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권일송의 순창
글 : 백승훈
황청원 시인은 ‘바람 부는 날이면 모든 길은 바다로 간다’고 했다.
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바람의 기운이 살아나기 시작하면 내 안 깊은 곳으로부터 오롯한 길 하나가 떠오르곤 했다. 그 길의 시작은 늘 내게서 시작되곤 했지만 그 길은 수직의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 넝쿨처럼 이리 뻗고 저리 갈라지면서 마구 엉키어 그 끝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일단 길이 한 번 떠오르면 횟배 앓는 아이처럼 처음엔 속이 더부룩해지다가 끝내는 아랫배가 싸르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 증상은 떠날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심해져서 종내는 입맛까지 잃어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도 일단 길 위에 서기만 하면 신기하리만치 그 모든 증상들이 한순간에 눈 녹듯 사라지고 잃었던 입맛이 다시 살아나곤 했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두고 지독한 역마살이 끼었다고도 말하지만 내게서 길이 떠오르던 때를 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내가 속한 세계와의 불화가 극점에 달했을 때였던 걱 같다. 그러니까 내게 있어 길을 떠나는 것은 일탈인 동시에 나를 견디기 위한 자연스러운 보호본능의 발현과도 같은 것이었다.
새로 맡은 문학기행의 길라잡이라는 책임감이 나를 짓누른 탓일까? 권일송 시인의 흔적을 찾아서 전라북도 순창으로 답사를 떠나던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년 전에 보았던 강천산의 애기단풍이 고왔던 기억이 너무도 선명하여 덜컥 첫 기행지를 순창으로 정하긴 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쉽게 감이 잡히지 않아 적잖이 속앓이를 했던 터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순창문협 지부장으로 계신 장교철 시인과 연이 닿아 답사 안내를 언질 받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풍경은 때로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우리가 침묵하면서 풍경을 고요히 응시하기만 하면, 때로 삶의 풀리지 않던 문제들이 그 해답을 얻는다." -류시화-
순창으로 가는 동안 나는 류시화 시인의 말을 떠올리며 차창 너머로 펼쳐지는 갈빛이 깊어진 남도의 풍경 위로 눈길을 던졌다.
세상에서 얻은 이름이라는 게 기껏해야 헛묘 한 채에 지나지 않는 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종종 그 이름에 연연해하곤 한다. 하지만 조금만 눈여겨보면 도처에서 우리는 자신만의 삶의 향기를 피워 올리며 지극하게 살다간 이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순창 출신의 권일송 시인도 그가 이룬 문학적 성취에 비해 세인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문인이다. 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그의 이름만 듣고는 누구지? 하다가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라는 시의 제목을 얘기하면 아! 하고 무릎을 치게 되는 그런 시인이다.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권일송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떠오르는 천년의 햇빛
지는 노을의 징검다리 위에서
독한 어둠을 불사르는
밋밋한 깃발이 있다
어슬어슬 저무는
12월의 편지와 함께
열일곱 소녀의 더운 눈길 같은
방황하는 세월의 종이 울린다
아직도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채
허구한 날의 곤한 날개와 파도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불빛도 없이 치닫는 열차 안에서
파아랗게 파아랗게 야윈 넋이여
토요일의 밤별과 빛바랜
轉落의 창에 기대어
당신은 결코 죽음도 두려움도 모르는
어느 巨木의 슬픔으로 서 있을 것인가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눈을 열면 심상치 않은 유린의 바람
그것은 외진 벼랑을 타고
미끄러져 내리는 살의와 이방의 꽃
짐승들의 머리 푼 주검이
놀에 비낀 텅 빈 광야의 한 때
허물어진 금관의 둘레만큼이나
아스라히 저무는 가장 인간적인 것
무더운 원색의 여름날
땀 흘린 도주의 난간 위엔
처형을 기다리는 문명한 달과
디모크래시의 피 벌은 함성이
묻어나 있다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스치는 바람결에 목을 늘여
만세록을 펼치고
서로의 더운 맨가슴을 마구
부비노라면
하나같이 열병을 앓는 사람들
포탄처럼 터지는 혁명의 夕刊 위엔
노상 술과 노래와 여자가 넘쳐난다
誤診된 세대와 짓밟힌 청춘을 위한
나는 애인과 집을 잃고
영영 돌아오지 않은 편지와 함께
장미의 5월을 울음 울고 나면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伐木 당한 수풀에 누운 달빛
古阜에 울린 동학의 말발굽 소리
뗏목으로 흐르는 어느 해
비
한여름의 통곡을 귀에 걸고
한 마당 징소리를 울릴 양이면
無頭鬼의 무덤에
비 내린다
비 내린다
지금은 병든 動詞와 港口
미친 듯 술래 잡는 목마의 꿈을 베고
기약도 없이 저무는
나의 호적과 詩集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천년 바람 미친 듯 휘몰아치고
어깨에 쌓이는 아픈 세월의 껍질
지나쳐 가는 온갖 사랑의 되풀이
화살처럼 허공을 꿰뚫는
이카루스의 황금빛 날개여
도는 구나 세상이여
다섯 마당 여섯 마당... 열 마당 째
돌고 도는 구나 이승의 인연들이여
끝끝내 나의 사랑 先史의 하늘
타는 불씨를 땅 속 깊이 묻을 양이면
비에 젖는 공화국 헌법 제1조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1933년 순창읍 가남리 가잠마을에서 출생한 권시인은 전남대 공대를 졸업하고 목포 문태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1957년 한국일보에 ｢불면(不眠)의 흉장(胸章)｣, 그리고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강변 이야기｣가 각각 당선되어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했다.
『전남매일신문』 논설위원과 한국문인협회 시분과장, 한국현대시인협회 부회장, 한국펜클럽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1995년 지병인 간경화로 세상을 뜨기까지 왕성한 활동과 필봉을 펼치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
1960년 전남문학상(1960), 1983년 소청문학상, 1985년 현대시인상 등을 수상했으며 1966년 첫 시집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를 간행한 이후, 『도시의 화전민』(1969), 『바다의 여자』(1982), 『바람과 눈물 사이』(1987) 등의 시집을 간행하였고, 시 이외에 평론 ｢시정신과 산문정신｣(1975), ｢우리 시와 시대 상황｣(1986) 등을 발표하면서 『한국 현대시의 이해』(1981), 『윤동주 평전』(1984) 등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또한 수필집으로는 『한해지(旱害地)에서 온 편지』(1973), 『생‧왜 사랑이어야 하는가』(1987) 등이 있다. 그와 함께 작품 활동을 시작한 동시대의 시인들이 대부분 전통적이거나 자연친화적인 경향으로 기울었음에 비해, 현실적이고 시사적인 사건들에서 소재를 즐겨 취하여 그것을 풍자‧비판하는 주지적 시풍을 견지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를 이 땅의 시인으로 살게 한 신춘문예 당선작 2편을 잠시 감상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강변 이야기
권일송
외치는 것도 아닌-, 그러나, 마자, 너와 나의 뼈마디에 흐르는, 어느 날 부터서인가, 선사로부터 열리는, 긴, 긴 -어느 날, 밤의 이야기
바람도 멎어가는 사슴이 우는 모퉁이, 골짜기 침실의 밀어를 건드리고, 들뜬 마음, 외딴 길에 버선 젖은, 청상을 달래우기엔, 아직도 먼-날, 영원한, 수고.
눈을 감고, 거먹―한 흔을 밟고 서면, (마음은 부푸는 전쟁과 평화)-예-나, 제-나, 근원을 몰으는 채, 물 흐르는 기슭에서, 사내처럼 죽어간, 고것들을 쌓고 도는, 꽃밭으로 널려있는 그 무수한 이야기들.
흐르는 너의 곁, 바구니를 멀던져 놓고, 얼마를 엎디어, 가시내는 울어 있어도, 갈대밭은 저이끼리 정다운, 사상하는 의미들, 그것인가.
이제는 어느 노여움도 가신 땅,
신라와 아사달이, 숨 쉬는 골에,
돐이 만에 돌아온 누나여......
생활은 그렇게도 먼-디서, 더디 오는 걸음.
늬, 눈을 감고, 피곤한 온갖 얼굴들아, -오월의 윤무를 잊은채, 고달픈, 하루의 아버지
약풀이 돋아나는, 곳이야 어디이건 물어, 시방 상관없는, 이, 흐르는 지리를, 딛고서면, 두 눈 뜨고 맞손 잡아, 다시는 에라하, 나뉘이지 않을, 기약의 강변.
불면의 흉장
권일송
그날로부터 묻어두고, 생각하는 것은,
오직, 제 스스로의 분노에, 이빨을
물어, 불면의 밤을 지니는 것.
점성의 왕자가 잠 못 이루는
그러한 요적이, 이것인가-
산 같은 해일이 밀려간 후일에
씨앗 한 톨, 키우지 못한, 음락의 주변
어제는, 저쪽 담이 헐리우고,
오늘은, 이켠 돌이 밀리워.
쥐들도 다니는 외딴 역에서, 황가
박가들은, 어인염치도 없는 싸움뿐.
바람은 오히려, 제 육신에 오는 귀열을, 허허 벌판에서
울어 보내고,
이윽고, 시인의 가슴에 안겨 오는, 찢기운 조국
꽃이 이운 한 낫, 벌레울음도 그친, 밋밋한 돌담 틈에서, 어느 때 부터선가, 물이랑은 이는 것. 소리도 없이, 아픔을 느끼는 억울함에 산다. 울음뿐인가-그것뿐인가
형들은 아우를 위해, 더욱 착한 나무로 서고, 누이는 오빠를 아껴, 더욱 깊은 지혜에 누우라. 우리와 더, 크게 이웃하는 욕정이, 찢기운 표상아래. 머-ㄹ리 기를 묻는다.
가슴팍이 채이워, 피를 토한 채로다.
의미도 없는 색상들이 퍼덕여오는, 그것은 너, 우직한손
울리리라. 바다와 같은 바다는, 기어 열리리라. 부르며,
불리우는 형제와 같은 소리.
미쳐 돌아가는 용녀의 춤을 멎게 하는, 천동의 한바탕은 울려야 했을 게다. 그날로부터 묻어두고 생각하는 것은 ...불면은 오히려, 출발에 가까운 시간.
60년대 신춘문예로 등단한 신세훈, 강인섭, 이근배, 박이도, 강인섭, 장윤우, 김원호, 신명석 등과 함께 동인지 “新春詩”를 만들어 왕성한 시작 활동을 하기도 했던 권일송 시인은 살다간 세월만큼이나 남겨진 추억과 일화(逸話)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다. 그 중에도 서울 청진동과 무교동에서 <흑산도>라는 홍어 횟집을 차렸던 일은 많은 문인들의 입에 회자된다. 그가 운영하는 흑산도엔 많은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드나들었고 주머니가 가난한 문인들이 붐빈 덕에 마음씨 고운 주인은 끝내 운영난으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여성 문인들에겐 남달리 친절했던 탱고의 명수였다. 적잖은 여성 문인들이 그와 함께 탱고 리듬에 몸을 실었다고 한다. 그의 여섯 번째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바다 위의 탱고’라는 시를 감상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바다위의 탱고
서해안 안면도의
여름 바다는 눈 부셨다.
바람에 섞여
맨 발로 밟아보는 모래알
사흘 밤 사흘 낮이
순간의 음악에 머무르고
포도 알이 매달린 방안에서
뜨거운 감자를 입에 물었다.
노수민이 발리섬으로
울고 떠난 해안선
수풀 속에 둘러앉은 시인들은
밤새껏 은쟁반을 굴리고
여인은 내 앞은 허리에
지압을 베풀었다
오오, 베로니카여
그때 파도 빛깔의 졸음이 쏟아졌느니
신 새벽 닭울음소리 황해를 건너고
두엄 냄새 속에서
꽃지의 밤은 무르익었다
갈매기는 끝내 바다를 버리고
하늘에 몸을 숨겼다
가슴에 부활의 술잔이 넘치던 날
우리는 이별이 없는
손수건을 흔들고
잃어버린 탱고를 되찾기 위해
나는 휘어진 허리를
바다에 내 던졌다.
그는 탱고의 명수였지만 그의 생은 4분의 2박자의 탱고리듬처럼 경쾌하지만은 않았다. 일찍이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고 고백했던 그는 끝내 술을 이기지 못해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바다 위의 탱고’ 시집 서문에서 두 번의 자살과 일곱 번을 절망했다고 적었다. 다음은 1991년 11월 새 시집 책머리에 쓴 권일송 시인의 말이다.
나(裸身)의 고백(告白)-
내게도 잃어버린 시간은 소중했다.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참고 기다려온 세월이었다.
7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두 번의 자살과 일곱 번을 절망했으며 그저 덤으로 사는 느낌으로 여기까지 왔다. 처음부터 내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밤을 절망의 술잔을 기울여왔던가.
시는 나의 마지막 유산(遺産)이었다. 더 갈 데 없는 좌절과 불안을 감싸준 자궁(子宮)이었으며 소멸에서 재생으로 이끌어준 힘의 원천이었다. 온갖 냉대와 불이익이 퍼부어준 가운데 허허로운 등을 스스로 쓰다듬으며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는 바로 시의 공간과 그 열쇠가 마련해준 것이었다. 진흙탕 속에서 용케도 살아남았다.
줄곧 찬밥을 먹고도 배탈이 나지 않은 건 오로지 어머니가 물려준 튼튼한 위장 탓이었다. 80년대 초 세 번째로 엮은 <바다의 여자>이후, 나는 줄기찬 변신을 시도했다. 제4.5시집<바람과 눈물사이>에 이은 <비비추의 사랑>은 종래의 체질에서 크게 벗어나 실험적 변신의 성공을 시사(示唆)해준 것이었다.
적어도 평단의 반향은 그러한 것이었다.
90년대는 내게도 결정적인 년대가 될 것이다. 자연 연령도 그렇고 시에서 거는 패기와 의욕도 그럴 것이다. 여기 제6시집 <바다위의 탱고>를 펴내는 것도 그런 뜻에서 내 딴에는 큰 의미를 지닌 것이다.
108편의 시를 접하며 인간의 백팔번뇌(百八煩惱)를 생각했다.
.............. (중략).............
뼈를 깎듯이 외로운 잠자리였다.
이따금 내가 부는 휘파람이나 노래는 절반이 한숨이고 마시는 술은 거의가 눈물이었다.
................ (하략) ................
시인의 양심으로는 온갖 비리가 난무하는 황량한 세상에서 술은 내일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시대의 어둠을 견디는 마지막 묘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풀잎’이란 시에선 ‘늘 깨어 있는 한 방울의/술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적기도 했다.
풀잎
권일송
그리운 이의 눈 속에 들어가서
그 눈 속의 우뚝한 무덤이 되고 싶다.
무덤에 돋아나는 엉겅퀴와
가느다란 몸살의 햇빛
그리운 이의 눈 속에 들어가서
늘 깨어 있는 한 방울의
술이 되고 싶다.
뺏고 빼앗기는 마음의 줄다리기
실상 사람의 말씀은
죽음 속에서 돌아눕는
조용한 풀잎의 새벽
언제까지나 외로운 이승의 뱃길
글썽한 눈물로 풀이하는
내 마음 깊은 곳
서걱이는 갈대의 숲.
읍내에서 만난 장교철 시인은 우리를 자신의 승용차에 태우고 한참을 달려 적성강변의 메기매운탕집으로 안내했다. 섬진강 상류인 적성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옆에 끼고 얼큰한 매운탕으로 배를 채운 우리는 권일송 시인의 시비가 서 있는 남산대로 향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며 시인의 시비가 세워지기까지의 후일담을 들었다. 너른 강에 거대한 다리를 놓는 것보다 조그만 돌로 된 시비(詩碑) 하나 세우는 일이 몇 곱절 힘든 천민자본주의를 성토하기도 하고 척박한 문학 환경에 대해서도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권일송 시인의 시비는 당시 순창문협을 이끌며 향토문학을 일구던 장교철 시인이 군청과 중앙 문단을 뛰어다니며 노력한 결과물인 셈이다.
점차 숨이 가빠올 무렵 남산대 정상에 다다르니 아담한 시비 하나가 선뜻 눈에 들어온다.
공원 팔각정 옆에 서 있는 시비는 성신여대 미술과 장윤우 교수의 설계로 반딧불이 형상으로 조각된 화강석 위에 권 시인의 시 ‘반딧불’의 일부가 이근배 시인의 글씨로 조각되어 있다.
반딧불
단순히 사랑만을 노래하기엔
하늘은 너무나 깊고 푸르렀다
끝 모를 무명(無名)의 들판에
훨훨 나는 새의 모습으로
영원의 모서리에 닿는다
땅위에 영그는 작은 열매들은
저마다 평화로운 식탁 둘레에
노동의 새벽을 열어 주나니
하늘에게 가는 목숨이야
어디 날개 달린 새 뿐이랴
모시 수건으로 정갈히 닦아낸
쟁반위의 밤하늘엔
반딧불로 어지러운
떠돌이의 고향이 보인다.
시비 옆의 산수유의 빨간 열매가 눈을 찔러왔지만 우리는 시월의 짧은 해를 탓하며 서둘러 솔 숲 사이 오솔길을 걸어 ‘귀래정(歸來亭)’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노송 숲 사이에 자리한 귀래정은 신숙주의 동생인 신말주(申末舟)가 그의 호를 따 세운 정자로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67호로 지정되었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부귀와 영달을 꾀한 형과는 달리 낙향하여 은둔생활을 했다는 곳이다.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왔음직한 귀래정이 있는 순창은 그의 부인 설씨의 고향이다. 신말주는 이곳으로 내려와 뜻이 통하는 노인 열 명과 ‘십노계’를 결성하고 이 정자에 올라 시문을 지으며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서거정 강희맹등의 귀래정기와 각종 시문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는 정면 세 칸, 측면 두칸의 팔작지붕 구조의 지금의 정자는 1974년에 고쳐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귀래정 아래 노송 사이로 신말주후손세거지가 자리하고 있다. 이 곳은 신말주 선생의 부인이었던 설씨부인이 권선문첩을 짓고 호남 3천재로 불리웠던 조선 중기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권선문첩은 조선 단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문신으로 활약한 신말주의 부인 설씨가 선(善)을 권장하는 내용을 담아 쓴 글과 그림이 있는 문서다.
권선문첩은 조선 단종(端宗)에서 성종(成宗)에 걸쳐 문신(文臣)으로 활약한 귀래정(歸來亭) 신말주(申末舟)의 부인(夫人) 설씨(薛氏)가 지은 권선(勸善)하는 글과 그림이 있는 고문서(古文書)이다. 내용은 설씨가 남편과 함께 이곳 전라북도(全羅北道) 순창(淳昌)에 있을 때, 이 고장의 명승지인 강천산(剛泉山)에 강천사(剛泉寺)를 복원하기 위해 신도(信徒)들에게 시주(施主)를 얻고자 권선문을 짓고 사찰도(寺刹圖)를 그려 돌려보게 했던 것이다. 붉은 종이를 이어붙인 16폭의 절첩(折帖)으로 그중 14폭은 권선문이고 나머지 2폭은 사찰의 채색도(彩色圖)가 그려져 있으며, 뒷면에는 후손들의 가전서찰(家傳書札)과 권선문에 관한 글이 있다. 그리고 성화(成化) 18년 (1482) 7월 정부인(貞夫人) 설(薛)이라는 연대(年代)와 인장이 찍혀 있다. 조선시대 여류(女流)의 필적(筆跡)으로 가장 오래되었고, 사대부(士大夫) 집안의 정부인이 쓴 불교(佛敎) 인과법(因果法)에 의한 글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를 더 해 주고 있다.
귀래정에서 가까운 가남리 가잠마을에 권 시인의 생가가 있다. 이 집 안주인은 시인의 형수가 되는 분인데, 고추장으로 유명한 이기남 할머니다. 이 마을은 안동 권 씨의 집성촌으로, 집은 오래된 한옥이었으나 대청마루가 시원스럽고 대문 밖으로 펼쳐진 문전옥답이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서둘러 길을 떠난 덕분에 장시인과 만나기로 한 12시까지는 몇 시간의 여유가 있었으므로 그 짬을 이용하여 강천산의 애기단풍을 만나러 갔었다. 예로부터 호남의 소금강으로 불리던 강천산은 옥천골이라 불릴 만큼 맑은 물이 흐르는 순창의 명산으로 1981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순창읍에서 정읍 방향으로 10km쯤 가면 강천사 입구 도선교에 다다른다. 이곳으로부터 8km나 이어진 계곡은 천인단애를 이룬 병풍바위 아래 벽계수가 흐르고 폭포와 소를 이룬 곳이 10여 군데나 된다. 시오리가 넘는 계곡 안에 병풍폭포,용바위,구장군폭포,투구봉,호두암,금강굴,용소등과 광덕정.홍화정의 정자와 삼인대 등 명소가 가득하다. 강천산은 산세가 웅장하거나 높은 편은 아니나 계곡이 깊고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흘러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데 특히나 가을 단풍은 설악산이나 내장산의 단풍에 못지않다.
강천산 입구에서 1.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강천사는 신라 진성여왕 때 풍수지리설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한 도선국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이다. 절까지 오르는 길은 맨발로도 걸을 수 있도록 모래를 깔아놓았다. 좌우로는 순창고추장보다 더빨간 애긴단풍이 터널을 이루고 길 아래로는 시리도록 맑은 계곡물이 바위 사이로 흐른다. 도선교 앞에 이르자 오른쪽으로 사십여 미터 높이의 깎아지른 수직의 절벽에서 백설 같은 폭포수가 시원스럽게 떨어지고 있는 것이 보기 드문 장관(壯觀)이다.
절 바로 앞에는 삼인대(三印臺) 비(碑)가 세워져 있다. 조선조 중종 10년(1515년)에 순창군수 충암 김정(金淨), 담양부사 눌재 박상(朴祥), 무안현감 석헌 유옥(柳沃)이 강천사에서 만나 관인을 걸어놓고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선비복위상소를 올려 선비정신을 발휘했던 삼인대 사건은 순창이 충절의 고장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삼인대를 돌아보며 나는 문득 반정군이 벌떼처럼 궁궐로 밀려들어오던 영화 ‘왕의 남자’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왕의 남자’는 장인을 죽이고 아내를 내친 조선 왕실의 비극적 운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반정이후 중종이 되는 진성대군의 아내였던 단경왕후 신씨는 남편이 왕이 된지 이레 만에 중궁의 자리에서 폐위된다. 단경왕후는 중종 때 처형된 신수근의 딸이었고, 신수근은 여동생이 왕비가 된 연산의 척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궁에서 쫓겨난 단경왕후는 첫사랑을 못 잊어 경회루를 배회하는 중종의 소문을 듣고 궁궐에서 잘 보임직한 인왕산 너럭바위에 붉은 치마를 펼쳐 놓아 애끓는 그리움을 전하고자 했다. 그때 그녀의 붉은 그리움을 펼쳤던 너럭바위는 지금도 치마바위란 이름으로 인왕산에 주저앉아 있다. 삼인대의 의인들이 목숨 걸고 올린 ‘선비복위상소’란 다름 아닌 이 단경왕후 신씨를 복위코자 한 상소였던 것이다.
장시인은 다시 차를 몰아 메타쉐콰이어 가로수 길을 지나 팔덕면 산동리에 있는 남근석(男根石)이 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민속자료로 지정된 남근석은 높이가 내 키보다도 훨씬 큰 화강암에 연꽃잎과 봉오리 및 줄기가 양각 되어있어 안내서의 표현대로 ‘남근이 발기된 모습’을 늠연(凜然)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때 마을 청년들이 남우세스럽다는 이유로 이 남근석을 쓰러뜨렸다는데 마을의 우물이 말라 다시 세웠다고 한다.전설에 따르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정월보름날 이곳에 와서 치성을 드리면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순창은 풍수지리상으로 음기가 강한 곳이어서 곳곳에 남근석을 세워 음양의 조화를 맞추었다는 장시인의 설명이다. 마침 ‘산동리 남근석’이란 장시인의 시가 있어 옮겨 적는다.
산동리 남근석
장 교 철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남이나
나와 가장 멀리 있는 그대는
광덕산 넘어온 꽃바람에
잠 못 이루고 온 밤 뒤척이다
달디 단 과육 적시는 뜨거운 밤
발돋움하여 세상 다시
세울 힘을 생각하면
가볍게 저지를 수 없는 몸짓이기에
땅 속 깊은 곳에서부터 피워낼
이름이고 싶다
남도의 여행길은 시간이 늘 아쉽다. 마음 같아선 하루쯤 묵으면서 천천히 돌아보고 싶은데 사정이 여의치 못하니 발걸음을 재촉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서둘러 구암사로 향했다. 구암사로 가는 어느 길목에선가 순천문협회원인 곽현옥 시인과 합류하여 저 멀리 문필봉이 바라보이는 영구산 구암사를 오른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느라 공연히 숨이 차다. 우리를 제일 먼저 맞이하는 것은 절집 앞의 거대한 은행나무다. 이제 마악 단풍이 들기 시작한 은행나무는 1392년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와 새로운 왕조의 전청을 염원하며 심은 나무라 한다.
백제 무왕 35년(627)숭제법사가 창건하여 조선 태조 원년(1392) 각운선사가 중창 하였으나 6.25 전쟁 때 전소되었던 것을 1957년부터 복원하였으며 2000년엔 이 곳에서 월인석보 제 15권이 발견되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구암사란 절 이름은 절 동편에 숫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고 대웅전 밑엔 암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어 구암사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구암사는 예로부터 유명한 대종사들이 주석했던 곳으로 영조 때에는 화엄종주인 설파대사가 주석하셨고 그 이후 100여년 동안 화엄종맥의 법손이 계승된 사찰이다. 추사 김정희가 쓴 백파율사대기대용지비(지방문화재 122호)는 제자들에 의해 대대로 구암사에 보관되어 오다가 율사의 출가 본사인 선운사로 보내져 세워졌다고 한다. 이곳을 거쳐 간 문인으로는 이광수 서정주, 신석정. 조지훈 등이 있다.
구암사를 내려와 찾아간 곳은 작은 들꽃카페였다. 들꽃향기 산장이란 원목 간판 아래 문패처럼 달린 시인의집이란 글귀가 눈길을 끌었다. 이 들꽃카페 주인장인 오영숙 시인도 순창문협회원이다. 이 들꽃산장의 대표차인 쌍화차로 하루의 피로를 달래며 잠시 이야기꽃을 피우고 돌아서려니 들꽃들이 발길을 놓아주지 않는다. 아, 이 지독한 꽃사랑이라니!
다색 다양한 이름 모를 들꽃들 지천으로 피고
밤사이 내려앉은 진주이슬
아침 햇살에 꽃 무지개 서네
가냘픈 허리 작게 이는
바람에도 요동을 치니
흩날리는 꽃나비
파닥이는 날갯짓에
들꽃향기 추령골에
하늘가득 퍼지네
-오영숙 시집 ‘들꽃향기’중에서-
전라북도 최남단에 자리하여 그 흔한 기차역 하나 없는 순창은 산자수명의 고장이지만 그 어느 것도 ‘순창 고추장’의 명성을 대신하지 못한다 .순창 고추장이 유명해진 내력을 알려면 먼저 회문산의 만일사로 가야 한다. 만일사가 있는 회문산은 영산으로 불릴 만큼 신비로운 산이다. 동학혁명과 구한말 의병들의 근거지였으며 6.25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의 근거지였다. 80년 대 발표된 이태의 수기소설 ‘남부군’을 소재로 한 동명의 영화의 배경이 되면서 남북간 이념 대립의 현장으로 더 많이 알려진 산이 회문산이기도 한다.
정지영 감독이 연출한 ‘남부군’이란 영화를 보면 빨치산대원 중에 김영(최민수 분)이란 시인이 나오는데 빨치산 시인 김영은 실존인물이다. '시집을 들고 전쟁터로 나가는 병사가 제일 먼저 총 맞아 죽고, 시집을 끼고 후방을 거니는 여자애가 제일 먼저 변심한다는 말이 있는데 1929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1950년 회문산에 입산하여 빨치산 활동을 하였던 김영은 죽지 않고 포로로 잡혀 1952년 4월 광주수용소에 입소, 1960년 12월 마산교도소에서 가출옥한 뒤 영등포에서 과일노점상으로 생계를 꾸려가며 1988년 시집 '깃발 없이 가자'를 출판하기도 했다. 그의 시를 찾기 어려워 장 시인에게 부탁을 하였더니 귀한 시 몇 편을 보내주셨다.
잃어버린 단어 -통일
김 영
시를 잃었듯이
사랑을 멀리했듯이
까마득하게 잃어버린 단어가 있습니다
잎은 우거지고
새들은 다시 날아와 노래하건만
애써 가슴 한구석 깊은 곳에
귀금속인 양 묻어둔 이 한마디
독일과 남아공 캄푸치아 팔레스타인
분단과 압제에서 신음하는 민족들이
일어서다가 넘어지고 넘어져서는 일어나
목이 쉬도록 외치고 죽어간 한마디
잔디를 밟고 가듯
돌멩이를 차고 가듯
애써 잊어버린 단어가 있습니다
한번쯤은
김 영
육십 평생에 한번쯤은
나의 고목에도 꽃이 필 수 있을까
꼭 한번쯤은
종다리 되어 하늘을 날고
파란 보리밭에서
뒹굴어보고 싶다
한번쯤은
꿈에라도
한라산 기슭에서 백두산 꼭대기까지
달려가고 싶다
기어코 한번은
내 가슴 속 고드름을 녹여
분단의 벽을 헐어버리고 싶다
아, 생에 한번쯤은
붉은 수의를 훨훨 벗어버리고
철조망이 없는 나라
동족의 가슴에 총을 겨누지 않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나의 자립
김 영
토끼 등을 디디고 서며
오이 덩굴손에 매달린 한이 있어도
금년엔 기어코 자립해야겠다고
봄이 되면 다시 한 번 그려보는 설계도
내 시작 노트엔 싯귀 대신
토끼의 분만 두수(頭數)와 마디 오이의
수확량으로 메꿔지고
손엔 펜대 대신
분무기와 호미가 쥐어졌다.
배고픈데 정치는 무슨
하물며 예술이 소용 있나
그래도 시를 버릴 수 없는 무명 시인
하루의 노동이 끝나면 의무처럼 책상 앞에 앉지만
토끼 오줌이 몸에 배고
허리가 굽도록 땀 흘려도
쫓기는 나의 생활
리어커 시인 ·1
김 영
리어커 위에서 밥 먹고
리어카 밑 사과박스에서 잠을 잔다
파라솔 펴 비닐 두르면
집이 되고
접어 끌고 가면 자가용
원고지는 도마도 박스
여기저기 끄적이다가 잃어버린 싯귀도 많지만
뜯어 맞추다 보면
그대로 소설이 되고 시가 된다.
리어카는 나의 운명
역사의 뒤안길을 끌고 가는
유일한 재산목록
무이의 생산 수단
어쩌다가 단속반원에 걸려
리어카를 뺏기면
생계가 막막하지만
새 리어카 사서 녹슬지 말라고 페인트칠하고
과일 가득 실으면
부러울 것이 없다
리어카는
시의 샘물
빌딩의 숲을 헤쳐
가도 가도 리어카 신분
면할 길이 없지만
천 원에서 이천 원 하는
선인장 화분 하나 사다 놓고
꽃피지 않는 삶 가시처럼 살아가는
나는 역시 거리의 무명시인
리어카 위에서 밥 먹고
리어카 밑에서 잔다.
.
빨치산 시인 김영을 생각하면 이태리 계 유태인으로 반파시즘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다 살아남아 홀로코스트를 증언했고, ‘살아남은 자의 아픔’이란 시집을 쓰기도 했던 프리모 레비가 떠오른다. 레비의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난 책 없는 빨치산 배낭은 실탄 없는 총이나 조종사 없는 전투기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네. 그런 자들은 좋은 세상이 와도 살 자격이 없는 쓰레기들이지. 그리고 책은 읽고 난 다음엔 반드시 덮게. 모든 길은 책 바깥에 있으니까.” 책을 읽는 빨치산과 시를 쓰는 빨치산은 전투의 와중에서도 자신의 영혼을 간직하려 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사선을 넘나드는 투쟁의 와중에서도 책을 읽고 시를 쓰는 자들은 영혼이 맑은 자들이다.
조선시대 궁중에 진상하던 식품으로 유명한 순창 고추장은 검붉은 색과 은은한 향기, 감미로우며 알싸한 맛으로 천하일미(天下一味) 고추장의 명성을 지켜오고 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고추장 한 숟가락 뚝 떠 밥을 썩썩 비벼 먹으면, 입맛 돌게 하는 그 맛엔 어떤 비밀이라도 숨어 있는 걸까. 순창 고추장 진상유래와 만일사 중건 기록이 남아있다는 ‘만일사비’는 오랜 세월을 버텨오다가 비바람에 심하게 마모돼 판독이 어렵고, 전란 때 3등분으로 파손된 것을 간신히 복원해 놓았다고 한다. 지난 1978년, 순창 고추장의 역사적 상징이자 문화유산인 ‘만일사비’를 복원하면서 판독한 비문은 추정에 의한 내용이다. 비문 내용 가운데 태조대왕과 무학이라는 말만 알아볼 수 있고, 순창고추장의 유래는 조상 대대로 이 지역에 구전 되어온 이야기라는데 다음과 같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무학대사를 찾아 만일사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때 민가에 들러 먹던 밥에 고추장 맛이 어찌나 좋던지 그 맛을 잊지 못하여 왕이 된 후에도 순창 고추장을 진상토록 하였으며, 이때부터 순창의 고추장이 유명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태조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에 무학대사와 만일사에서 기도할 때 하루는 산 안마을 김좌수댁 초대를 받은 이성계와 무학대사는 그 집에 가서 점심대접을 받게 되는데 산해진미가 다 올라와 있는 훌륭한 밥상이었으나 그중에서도 고추장 맛이 일품이었다. 그래서 식사가 끝나고 나서 수인사를 하면서 고추장 맛이 독특하였는데 거기에 무슨 비결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때 김좌수가 대답하기를 “우리 고장은 산과 물이 많고 토양이 비옥하며 풍향이 완만하여 사람이 나면 명인달사가 나고 산과 들에는 약초와 채마가 특이하여 보통으로 담가도 그 맛이 담백하고 감칠 맛이 난답니다 하였다.
그로부터 이성계의 밥상에는 반드시 순창 고추장이 올랐으며, 개국후 아들 방원과의 불화로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궁궐을 떠나 외유할 때 무학대사와 함께 또 한번 만일사를 찾아와 며칠 쉬어간 일이 있었다. 그때 전에 천일향을 시주한 일이 마음에 걸려 구천일향을 더하여 만일향을 채우고 그 만일향을 시주한 기념하기 위해 그 절 이름을 만일사로 고쳐 부르도록 해놓고 함흥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다.
아름드리 장독마다 고추장 익어가는 마을
순창 고추장의 ‘메카’, 민속마을. 순창군이 지정한 순창 전통고추장 제조기능인의 손끝에서 고추장 맛이 계승되고 있는 마을이다. 순창읍에서 고추장 마을까지는 차로 5분 거리. 광주방향으로 24번 지방도로를 타고 달리다보면 왼편으로 민속마을 표지판이 나온다. 민속마을은 50여체의 기와집들이 즐비해 큰 양반마을에라도 들어온 듯하다. 마을길을 따라 찬찬히 한 바퀴 돌아보니 집집마다 열어 놓은 대문 사이로 마당 가득 장독대가 시선을 끈다. 양지바른 마당에 정성스런 관리와 다독임으로 만들어진 아름드리 장독마다 고추장이 잘도 익어간다.
이기남 할머니, 문옥례 할머니, 문정희 할머니… 80년대 후반부터 고추장 맛으로 명성을 날린 할머니들의 이름을 내건 상호가 눈길을 끈다. 아마도 순창 고추장 맛의 비밀은 오염되지 않은 순창의 물맛과 이 지역의 기후조건의 조화가 아닐까 싶다. 맛있게 매운 고추장 맛이 생각나면 물 맑고 산 좋은 순창으로 떠날 일이다. 우리네 인생살이와 똑 닮은 매운맛, 짠맛, 단맛이 잘 어우러진 검붉은 고추장의 묘미가 그 곳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