의 발길이 닿던 곳이다. 사천읍성에서 고개를 넘어 구암을 향해 달린다. 이 길은 남명 조식 선생이 걷던 길이다. 퇴계 이황도 이 길을 걸어서 구암정사에 올랐을 것이다. 역사가 있는 문학기행은 옛 문인들의 삶과 문학의 궤적을 찾아가는 여행이다. 이 기행에서 항상 관심있게 보아야 할 것은 옛 사람들의 길이다.
그들이 걸었을 그 길을 나도 걷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으면 기행은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울 것이다.
남명 조식 선생이 지리산 기행을 하기 위해 배를 탔던 곳은 사천 장암이다. 지금은 뱃길이 막혔다. 조선시대에는 사천에서 배를 저어 곤양, 서포를 거쳐 섬진강으로 가는 뱃길이 널리 사용되었다. 이 뱃길은 한양으로 세금을 바칠 때 이용하던 길이다.
1558년 4월 11일 합천의 계부당을 출발한 조식 선생은 13일까지 진주에 살던 자형 이공량의 집에서 유숙하고 14일 아침 자형과 함께 사천으로 길을 떠난다.
구계서원
남명 조식은 합천을 출발하기에 앞서 진주목사를 지낸 김홍과 사천에서 배를 타고 지리산을 유람하기로 약속하였다. 그 여정은 섬진강을 거슬러 쌍계사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진주를 출발한 남명 일행은 사천으로 향한 것은 그곳에 구암 이정의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정은 1512년(중종7년) 사천군 구암리에서 이담의 장남으로 태어나 유년시절부터 학문이 뛰어났던 사천의 유명 인사였다. 마침 이 무렵 이정은 청주목사로 근무하며 선정을 베풀다 건강이 좋지 않아 사임하고 고향에 머물러 있을 때였다. 1557년 부호군에 임명되었지만, 처사로 지내고 싶어 했다. 자신의 어머니 봉양을 위해 고향을 떠나지 않고 조정에서 주던 봉급도 사양하였다. 이무렵 남명 조식 선생이 이정을 찾아 온 것이다.
이정이 이처럼 벼슬을 사양하고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고향에 머물고 있을 때 남명이 자신의 집을 방문한 것이다. 당시 이정의 집은 구암리에 있었다. 구암리는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하여 ‘자래바위’ 또는 ‘구암리’라고 불렀다.
잡초 무성한 구계서원
구암 이정 선생은 조식 선생을 스승같이 섬겼다. 남명은 이정의 집에서 하루를 묵는다.
다음날인 4월15일 장암으로 향한다. 당시 장암은 사천강과 길호강이 만나는 마을이었다. 장암에는 쾌재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고려말 이순이 건립했다고 전해오지만 지금은 그 흔적도 없다.
이순은 홍건적을 물리친 고려시대의 장군이다. 사천시는 이런 정자를 다시 복원할 필요가 있다. 500년 된 정자나무 옆에 다시 쾌재정이 세워지면 남명 조식과 이정의 추억 여행도 흥미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남해안고속도로와 사천비행장으로 인해 다시 복원이 된다 해도 옛 모습은 아니리라. 바다였던 곳이 모두 육지가 되고 그 땅들은 빠르게 인간들의 욕심을 위해 변신하고 있다.
이곳에서 섬진강을 향해 가기 위해 배에 오르려 할 때 사천 현감인 노극수가 남명 조식 일행을 위해 술자리를 베풀어 주었다.
이쯤에서 구암 이정 선생의 시 한편을 읽어보자. 그가 명나라 서장관으로 가면서 산해관을 지나며 썼을 한시에는 그의 역사관이 들어있다.
미수 허목이 비문을 쓴 구산사비
백척의 높은 산해관에서 진시황의 어리석음을 비웃네.
부질없이 만리장성을 쌓느라 수많은 백성을 죽였으니.
온밤 내내 상차(喪車)에선 절인 고기 냄새 풍겼으니
진나라를 망하게 한 건 북쪽 오랑캐가 아니라네.
- 구암 이정 한시 ‘산해관(山海關)’ 정병호 번역
만리장성의 길고 장대함에 놀라 그것을 찬미한 시인 묵객이 많았다. 그러나 이정 선생은 진시황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비유하고 있다. 만리장성을 쌓으며 수많은 진나라 백성들이 죽어갔기 때문이다. 결국 백성들의 원망과 원성으로 진나라가 망했다는 표현으로 백성을 섬겨야하는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구계서원은 전망 좋고 아름다운 골짜기다. 그런데 이번 기행에서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장설립지구가 되어 앞산은 허리까지 잘려 나간 상태다.
이곳에 공장 허가를 내준 행정당국자는 누구인가. 구계서원의 역사성과 이정 선생과 퇴계 이황 선생의 발자취를 확인한다면 이렇듯 앞산을 공장 터로 만들지는 못하였으리.
구계서원은 이제 예전의 그 아름답던 경관을 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이렇게 옹졸하고 시야가 좁아서야 어디 마음을 놓을 수 있단 말인가.
구계서원
주차장에 승용차를 주차하고 계단을 걸어 올라간 나는 다시 놀랐다. 구계서원의 입구와 마당은 개망초가 지천으로 피어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랬다. 이곳에 사람들이 많이 방문하면 저렇듯 엄청난 공단을 조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곳이 만약 도산서원이나 소수서원처럼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고 하면 이렇듯 방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관리자가 없는 구계서원에서 구암 이정 선생과 이곳에서 공부했던 옛 선비들의 당당하고 자랑스럽던 모습을 상상했다.
매미제를 오르는 차량들은 왼쪽에 있는 구계서원에 매연을 내 뿜으며 오르고 있다.
공장이 지어지면 구암 이정 선생께는 죄송하지만 구계서원을 영원히 탐방하지 않을 예정이다.
4) 맺는말
박재삼 시인은 민족적인 정서인 한과 가락을 이어 받았다. 가난과 슬픔,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자신의 서정적인 시세계를 잉태하였다. 그의 시가 친화력과 보편적인 정서를 지니고 있는 것은 고난속에서도 긍정과 밝음을 지향하였기 때문이다.
쉬운 시어의 선택으로 태어난 그의 시들은 음악성과 율격으로 어울려 부담없이 읽고 흥얼거리게 만든다. 4살부터 스물한 살까지 살았던 삼천포는 자신의 어머니 고향이었다.
삼천포에서 그는 바다, 햇빛, 강물, 바람갚은 자연을 소재로 끌어와 시어들을 창조한다.
마치 윤동주 시인이 하늘과 바람과 별을 노래했듯이 자연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사람에게 의지하고 기대를 하는 것은 언제나 실망이다. 그가 결코 가난을 비굴하게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아부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모국어의 한국어를 다듬어 순화시키고 고운결의 언어로 만들려고 노력한 시인이다.
박재삼 시인의 60년대 초의 <춘향이 마음>, 70년 중반< 천년의 바람>, 1983 출간한 시집< 추억에서> 보듯 자신의 시세계를 소시민의 삶과 결부시키며, 서정성을 찾으려 했다.
박재삼문학관
제7시집 <추억에서>는 30년 전을 회상하는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1950년대의 삶을 30년이 지난 1980년대에 쓰고 있는데도 거부반응이 없다. 이것은 그의 삶과 시가 동일하다고 하는 믿음 때문이다. 우리 문단에 문학과 삶이 철저히 분리된 이중적인 모순을 가지고 살면서도 작가라며 거만한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1980년대 중반 이후 박재삼 시인은 병마에 시달리며 가난한 시인의 길을 걸었다.
주변 사람들이 그의 삶을 걱정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가난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고 있다는 믿음과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과 신념은 그가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과 사람들을 사랑했다. 자신이 가난했듯이 소시민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결코 계급적인 이념을 조성하지는 않았다. 눈물을 많이 흘리며 살았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눈물의 시인’ 이라고 부른다.
눈물은 비정한 삶에 완충작용을 한다. 그는 시인으로 삶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려고 무진애를 쓰다가 홀연히 떠났다.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라는 시은 그의 유언과도 같은 시다.
어쩌다가
땅 위에 태어나서
기껏해야 한 칠십 년
결국은 울다가 웃다가 가네.
이 기간 동안에
내가 만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점지해 준
빛나고 선택받은 인연을
물방울 어리는 거미줄로 이승에 그어놓고
그것을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보태며
나는 꺼져갈까 하네
- 박재삼 시인의 시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 전문
그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빛나고 선택받은 인연’에 감사하며 자연속으로 소멸되어 가며 거미줄을 그어놓고 간다며 떠나갔다.
울음이 타는 가을강 (노산공원)
그는 부활이란 꿈을 꾸며 살기도 했다.
삶의 전환들이 그에게는 부활이었다. 초기의 시 <춘향이 마음>에서도 이미 그의 부활적인 생각들이 꿈틀거렸다.
당신이 푸른빛과
별로 관계가 없는 것은
빤하고 분명하건만
그러나 늘 그 근처에서
자나 새나
그리워하고 산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저 햇빛에 반짝이는
무수한 이파리들 둘레에서
혼을 빼앗긴 채
멍청히 지냈던 사실을 헤아려 보라.
결국 이런 과정을 거치고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
땅 밑에 묻혀
스미는 물로 변하여
그 이파리들을 티고
눈부시게 올라오게 하리라
아, 이것이 부활이 아니고 무엇인가.
- 박재삼 시인의 시< 부활의 생각> 전문
박재삼 시인
박재삼 시인은 김소월, 김영랑, 박목월과 서정주로 이어지는 시인이다.
1950년대부터 줄곧 한국 서정시의 맥을 잃지 않고 40년 동안이나 시를 썼다.
등단시절부터 한과 슬픔의 정서를 표현하여 평론가와 독자들로부터 주목을 받는다.
50년대 시인들이 80년대에는 대부분 그 서정성을 잃고 방황할 때도 그는 외줄을 타듯 40년간 시의 길을 걸었다.
그의 시적 형태가 서정주 시인에 닮아 있다고 하지만 결코 샤머니즘적인 정서로 독자를 현혹시키지 않았다.
70년대와 80년대는 민중문학 시대였다. 그는 시대에 역행하는 듯 보일정도로 민중문학과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이 걸었던 서정성을 잃지 않았다.
그 자신이 바로 민중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가난을 계급으로 나누고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보았다.
몇 번 언급했지만 그는 가난과 병마를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오히려 이런 고단한 삶을 자신의 시창작에 적극 활용한다. 외부적인 강한 충격들을 서러움과 슬픔의 정서로 흡수하며 눈물을 흘렸다. 외부적으로는 밝음과 긍정의 미학으로 비상하는 꿈을 꾸었다. 박재삼 시인의 삶과 문학에 감동이 일렁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