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아 박용철 시인과 광주, 무등산 증심사길
글. 사진 : 백승훈
떠나가는 배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뭣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 사랑하던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돌아다 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회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간다
답사를 떠나던 날 아침, 광주의 전 선생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제 이틀 예정으로 서울에 왔었는데 다행스럽게
일이 일찍 끝나는 바람에 지난 밤에 내려와 바람에 지금 광주에 있으니 내려오는 대로 만나자는 전언이었다.
말은 일이 일찍 끝났다고 했지만 분명 나 때문에 일정을 서두른 게 틀림없었다. 6월 기행지가 광주로 정해졌을 때
제일 먼저 전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광주 토박이인 전 선생의 도움을 받는다면 답사길이 수월할 것이란 생각과
오랫만에 얼굴도 보고 안부 없이 지냈던 소원함에 대해 사과하고도 싶었기 때문이다.
전 선생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4,5년 전 쯤으로 기억된다. 그때 우리는 의기투합 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모종의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 비록 도중에 사정이 생겨 불발로 끝나긴 했지만 그때 열정적으로 일을 추진하던
그의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잠시 꿈을 꾼 듯도 한데 꿈이라면 분명 유쾌한 꿈이었다.
그가 나를 위해 일정을 서둘러 끝내고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광주로 가는 마음이 공연히 바빠졌다.
수원에서 황국장과 만나 광주로 가는 동안 나는 '인생은 만남'이라고 했던 독일의 작가 한스 카로사의 말과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라고 했던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의 한 구절을 곱씹었던 것 같다.
나도 누군가를 만날 때, 그 어마어마한 일을 감당해야만 할 때 그가 섭섭하지 않도록 정성을 다해 환대했던 적이
있었던가.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던 시간이기도 했다.
이번 광주행에선 용아 박용철 시인 뿐만 아니라 조선의 대표적 성리학자였던 고봉 기대승 선생과
시.서.화 삼절의 의재 허백련 화백까지 시공을 초월한 만남이 준비되어 있으니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의지만으로 안되는 것을 운명이라 했던가.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은근히 내 등을 떠밀고 있었다.
시는 살과 피의 맺힘이다
박용철(1904.6.21 ~1938.5.12)
1985년 2월 동아일보 지면 한 귀퉁이엔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있던 김수철의 히트곡 '나도야 간다'란
노래가 방송금지 처분을 받았다는 기사가 났다. 노랫말 중에 박용철 시인의 시 '떠나가는 배'의 일부를
표절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김수철의 '나도야 간다'는 최인호 원작 소설을 영화화 한 '고래사냥'에 삽입곡이었다.
고래사냥은 서슬 퍼런 신군부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 대,어디론가 탈출하고 싶던
젊은이들의 심정을 속시원하게 대변해 주었던 영화였다. 박용철 시인은 그렇게 내게로 왔다.
박용철 시인은 우리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음에도 세인들에겐 많이 알려진 시인은 아니다.
식민지 문학이 난숙기에 접어들던 1930년대 정치 이데올로기에서 한걸음 물러나 문학 자체의 자율성과
미학을 추구한 한 무리의 시인이 등장한다. 1930년 3월 창간한 시 전문지 <시문학>을 중심으로 활동에 나선
일명 '시문학파'로 불리는 시인들이다. 시문학파의 시인들은 1920년대 중반 이래 각종 이념에 혹사 당하던
우리 언어를 어루만지고 다듬어 시를 다른 무엇에 복무하는 도구가 아닌 그 자체로 아름다운 빛을 뿌리는
예술의 자리에 다시 세운다.
이들은 당대를 휩쓸던 이데롤로기 열풍에서 한 발 물러나 관념성과 정치주의적 편향성을 극복하고 "
시가 언어 예술이라는 점을 내세워 언어의 조탁과 전통적인 시가 율격에 기초한 시의 음악성 회복에
특별한 관심을 보임으로써 우리 말의 시적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문학파는 <시문학>을 비롯하여 1931년에 발행되는 <문예월간>,1934년의 <문학>을 무대로 활동한
박용철.김영랑,정지용, 신석정,이하윤,정인보 등을 가리키는데 그중에도 시문학파의 특징을
가장 풍부하게 머금고 삭여낸 시인으로 김영랑과 박용철을 꼽는다.
직접 <시문학>을 발간,편집하며 "우리의 시를 살로 새기고 치로 쓰듯 쓰고야 만다'고까지 말했던
박용철의 시론은 시문학파의 작품들을 받쳐준 큰 힘이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떠나가는 배'등
70여 편의 시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박용철은 시창작보다는 외국 문학의 번역과 시론, 비평 분야에 치중하여
19030년대 초반 <시문학>이 기틀을 잡는데 많은 공헌을 하고, 1930년대 중반부터 일기 시작한
모더니즘과 기교주의 논쟁에서도 순수파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용아 박용철은 1904년 광주시 광산구 소촌리에서 박하준의 4남매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으나
일찍 두 형이 죽어 4남매 중 장자가 되었다. 어릴적부터 총명하기가 남달라서 밤마다 신소설 한 권씩을
읽었으며 주판을 잘 다루었다고 한다.
그는 광주보통학교를 마치고 휘문의숙에 입학한 뒤 배재학당으로 전학하였는데 그 무렵 선생이
박용철의 질문을 두려워 할만큼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1918년 배재학당을 중퇴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라
1923년 도쿄외국어대학 독문학과에 입학한다.
동경 유학 중 시인 김영랑을 만나 시를 쓸 것을 권유 받았으며 후일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 사이로
발전했다. 전공인 독어 뿐만 아니라 영어 실력도 만만치 않았던 그는 학창시적부터 하이네, 괴테, 셀리 등의
작품을 번역하기도 하였으나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하여
고향에서 독서와 습작으로 시간을 보낸다.
1930년 3월, 사재를 털어 <시문학>을 창간하고 여기에 '떠나가는 배, '싸늘한 이마',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등을
발표하며 출판인이자 문인으로 1930년대를 맞는다. 그는 시문학 2호와 3호에도 계속 시편을 발표하나
같은 시기에 활동하던 김영랑이나 정지용의 시들이 워낙 쟁쟁하여 시인으로써 한계를 느끼고
더욱 이론으로 기울게 되는데, 알고 보면 그는 시문학 창간호부터 이론가의 자질을 보여준다.
'시문학 ' 창간호에 발표한 창간 의의는 시문학파의 순수 문학론이자
박용철의 독자적 시론인 '존재의 시론'의 서곡과도 같은 것이었다.
사재를 털어 문학지를 창간하며 시 뿐만이 아니라 소설, 영화 등으로 장르의 폭을 넓히고
해외 문학에까지 지면을 할애하며 우리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데 열정을 바친다. 뿐만 아니라
박용철은 자신의 시집은 제쳐놓고 동료 시인들인 김영랑, 정지용의 시집 발행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남다른 열정으로 문학에 임하고 따뜻한 동료애를 보여주었던 박용철을 고향으로 끌어내린 건
결핵이란 병마였다. 쇠약해진 몸을 요양하며 고향에 머물던 중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1938년 5월 12일 길지 않은 삶을 마쳤다.
용아 박용철 시인을 만나기에 앞서 광주에서먼저 찾아봐야 할 곳이 있으니 다름 아닌 월봉서원이다.
광주의 전선생에게도 전화를 걸어 그곳에서 만나자 약속을 한 터였다.
호남학파의 큰별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광곡마을 (너브실)에 위치한 월봉서원은 고봉 기대승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고봉 사후 7년 만인 1578년(선조 11년) 낙암(현 신룡동)에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어 동천(현 신월동)으로 옮겨
건립했는데,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가 1941년에 새로 지은 후 1978년부터 사당과 장판각, 내삼문, 외삼문
건립에 착수하여 1981년에 준공을 본 서원이다.
고봉 기대승(1527 ~ 1572)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본관은 행주이며 자는 명언이고 호는 고봉(高峰),
시호는 문헌(文憲)이며 고봉이란 호는 현 고양시에 있는 고봉산에서 취했다고 한다. 조선 중종 22년(1527) 11월 18일
광주시 소고룡리(현 광산구 신룡동)에서 태어난 고봉은 32세에 문과을과에 장원으로 관직에 진출하였고,
성균관대사성. 사간원대사간 등 내직을 두루 거치고 46세에 세상을 떠났다.
고봉선생의 문집으로는 경연강론을 모은 논사록(論思錄)과 주자문록(朱子文錄) 등 다수가 있는데 그중에도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였던 퇴계 이황과 13년 동안이나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8년 동안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논쟁을 펼친 것은 유명하거니와 이 논쟁은 조선조 성리학의 위치를 한단계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성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사단칠정논변을 통하여 성리학에서 논쟁적 탐구 방법의 서막을 열었으며 ,
이외에도 예학,역학 등 철학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고심하였던 철학자였다.
퇴계 선생이 통유(通儒)라 할만하다고 평가했을만큼 식견이 넓고 월등했던 고봉은 비록 짧은 생을 살다 갔으나
영세불망(영世不忘)의 족적을 남기고 간 선비였다. 항상 진리를 사랑하고 선행을 실천하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가난하면서도 현실에 만족할 줄 알며 올고 곧은 그의 정선은 진정한 선비 정신 그 자체였다.
마을로 들어서서 새로 조성한 듯한 토담길을 지나 백우산 자락에 자리한 월봉서원의 주차장에서 전선생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우리는 서둘러 월봉서원의 외삼문인 망천문(望川門)을 들어섰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정면에 보이는 월봉서원의 강당인 빙월당이다. 빙월당(氷月堂) 월봉서원(月峰書院) 충신당(忠信堂).
현판이 셋이나 걸린 것이 좀 특이하다.
망천문과 빙월당 사이에는 작은 마당을 두고 좌우에 서원의 기숙사라 할 수 있는 존성재(存省齋)와 명성재(明誠齋)가
마주보며 서 있다. 존성(存省)은 자신을 성찰한다는 의미이며, 명성(明誠)은 배움에 있어 밝은 덕을 밝히는데
성의를 다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빙월당의 당호는 정조대왕이 고봉의 고결한 학덕을 상징하는 '빙심설월(氷心雪月)'의 뜻으로 하사했다고 전해지는데,
빙심설월(氷心雪月)은 1655년 효종대왕이 고봉을 기린 제문에 '그대의 정신은 잘 단련된 금과 같고, 윤택한 옥과 같고,
맑은 수월(水月)과 같고 결백한 빙호(氷壺)와 같도다. 가정에 이어오는 좋은 교훈을 받았고 학문은 정자와 주자를
본받았도다. 기운은 일세를 풍미하였고, 이치는 천만 가지를 꿰뚫었도다"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장판각엔 고봉선생 문집 11권의 판각 474 매와 월봉서원 강당 충신당.명성재.명성재.존성재. 유영루 등의 현판이
보관되어 있다.
빙월당 뒤쪽엔 내삼문인 정안문(靜安門)이 있고 정안문을 들어서면 고봉 선생의 위패를 모신 숭덕사(崇德詞司)가 있는데
정안문이 잠겨 있어 담 너머로 잠시 안을 살펴볼 밖에 도리가 없었다.
빙월당을 둘러볼 때였다. 댓돌 위에 신발 한 켤레가 놓여 있고 문도 열려 있었다. 호기심에 안을 들여다 보았는데
방안에선 초로의 사내가 마침 식사 중이었다. 찾아온 까닭을 말하니 수저를 내려놓고 문밖으로 나와 안으로 들어오라
소매를 잡아 끌었다. 월봉서원의 문화해설사라고 했다. 20여 명의 문화해설사가 돌아가며 월봉서원에서 안내를 한다고 했다.
뜻하지 않은 차 대접까지 받고 나니 남도의 푸근한 인심에 그만 하루쯤 묵어가고도 싶은데 마음이 바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해설사는 굳이 우리를 월봉서원 강기욱 기획실장에게 안내를 해주었고 꼬장꼬장한 호남의 선비인 강실장은
기행 방문 때 특강을 해주겠노라 자청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우리는 '고봉 선생의 생애와 학문'(정병련 저)이란 귀한 책과 서원 안내 리플렛을 한아름 선물 받고난 뒤에야
월봉서원을 떠날 수 있었다. 강진의 윤선도의 고택인 녹우당과 구례의 운조루와 함께 남도 3대 양택 중의 하나로 꼽히는
애일당을 못보고 돌아선 게 못내 아쉽긴해도 바쁜 일정을 소화하려니 어쩔 수가 없었다.
슬슬 허기가 밀려 들며 송정 떡갈비 생각이 간절했지만 길을 재촉하여 부지런히 송정동에 있는 용아 생가를 찾아갔다.
1986년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 13호로 지정된 용아 생가는 광산구 소촌동 어등산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큰 도로에서
표지판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서니 나즈막한 초가지붕과 이엉을 얹은 흙담장이 정겹게 느껴지는 초가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구릉지 아래 꼿꼿이 들어선 아름드리 고목이 본채와 행랑채, 그리고 사랑채를 굽어본다.
용아가 고고성을 울렸을 본채는 돌담으로 쌓은 석축 위에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사랑채는 근래에 복원된 듯 붉은 황토벽이 드러나 보인다.
본채와 사랑채 사이엔 꽃과 나무들이 잘 어울린 정원 그 자체다. 우리나라 현대문학의 기수의 한사람으로
초기 시단을 빛낸 그를 기리기 위해 지방 기념물로 지정, 보존되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박용철은 이곳에서
시창작만이 아니라 고향 사람들에게 개화문명을 소개하고 자주독립정신을 일깨우기도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큰 건물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지만 용아가 유소년기를 보냈을 일제 강점기엔 앞뜰에 서면 황룡강과
영산강이 흐르고 드넓은 농토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을 것이다.
용아는 1904년 8월 이곳 솔머리 마을에서 대지주였던 박하준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충주 박씨 집성촌이었던 터라
일가 친척들이 행랑채에 모여 들어 그의 출생을 축복했다. 위로 두 형이 있었으나 모두 병약하여 집안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터였기 때문이다.용아의 생가는 그의 고조부가 지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용아 생가는 1970년 대 새마을사업으로 시멘트 기와와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량하였던 것을
1995년 문화재 복원 사업을 통해 다시 초가지붕으로 복원하여 관리 보존되고 있다.
본채와 사랑채,행랑채,사당,서재 등이 남아 있다.
박용철은 1904년 이 곳에서 태어나 광주 보통공립학교를 마치고 서울 배재고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아오야마 학원에서 수학 중 시인 김영랑과 운명적인 조우를 한다.
1923년 귀국 후엔 당시 강진에 있던 김영랑과 왕래하면서 시 창작에 전념했다. 김영랑 외에도 정지용.정인보. 변영로.
김윤식 등과 문학동인으로 활동하다가 1930년 순수시 전문지인 '시문학'을 발간하여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
'밤 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등을 발표하여 우리 시문학에 샛별처럼 등장하였다.
당시의 조선문단은 카프(KAPF)계열의 국민문학운동의 영향을 받던 때였으나 용아 박용철은 순수시 운동에 몸을 바쳐
1930년 대의 우리나라 서정시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 박용철 시인의 고향이란 사실 하나만으로도
광주는 문향(文鄕)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밤 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박 용 철
온전한 어둠 가운데 사라져버리는
한낱 촛불이여.
이 눈보라 속에 그대 보내고 돌아서 오는
나의 가슴이여.
쓰린 듯 비인 듯한데 뿌리는 눈은
들어 안겨서
발마다 미끄러지기 쉬운 걸음은
자취 남겨서.
머지도 않은 앞이 그저 아득하여라.
밖을 내여다보려고 무척 애쓰는
그대도 설으렸다.
유리창 검은 밖에 제 얼굴만 비쳐 눈물은
그렁그렁하렸다.
내 방에 들면 구석구석이 숨겨진 그 눈은
내게 웃으렸다.
목소리 들리는 듯 성그리는 듯 내 살은
부대끼렸다.
가는 그대 보내는 나 그저 아득하여라.
얼어붙은 바다에 쇄빙선같이 어둠을
헤쳐나가는 너.
약한 정 후리쳐 떼고 다만 밝음을
찾어가는 그대.
부서진다 놀래랴 두 줄기 궤도를
타고 달리는 너.
죽음이 무서우랴 힘있게 사는 길을
바로 닫는 그대.
실어가는 너 실려가는 그대 그저 아득하여라.
이제 아득한 겨울이면 머지 못할 봄날을
나는 바라보자.
봄날같이 웃으며 달려들 그의 기차를
나는 기다리자.
'잊는다' 말인들 어찌 차마! 이대로 웃기를
나는 배워보자.
하다가는 험한 길 헤쳐가는 그의 걸음을
본받어도 보자.
마침내는 그를 따르는 사람이라도 되어보리라.
용아 생가를 들러보고 우리는 허기진 속을 채울 겸 광주의 오미(五味) 중의 하나라는 송정 떡갈비를 시식하기 위해
송정떡갈비 거리로 차를 달렸다. 광주의 오미란 한정식, 무등산 보리밥, 오리탕, 광주 김치, 그리고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다는 떡갈비까지 광주를 대표하는 다섯 가지 먹거리를 가리킨다. 앞서 가던 전 선생의 코란도가 멎은 곳은
떡갈비의 최강 달인 오명숙씨가 운영하는 '새송정떡갈비' 집이다. 광주 송정동엔 2-0여 개의 떡갈비전문점이
떡갈비골목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 중에도 '새송정 떡갈비'는 30여 년간 떡갈비집을 운영한 노하우와 웰빙트랜드에 맞추어
천여 평의 농장에서 유기농으로 손수 키운 30여 종의 기능성 쌈채소로 손님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는 바로 그집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풍경에 취하고 사람에 취해서 끼니는 건성으로 떼우기 십상인데 떡갈비는 입에 착착 달라붙는 맛이
가히 일품이다.
늦은 점심을 떡갈비로 해결한 우리는 다시 차를 달려 포충사를 찾았다. 의병장 고경명 장군을 모신 포충사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관리들도 이곳을 지날 때엔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고 지나갔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풍전등화 같던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은 물론 아들까지도 나라에 바쳤던 제봉 고경명 장군의 포충사는 나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
몇 년 전, 남구청에서 효사랑 작은음악회 공연을 할 때 나는 포충사 인근의 고경명 장군의 고택에서 하룻밤 묵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4백여 년의 세월을 품은 고가에서의 하룻밤은 내 생애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일들을
회상하며 포충사의 솔밭길을 걷던 시간이 좀더 여유롭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던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포충사에서 전 선생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너무 오래 시간을 뺏는 게 염치 없었기 때문이다. 헤어질 때 전 선생은
두툼한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네주며 집에 도착한 뒤 혼자만 보라고 했다. 그저 책이려니 하고 무심코 받아 승용차 뒷좌석에
던져 놓고 다음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조선대 장미원으로 차를 몰았다.
장미여
오, 아름다운 모순이여, 이리도
많은 눈꺼풀 아래 누구의 잠도 아닌 기꺼움이여
조선대 장미원으로 들어서니 달큰한 장미향이 코끝을 스친다. 이제 마악 피기 시작한 다양한 종류의 장미 사이를
거니노라니 사는 동안 장미를 사랑하고 자신의 며비명에까지 장미를 노래했던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생각났다. 연인인 듯한 젊은이 한쌍이 내게 셔터 한 번 눌러줄 것을 부탁한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 부탁한 사진말고도
배경을 바꿔 한 장 더 찍어주는 선심까지 썼다. 마냥 장미향에 취해 있을 수 없는 현실이 못마땅하지만 어쩌랴.
해는 떨어지고 갈 길은 아직도 먼 것을......
어머니 품처럼 광주를 아늑히 품고 있는 해발 1,178 m의 광주의 진산인 무등산(無等山)엔 태조 이성계와 관련한
일화가 전해진다. 집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꿈을 꾼 이성계에게 대들보와 서까래가 무너지는 것은 임금 왕(王)자에
묻히는 것이니 필시 좋은 징조라며 길몽으로 해몽한 덕분에 무학대사는 왕의 사부가 되어 전국을 함께 누볐다.
무등산에도 들러 3일간 기도를 올리고 산을 내려오다가 이성계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다쳤는데 상처를 살펴보니
팔꿈치와 무릎, 그리고 이마 세 군데에 상처가 생겼다. 이를 보고 무학대사가 이르기를 '아직 기도가 부족하니
3일 간 더 기도를 하라는 예시라며 기도를 권했다. 결국 이성계는 3일 간 더 기도를 한 후에 산을 내려갔는데
그때 자신의 기도를 받아주지 않은 것이 괘씸죄에 걸려 원래 이름인 무악산(武岳山), 서석산(瑞石山)이란 이름을 빼앗고
무등산(無等山)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와는 달리 노산 이은상 시인은 무등산의 무등이 불가의 무유등등(無有等等)에서 비롯되었다는 불교적 해석을 하기도 했다.
그 무등산 서쪽 자락에 천년의 세월을 품은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인 증심사가 있다. 신라 때 철감선사 도윤이
개창하고 1094년에 혜조국사가 중수했으며 조선시대엔 김방이 중수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09년에 네번 째 개창하여 몇 번의 보수를 하여 내려오다가 6.25 동란으로 대부분이 소실되었다가 1970년
대웅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복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광주의 대표적인 사찰로 자리매김 했다.
경내에는 오백전.3층석탑.5층석탑. 오백나한 및 보물 131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등이 보존 되어 있다.
항아리처럼 넉넉한 사람들과 보리밥 먹고
증심사 오름길 걷는다. 튤립보면서 아이가 되고
눈 시린 하늘 보며
오손도손 순한 맘 나누었다
누군가, 네덜란드 같다며 풍차 앞에서
색색 피어 오른 봄 절정이다
낮달도 스미는 몸 바람 소리
옥양목처럼 정갈한 이웃들,둥글다
...... 중략 .....
- 함진원의 '증심사에서' 일부 -
늦은 봄날, 길 양쪽으로 늘어선 나무들의 한층 짙어진 초록그늘을 따라 증심사를 오르는 길은 홀로 가도,
여럿이 함께 걸어도 참 좋은 숲길이다. 입구에서 증심사까지는 약 1.4KM. 산보 가듯 여기저기 눈길 놓으며 걷다보면
어느덧 절 입구에 닿는 길이다. 여기저기 피어난 들꽃들의 꽃빛에 취하고, 향기에 젖어 걷다보면 김종삼 시인의
'나의 본적'이란 시의 한 구절을 패러디 하여 ' 숲은 나의 본적'이라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시(詩),서(書).화(畵) 삼절의 화가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증심사 오르는 길에 광주가 예향으로 불리는데 크게 기여한 의재 선생을 기리는 의재미술관이 있다.
의재미술관은 남종화의 대가인 의재 허백련 선생의 예술혼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미술관이다.
' 풍경 속의 미술관'이란 컨셉에 맞추어 무등산 등산로의 지형적 요건을 잘 살려 친환경 공법으로 지어진
건축가 조성룡의 작품으로 2001년 제 10회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기도 했던 건물이다.
한국 남종화의 대가로 꼽히는 의재의 화법은 소치에게 있다고 한다. 세필을 싫어하고 형상보다
뜻을 더 중요시 했던 소치의 맥을 이은 의재는 화찬을 더 중요시 하여 화찬을 정한 후에야 붓을 들었다.
이것은 문인화의 시,서,화 삼절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시와 서를 우위에 놓았던 때문이다.
의재필선(意在筆先)이란 말이 있다. 붓을 들기 전에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는 게 우선되어야 한다는 게
그 뜻일 게다. 잣나무를 그리려면 잣나무의 형상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잣나무의 형상이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할 뿐, 마음 속에 푸르른 잣나무가 서 있지 않으면 백 그루,천 그루의 잣나무를 그린다해도 그것은
그저 헐벗은 낙목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1891년 11월 2일, 진도군 진도면 쌍정리에서 태어난 의재 허백련은 남종화의 전통을 굿꿋이 지켜온 대가로서
75년의 긴 작가 활동을 통해 1만여 점에 이르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의재미술관 주변엔 '시는 형체가 보이지 않는 그림이고, 그림은 말을 하지 않는 시'라고 했던 의재 선생과
관련한 유적들이 많이 있다. 무등산 증심사 계곡을 건너 춘설헌과의 갈림길에서 더 작은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단정한 봉분이 아름다운 의재의 묘가 있다. 의재가 생전에 아끼던 무등산,차, 나무 그리고 사람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이다. 이 묘소 아래쪽엔 관풍대가 있는데 의재 선생이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만남의 장소이다. 관풍이란 논어에 나오는 말로 '세상을 본다', '시류를 본다'는 뜻이다.
관풍대 위쪽의 미술관 맞은 편엔 춘설헌이 있다. 의재 선생이 30년 동안 기거하면서 화실로 사용했던
작은 건물이다. 석아 최원순 선생과 오방 최홍종 목사가 머물렀던 터에 의재가 새로 집을 지어
오늘에 이르게 된 집으로 1986년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된 역사 유적이다. 그 외에도 의재미술관 뒤로 돌아
10여분 쯤 올라가면 선생이 직접 가꾸던 녹차밭인 춘설다원이 있는데 무등산록의 맑은 바람과 산의 정기를 받고 자란
춘설차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의재 선생은 시서화 동호인의 모임인 '연진회'를 조직하여 광주가 예향으로 자리매김하는데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그림 외에도 해방 후엔 피폐된 농촌진흥을 위해 농업학교를 설립하여 지도자를 양성하기도 하였고
애천(愛天). 애토(愛土).애인(愛人)의 삼애사상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1977년 그림을 그렸던 손에 붓을
쥐어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의재 선성은 한국문인화의 품격을 모두 갖춘 도인이자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림을 그리되 기교로 그리지 않고 자연과 인간사랑을 묵직하게 녹여냈던 화가 의재 허백련.
광주 여행길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오동꽃이 뚝뚝 떨어지는 증심사를 내려와 우리는 망월동으로 차머리를 돌리며 32년 전의 봄을 생각했다.
5.18! 32년 전 오늘, 이 곳 빛고을 광주에서 절대 일어나서는 안될 비극이 발생했다. 국립 5.18 민주 묘지로 가는
도로 양옆으로 줄지어 걸린 만장들이 그날을 잊지 말라는 듯 바람을 타고 있었다. 바람에 울부짖듯 펄럭이는
만장들을 보며 5.18은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란 생각을 했다. 아직도 1980년 5월의 '그날'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떄문이다.
5.18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민주화의 상징으로 자리잡았지만, 동시에 군사독재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현대사의 암울했던 단면이자 상처이기도 하다.
고통 속에서 꽃이 피듯 5.18의 아픈 상처는 임철우의 '봄날', 최윤의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같은
문학작품으로 태어났고, 나아가 '꽃잎', '화려한 휴가' 같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마침 32주년 5.18 기념일이어서 망월동은 참배객들로 북적였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5.18 32주년 기념 시화전'을
알리는 현수막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전시된 시화를 찬찬히 돌아보고 싶었지만 묘역 입구에 선 5.18 묘지
준공 기념비에 새겨진 문병란 시인의 헌시를 가슴으로 읽는 것으로 만족하고 서둘러 묘역으로 가는 민주문을 들어섰다.
해와 달이 빛나는
의혈의 고장 빛고을
여기,
5월의 풀뿌리 꽃넋들 누워
민주의 제단에 횃불로 타오른다
불의를 무찔러 정의의 칼이 되고
고운 피 흘려 사랑의 꽃을 피운
그 이름 영원한 정의의 불사조
천추의 그 기상 무등을 겨루리라
만고에 그 업적 길이길이 푸르리오
찬란히 타오르는 5월의 불꽃이여
빛나는 영원한 민주의 깃발이여
- 문병란의 '헌시 ' -
시간이 많지 않아 망월동 묘역을 찬찬히 돌아볼 수는 없었다. 민주의 문을 지나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돌다리를 건너 민주 광장에 들어서니 마침 추모음악회 준비로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다. 광장 초입에
다섯 개의 원이 있고 18 그루의 느티나무가 5.18의 묘역임을 일깨우고 참배광장에는 32년 전 5.18의
10일 간의 민중항쟁이 파노라마식으로 기록된 쥐와 돼지가 빠진 12지신상이 서 있다. 5.18 민주 묘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높이 40미터의 추모탑이다. 우리나라 전통 삭조물인 당간지주를 현대적 감각으로
형상화 한 두 개의 사각 기둥을 세우고 탑신의 중앙에 달걀 모양의 난형환조의 조형물이 있는 추모탑엔
구천을 떠도는 5.18의 영령들이 무등산의 아침 햇살을 받아 새 생명으로 부활하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참배광장 오른 편엔 전통 고분 형태를 응용한 유영봉안소가 있고, 추모탑 뒤로는 5.18 희생자들의 묘역이다.
묘역엔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과 사진, 그리고작은 태극기가 이 곳이 국립묘지임을 일깨워준다.
묘비 우측엔 생년 월일과 사망일시가 새겨져 있는데 희생자들의 나이를 헤아려보니 대부분이 나와 비슷한 연배다.
'정직한 사람과 미인에겐 세월 외엔 두려울 게 없다'는 말이 있다. 거짓 없는 삶 앞엔 두려울 게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말이지만 뒤집어보면 세월만큼 두려운 게 없다는 말도 된다. 벌써 서른 번도 넘게 봄이 다녀갔다.
아직도 상처를 끌어안은 채 그날을 살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5.18 광주 민중항쟁을 잊어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자주. 민주. 통일의 전통을 계승하고 한국 현대사
속에서 민주주의 발전사에 불멸의 금자탑을 세운 5.18의 희생자 묘역을 빠져나오는데,32주년 기념 시화전에서
보았던 시 하나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로부터 서른 번도 넘게 꽃이 피었다 졌으나
고 성 만
열아홉이었던가
스물이었던가
너를 만나 여행 갔었지 바닷가 근방
파도에 밀려온 배처럼
뚝뚝 모가지 꺾고 떨어지던
동백 그늘에 서서 입을 맞출까 말까
망설이고 또 망설이는 동안
그 붉은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
화염 구덩이에 몸을 던진 친구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나라로 가버린 친구
화인에 찍혀
내내 신음하던 친구
무서웠던 게지
두려웠던 게지
그로부터 서른 번도 넘게 꽃이 피었다 진 올해 봄
혼자 가는 여행은
내 안에 너를 가두는 일
오래 숙성해 둔 술병을 따서
조금씩 혀를 대어보는 일
강물 따라
산길 따라 굽이굽이 풀리는 기억 속으로
나무의 군락 보호하는 철책 속으로 들어갔는데
그 곳에서
무슨 일 있었던가
꽃 모가지 떨어진 자리가 여태 축축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