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와 예산
글 : 윤고방
다시 추사 고택에 들며
충남 예산의 완당 고택을 찾은 것이 뚜렷한 기억으로는 세 번째다.
처음은 1980년대 초반 무렵 대학원에서 고전문학을 담당하시던 고 이병주 교수와 학생들이 벌였던 문학 탐방의 일환 행사 때였다.
노 교수님의 자세하고 친절한 해설로 인해 완당의 학문과 예술 세계가 마치 환각처럼 나를 사로잡았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느꼈던 추사의 묘소, 비석, 잔디밭의 모습이나 고택의 보존 상태는 무척 실망스러웠다. 20여 년이 지난 오늘, 기념관도 새로
생기고 말끔하게 단장된 모습을 보니 성품이 깔끔하셨던 완당 선생도 마음 편하실 듯하다.
두 번째는 1990년대 초, 한창 글씨 연마에 몰두하던 때였다. 추사 고택에서 치렀던 추사탄신기념 서예백일장 일반부에 참가하기
위해서, 직장의 윗사람들 몰래 급한 집안 볼일 핑계로 수업을 오전으로 몽땅 옮겨 놓고는, 시작 시간에 당도하기 위해 서울에서
예산까지의 고속도로를 속도위반까지 해 가며 목숨 걸고 달려갔다. 심사가 엄격하기로 소문나 있었고 현장 휘호라는 특색 때문에,
전국에서 현대판 선비를 꿈꾸는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권위 있는 대회였다.
추사고택
안마당과 바깥마당을 가득 메운 응시생들과 엄숙하고 무거운 과거 시험장 분위기 속에서 고택의 향기를 느낀다는 것은
기대불능이었다. 며칠 후 집으로 배달된 입상 통지서만이 그날의 무거움을 한결 가볍게 덜어 주었고, 추사 선생의 지엄하고도
신비한 숨결 한 가닥이 내게도 닿은 것인가 하고 힘을 내어 한 동안 글씨 쓰기에 더욱 전념하기도 했다.
세 번째가 이번 문학기행 답사다. 어느 때보다 한결 마음이 들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겁을 잔뜩 먹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글씨
세계는 물론 문학, 경학(經學), 금석학, 고증학, 사학, 유학, 불학 등 박학다식의 심해에 빠졌다가 과연 살아나올 수가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던 것이다. 그 동안 틈만 나면 여기저기 눈에 띄는 대로 그가 남긴 예술과 학문의 자취들에 관심을 가져 봤지만,
그저 발만 적시다 나온 꼴이었기 때문이다.
서예만 해도 일중 김충현이란 큰 스승을 운 좋게 만나 수 년 간이나 지도를 받았지만 ‘도무지 이 길은 내가 갈 길이 아니다’ 하고
손을 번쩍 든 지가 꽤 오래다. ‘얼음에 박 밀듯이’ 주야장천 무심(無心)을 벗하며 붓놀음을 해야 하는데, 밥벌이에 매달려야 하는
월급쟁이로서는 도무지 난공불락이었다. 더구나 끊임없이 새로운 세상만을 찾아 나서도록 천성을 타고 났으니, 얼음장처럼
냉랭하고 무표정한 법첩의 일거수 일투족을 수백 수천 번 베껴 쓰는 임서(臨書)란 놈은 적군 중에서도 최막강 적군이었던 것이다.
10년이 좀 넘게 잔뜩 웅크렸다가 탈출해 나왔다. 그리고는 꽤 오래 전 스승이며 이미 돌아가신 심산 노수현 화백의 말 없는 혼백을
찾아 그림 쪽으로 다시 방향 선회를 했는데, 지조 없는 잡탕 조각배는 풍랑에 휩쓸려 침몰 위기를 수없이 겪으면서도, 이번에는
코드가 맞았는지 마음만은 편하게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다.
완당은 과연 문학가인가
김정희 하면 추사체, 우리나라 서예의 일인자이고 금석학의 대가로서 위대한 학자인 줄은 알겠는데, 과연 문학기행에서 다룰 만한
대상인가 하고 의구심을 가지기도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경우 다음의 진술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완당공(阮堂公)의 시문(詩文)은 본디 뛰어난 대가의 솜씨였으나 글씨를 잘 쓴다는 명성이 천하에 떨쳐짐으로써 이로 인해 시문이
가려졌다고 할 수 있다.(중략)
추사 김정희 (기념관 내)
이재(彛齋) 권돈인(1783~1859; 서예가, 학자, 정치가)이 공의 시문을 논하여 말하기를 ‘원당이 제주로 유배된 이후의 작품들은
두보가 기주 시절(대단히 곤궁하던 때)에 지은 시이거나 유종원이 유주 시절(마지막 벼슬지) 이후에 지은 시문과 같다’고 하였는데,
나는 말하건데 공의 시 또한 그의 글씨와 같아서 신통하게 깨달은 오묘함이란 절로 변화가 무궁하고 예스럽고 기이하여 담박함을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이하 생략).“
[완당의 제자 남병길이 지은 <담연재시고(覃硏齋詩藁;담연재는 완당의 다른 아호)>, 1876년, 전 7권 2책>의 서문]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진면목은 다만 서예의 대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니, 그는 조선조 후기를 대표할 만한 위대한 시인이며
큰 학자였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최완수; 김추사 평전<신동아, 1976년 1월호>, 전 경복궁박물관장]
“추사는 문이재도(文以載道) 즉 문장이란 도를 담는 그릇이라는 도학자의 견해를 반대하며, 도문일치(道文一致)의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비약해서 말하자면 시와 문 자체로 모든 것을 말한다는 입장이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완당의 제주 유배시 중에서
<시골집(村舍)> 같은 서정시를 주목한다.
장독대 동쪽 켠으로는 맨드라미 두어 송이 數朶鷄冠醬瓿東
새파란 호박 넝쿨은 외양간을 타올랐네 南瓜曼碧上牛宮
삼가촌(三家村;제주)에서 꽃놀이 하자 불러 三家村裏徵花事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접시꽃(?)이 붉게 피었네 開到戎葵一丈紅
* 戎葵(융규)는 본문에서 해바라기로 해석했으나, 葵에는 아욱, 해바라기, 蜀葵花(접시꽃) 등의 뜻이 있으므로
뒤의 紅과 호응하여 접시꽃으로 번역했음.
이 시를 보면, 1행부터 4행까지 이미지를 나열하면서 하나의 큰 이미지를 만드는 능숙한 경지를 보여 준다. 흔히 보아 온 기승전결의
리듬이나, 먼저 풍경을 읊은 다음에 자신의 심회를 말하는 전경후의(前景後意)의 긴장이나 상투성이 없다. 그저 시골집의 풍경을
읊었을 뿐인데 그 시적 여운은 아주 진하고 길다.“
[유홍준; <완당평전 권2, 2002, 학고재>]
높은 산 깊은 바다
완당(1786~1856)은 정조 후반(1760년대) 경부터 도입되기 시작한 청조(淸朝) 고증학과 금석학에 감화되어, 우리 것에 새로운
청조문물을 가미한 창조적 예술의 위대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국제적인 위대한 학자이자 예술가이다.
일찍이 일본인 동양철학자 후지츠카 지카시(藤塚鄰;1879~1948)의 연구에 의해 밝혀지기 시작했는데, 추사가 연경의 훌륭한 당대
학자들과 얼마나 깊이 있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교류하였는가를 치밀하게 고증한 다음, “추사는 청조학 연구의 제일인자”라고
자신 있게 결론지었다.
[<청조문화 동전(東傳)의 연구; 1974> 그의 아들(동양철학자) 후지츠카 아키나오가 사후 26년 만에 간행]
그의 예술 세계는 너무도 광활하면서도 철저한 학문적 바탕 위에서 그의 천부적 재질과 환경적 요인이 결부되어 찬연한 결실을
맺은 것이었으며, 시, 문, 서, 화, 학, 선(禪)에 이르기까지 어느 분야에도 뛰어나지 않음이 없고, 특히 그의 명성을 대변하는
‘추사체’의 창조적 예술성이야말로 한국의 예술사에 길이 남게 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완당의 예술과 학문은 높은 산이요, 깊은 바다와도 같아서 감히 그 높이와 깊이를 측량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그래서 유홍준은 <완당편전 권1> 첫머리에서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다.”고 말하고, 권2의 제목조차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로 잡아놓고 있다.
추사 김정희 서예 작품
필자는 단지 선학(先學)들이 개척해 놓은 완당 연구의 길을 따라 조심조심 발을 옮길 뿐인데, <완당선생전집;1934>, <국역
완당전집;1988>, 그리고 수많은 논문과 글들을 근거로 지어진 완당 연구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유홍준의 <완당평전 권1,2,3,
학고재, 2002>을 든든한 의지처로 삼았다.
그 밖에 이동주 작 <우리나라의 옛 그림;1995, 학고재> 속에 들어 있는 논문들 <완당 바람>과 <김추사의 금석학>, <간송문화
(澗松文華);간송미술관 내 한국민족미술연구소 간> 속 최완수 연구실장(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추사 관련 논문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993, 창작과 비평사>, 홍익대 대학원의 <추사 김정희의 서화 연구; 윤천근>, <조선조 시서화 삼절 연구;
이완숙> 등이 험로를 헤쳐 나가는 데 있어 가까운 길벗이 되어 주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어느 누구의 인생보다 그는 여러 분야에서 빛을 발했고 그 분야들이 유기적으로 엮여 한 덩어리가 되었기에,
연구를 목적으로 한다면 문학만을 떼어서 더욱 깊이 있게 고찰해야겠지만 여기서는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중요 항목과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풀어가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란 생각이다.
가야산(伽倻山) 정기를 타고 난 명문의 후예
이중환(李重煥,1690~1756)은 <택리지>9 충청도조에서 “가야산의 앞뒤로 10현이 있으니 모두를 일컬어 내포(內浦)라 하는데,
지세가 한 귀퉁이로 불쑥 솟아 있고 또 큰 길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임진 병자 남북 두 전쟁이 모두 이르지 않았다. 땅이 기름지고
구릉이 끝없이 이어져 있으며, 평야는 넓고 물고기와 소금이 지천으로 나서, 부자가 많고 또 대물려 사는 사대부들이 많아서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가장 살만한 곳”이라 했다.
이 윤택함과 평온 속에 살아온 사람들의 정서와 마음씨는 굳이 따지지 않아도 부드럽고 , 여유 있고, 정감 있는 사람들일 것 같은데,
무슨 연유에서일까, 내포땅이 배출한 인재들은 평범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들이 아니라, 기골이 강하고 심지가 곧아서 시쳇말로
‘기가 쎈’ 사람들이다.
최영 장군, 사육신 성삼문, 임란의 영웅 이순신, 추사 김정희, 의병장 면암 최익현, 김대건 신부, 윤봉길 의사. 김좌진 장군, 개화파
김옥균, 상록수의 심훈, 남로당의 박헌영, 고암 이응로 등 모두 대단한 분들이다. 제 명을 다하지 못할 만큼의 시대적 소명에 부딪혀
역경과 싸우며 끝내 의를 실천한 분들이 아닌가? 아마도 외유내강이란 이곳 특유의 산천기질을 타고 났기에 큰 뜻을 이룰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추사 김정희는 1786년(정조 10) 6월 3일, 충청도 예산 용궁리(龍宮里)에 있는 월성위(月城尉) 집안의 향저인 추사고택이라 부르는
곳에서, 아버지 김노경(1766~1837)과 어머니 기계 유씨 사이의 삼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조선 후기 내로라하는 소위 명문가였는데,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을 때 수렴청정을 한 정순왕후가 추사의
12촌 대고모이며 정순왕후의 사촌 오빠로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 등은 추사의 할아버지 김이주와 같은 항렬의 10촌 형제들이다.
그리하여 경주 김씨 일문은 세조 연간의 이른바 세도정치 시절에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남양 홍씨 등과 가세를 겨루었다. 이러한
시대 배경은 추사가 출세할 수 있는 축복 받은 환경이기도했지만, 결국엔 참혹한 가화(家禍)를 입는 운명적인 굴레이기도 했다.
그의 고조부 김흥경은 영의정을 지냈으며, 증조부 김한신(金漢藎;1720~1758)은 영조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와 혼인하여 월성위에
봉해지면서 더욱 명문가로 발전하게 된다. 영조는 김한신을 사위로 맞아들이면서 서울 통의동에 천연기념물 백송나무가 정원수로
서 있는 거대한 저택인 월성위궁을 내려 주었다. 이 나무는 천수를 다하고 20여 년 전에 쓰러지고 말았다는데, 아마도 영화무상
(榮華無常)의 상징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추사의 초상화와 그의 인생 역정
그러면 추사의 살아생전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그의 초상화는 희원 이한철이 그린 조복관대의 전신상이 있고, 제자 소치 허유가
그린 반신 학자상이 유명하다.
봉황의 눈에 넓은 미간, 후덕한 귓밥을 보면 귀티가 역력하고 엷은 미소에서는 원만한 인품과 은은한 권위가 느껴진다. 그가 겪었던
중년 이후의 오랜 유배와 신산한 삶의 역정이 배어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단 그가 태어날 당시 한양에는 무서운 천연두가 번져, 산모가 예산 고택으로 피란하여 해산하였으나, 천연두에 걸렸다가 나은 곰보
흔적이 초상화에 슬쩍 나타난 있는 점을 빼 놓고는 참으로 편안한 모습인 것이다. 발복을 기원하는 제자들의 소망이 담기지는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은 혹여 선학들을 의구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하여 걱정스럽다.
여기저기 문헌 속에서 “추사는 매사에 대단히 까다롭고 오만할 정도의 자신감과 자기 주장이 강했던 인물이었다”는 인물평을 발견
한다. 후손 김승렬이 쓴 <완당 김정희 선생 묘비문>을 잠깐 보자.
<풍채가 뛰어나고 도량이 화평해서 사람과 마주 말할 때면 화기애애하여 모두 기뻐함을 얻었다. 그러나 무릇 의(義)와 이(利)를
논하는 데 이르러서는 그 논조가 우레나 창끝 같아서 감히 막을 자가 없었다.
고택을 스치는 세월의 파편들
추사의 묘소 앞에는 100년은 넘어 보이는 반송이 서 있는데, 30여 년 전까지는 열두 가지로 번성하던 모습이었다 한다. 그 후 유홍준
교수가 2002년에 볼 때는 셋이었다가 지금은 두 가지만 남았는데 그 중 한 가지마저 땅에 닿을 듯 기울어져 받침대로 의지해
놓았으니, 아무래도 세월의 쓸쓸함이 묻어나온다.
완만한 경사의 잔디밭을 내려가면 고택이 묵묵히 일행을 맞아준다. 원래는 서울 적선동에 있었으나 추사의 증조부 월성위
김한신이 현재의 위치인 신암면 용궁리 오석산 선영 아래로 옮겨지었다 한다.
추사 김정희 묘소
솟을대문을 끼고 문간채가 있고, 안으로 들어서면 기역자 사랑채. 사랑채 왼쪽으로 안마당이 펼쳐져 있고 나지막하게 돌 한 단을
쌓아 올린 곳에 안채가 자리 잡았다.
고즈넉한 사랑채 안채를 돌면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대청마다 방마다에 걸려 있는 추사의 눈에 익은 작품들이지만, 그날따라 더욱
새로운 건 오히려 기둥마다 세로로 걸린 주련(柱聯)이었다. 흰 바탕에 밝은 남색 글씨를 음각으로 새겼는데 모두 완당의 혼이
배어 있는 추사체로 쓰였다.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괴이한 형태의 추사체는 제주도 유배 시절 이후 완성된 글씨인데, 모두
60여 개나 되는 기둥마다 단정한 모습으로 걸려 있다.
어릴 때와 젊은 시절에만 잠시 득의만만하게 또는 실의에 잠겨서 살았을 뿐, 장년 들어 10년이 넘는 유배 생활 동안이나 그 이후
노년에도 단 한 번 편안히 살아 보지 못한 이 향저 보금자리에 ‘고초의 글씨’, ‘불후의 글씨’가 영구히 걸려 지게 되다니,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그의 삶의 명암이 다시금 느껴지는 순간이다.
주련이란 원래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시의 연구(聯句)를 말한다. 근엄한 선비의 집이거나 절의 기둥에 예서나 행초서로
써 놓은 시구들은 내용이 어려운 것이 많을 뿐 아니라, 어려운 행초 글씨를 일일이 물어 보기도 그렇고,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기
일쑤다.
그런데 추사 고택의 주련 현판 아래에는 친절하게도 독음을 달고 그 밑에 짤막한 풀이도 해 놓았다. 품격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군더더기라고 핀잔을 받을지 모르나,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가고 싶은 일반 관람객에게는 고맙고도 다행한 일이다.
그런데도 문화의 향기를 맡기 위해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사람들이 그리 많아 보이질 않아서 안타까울 뿐이다.
격조 높은 주련 글씨 몇을 여기 옮겨 놓는다.
山月照彈琴---산 위에 뜬 달이 안고 있는 거문고를 비추네.
書藝如孤松一枝---글씨 쓰는 일이란 외로운 소나무 한 가지와도 같고,
畫法有長江萬里---그림 그리는 법은 길고 긴 강을 건너는 것과도 같도다.
天下一等人忠孝---천하에 으뜸가는 일은 인간의 충성과 효도니라.
대문 밖에서는 일행들이 빨리 나오라고 시계를 보며 보채고 있고, 아직 읽지 못한 주련들은 맑은 물 한 모금 더 마시고 가라고
보채는 눈짓을 한다. 그런데 안채 옆을 보니 기와돌담 아래로 붉은 색 꽃들이 탐스럽게 피어 있구나. 에라 모르겠다. 내친 김에
급한 걸음으로 다가가 보니 모란이 아니고 모란보다 조금 늦게 피는 작약이다. 꽃 모양새가 하도 닮아서 많이들 혼동하는데,
모란은 미나리아재비과 낙엽관목이고, 작약은 같은 미나리아재비과라도 다년생 풀인 점이 달라서 한국화를 그릴 때는 이 점을
특히 유의하라고 선생들은 가르친다.
아뿔싸, 지나 놓고 보니 사랑채 안마당 가운데쯤에 추사가 해시계를 올려놓았다는 네모난 돌기둥, 예서체로 ‘석년(石年)’이라
음각으로 새겨 놓은 그 돌기둥 보는 걸 놓쳐 버렸다. 바람같이 빠른 해, 광음처럼 잠깐인 세월을 천 년 바위 위에 묶어 놓고
싶어서였을까? 이번 칠월의 본 기행 때 가면 돌에 손을 얹고 추사 선생과 ‘세월 맛이 어떠십니까?’하고 영통(靈通)을 해 보리라.
낭군의 뒤를 따른 비운의 화순옹주
고택 가까운 곳에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묘가 있다. 영조의 사위 김한신은 인물이 준수하고 총명하여 영조의 랑을 받아 오위도총부 도총관, 제용감(濟用監; 궁궐의 물품과 재화를 관장하던 정3품 관리) 등의 요직에 봉해졌고 글씨도 매우 잘 썼는데,
39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추사의 고조부, 증조부, 조부, 부가 모두 대대로 명필 소리를 들었던 필가(筆家)였지만, 그 중에서도 김한신은 송설체, 왕희지체,
한석봉체를 두루 익혀 영조의 총애를 받아오던 터였으니, 기둥을 잃은 주위의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자 화순옹주는 열흘을 굶은 끝에 남편을 따라 세상을 하직했다. 영조는 그녀의 정절을 갸륵하게 생각하여 길고 긴 애도문까지
내렸지만, 아비 말을 듣지 않은 것을 괘씸하게 여겨 열녀문은 내리지 않았다 한다. 그러다 그녀의 조카인 정조가 즉위하면서,
화순옹주는 조선 왕조 400년에 처음 나온 왕실의 열녀라며 정문(旌門)을 내린 것이다.
두 사람의 묘소 앞에는 영조가 친필로 내려 준 묘표가 있고 옆에는 추사의 외가 쪽 어른인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가 쓴 비문을 새긴
비가 세워져 있다.
두 사람의 혼백을 달래기 위해 재실을 짓고 대문은 정려문(旌閭門)으로 세웠다. 김한신이란 한 남정네를 생명보다 더 사랑한
탓일까? 남편을 잃고 자식도 없이 살아갈 외로운 세월이 궁궐의 온갖 영화를 과감히 떨쳐 버리게 한 것일까? 피 끓는 청년도 아닌
중년 여인으로서 선택했던 죽음의 순간이 붉은 칠의 창살 사이로 자꾸 어른거린다.
고택 오른쪽으로 이백여 미터 가면 추사의 고조부 김흥업의 묘소가 보이고 그 앞에는 추사가 연경에 다녀오면서 가져다 심었다는
150여 년 된 백송이 한 그루 서 있다.
백송은 중국이 특산지인데 잎은 세 개씩이며, 심은 지 약 30년이 지나야만 밑동부터 큰 비늘처럼 껍질이 벗어져서 흰 빛을 띠게 되어
백골송이라고도 불리는데, 종자를 퍼트리기 어려워 귀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약 100년이 넘는 큰 나무로는 원효로, 재동, 수송동,
충북 보은 등의 백송이 유명한데, 모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김흥업 묘소 앞 백송
월성위의 타계 후 이 집안에서는 조카 김이주를 양자로 들였으니 그가 곧 추사의 할아버지다. 김이주는 외할아버지가 되는 영조의
비호 아래 대사헌,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아들 넷을 낳았는데 그 장남이 추사의 양아버지 김노영(1757~1797)이다. 넷째 아들
김노경이 생아버지인데 추사 역시 큰아버지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신동의 입춘첩 신화-박제가와 채제공
어린 시절, 그가 쓴 입춘첩에 관해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여섯 살 때 ‘입춘대길’이란 입춘첩을 써서 대문에 붙일 정도로 일찍부터
글씨에 재주가 뛰어났던가 보다. 그의 묘비문에 의하면 월성위궁 대문에 붙여진 어린 추사의 입춘첩을 보고 당시 실학의 대가인
초정 박제가(1750~180 5)가 들어와서 추사의 부친을 찾아뵙고 “이 아이는 학문과 예술로 세상에 이름을 날릴 만하니 제가 가르쳐서
성취시키겠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문헌 속에 뚜렷한 언급은 없지만 추사의 양아버지 김노영이 1790년에 사은사로 연경에 갈 때 박제가와 동행한 점 등으로 미뤄 볼 때,
소년 수학기의 추사는 박제가에게 맡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박제가가 52살(1801)의 나이로 유득공과 함께 네 번째 연경에 갔을 때의 이야기를 미리 앞당겨 해 보자. 이때 그는 유명한
<북학의(北學議)>를 이미 탈고해 놓고 입연을 했다.
우선 젊은 중국 학자 조강(曺江;1781~)에게, 조선을 떠날 때 17세 소년 추사가 지어서 보여 준 다음의 시를 가지고 갔다.
이 자리에서 바로 그 시를 자랑스럽게 보이며, “나는 요즘 이런 훌륭한 청년을 기르고 있다네.”하고 말했다 한다.
개연히 한 생각 일으켜 慨然起別思
사해에 널리 지기를 맺고 싶네 四海結知己
만약 마음 맞는 사람을 얻게 된다면 如得契心人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겠네 可以爲一死
하늘 아래엔 명사가 많다 하니 日下多名士
부럽기 그지없어라 艶羡不自已
요즘으로 말하면 집안에서는 응석받이요, 나가서는 교실에 앉아 대학입시에 몰두하고 있을 나이의 소년 문사로서 참으로 당찬
포부가 아닐 수 없다.
이로부터 7 년 후 추사가 24세에 입연해서 조강을 만났을 때, 29세의 그는 이미 유망한 청년 학자가 되어 있었고, 이 시를 기억하면서
더없이 반가이 맞아 준 것이다.
입춘첩 두 번째 이야기. 다음 해 일곱 살 때 다시 입춘첩을 써서 붙였는데 이번에는, 당시 좌의정을 지내고 있던 번암(樊巖) 채제공
(1720~1799)이 이를 보고 들어와 노경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 아이는 필시 명필로서 이름을 한 세상에 떨칠 것이오.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하면 크게 귀하게
되리다.”하였다 한다.
관상, 수상, 족상은 들어 봤어도 서상(書相)은 낯설다. 그러나 평생 동안 글씨에 몰두하다 보면 신비로운 안목이 생기는가 보다.
글씨가 곧 그 사람의 품성을 드러내고 조절하며, 미래의 운명마저 좌우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과거 역사를 두고 가정은 금물이라지만, 채제공의 간곡한(?) 권유를 받아들여서 추사에게 글씨를 그만두게 했다면, 그리고
문장만으로 일생을 살게 했다면 추사의 인생은 그 이후 어떻게 바뀌었을까? 오늘날 우리의 뇌리에는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남아
있을까?
채제공의 예언은 추사 후대로 갈수록 참으로 신묘하게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월성위 봉사손(奉祀孫)에 닥치는 시련
추사는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가서 월성위 집안의 종손으로서 봉사손(奉祀孫)이 되어 친가와는 떨어져 살고 있었지만, 생부
김노경에게는 또 다른 두 아들 명희(1788~1857)와 상희(1794~ 1861)가 있어 사실상의 친형제로 평생을 살아갔다.
촉망과 귀여움을 독차지하긴 했지만, 친아버지를 작은 아버지라 부르며 친부모 형제들과 헤어져 살면서, 엄격한 규율 아래
유년 시절을 보내고 있던 추사에게 연이어 엄청난 시련이 닥치게 된다.
열두 살 되던 해 갑자기 양아버지 김노영이 세상을 떠나고 같은 해에 뒤이어서 양할아버지 김이주마저 타계하게 된다. 엉겁결에
그 넓은 월성위궁의 주인이 되어 큰 장례를 두 번이나 치르고 집안의 어른 노릇을 해야 했으니 그 심경이 어떠했을까?
그는 어릴 때부터 애늙은이 같은 진중함이 있었다고 하는데, 점차 자라면서 이는 한편으로 뿌리 깊은 우월의식 또는 귀족의식과
강한 자존의식으로 굳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어린 추사에게 가정의 흉사는 계속된다. 앞서 두 사람의 서거에 이어 할머니와 사촌형의 타계로 줄초상을 치르게 된 것이다.
집안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게 될 15세 무렵, 추사는 동갑인 한산 이씨와 혼인하게 되며, 스승 박제가로부터는 연경의 소식을
접하면서 영민한 소년의 꿈을 키워간다.
그러나 이 행복도 잠깐 추사 나이 16세 때, 친어머니가 불과 36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추사의 생모 기계 유씨가
생전에 남편에게 쓴 한글 편지는 궁체의 달필이요, 명필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기품 있고 훌륭한 보호자를 잃은 추사의 생애가
더욱 안타깝고 애달파지는 것이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805년, 추사 나이 스무 살 때 부친이 과거에 급제하는 경사가 생겼다. 집안이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고 그해
추사는 관례를 올리는데 백양(伯養)이란 호를 받았다. 어떤 이유에선지 나중에 원춘(元春)이란 자를 다시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소년 추사에 이어 청년 추사에게도 시련은 계속된다. 바로 그해에 부인 한산 이씨가 스무 살의 꽃다운 나이로 갑자기 타계했다.
크나큰 슬픔을 되 으면서도, 재혼을 한 나중에까지 전 장인에게 예를 다하여 편지도 하고 왕래도 하는 성실한 모습을 보인다.
앞서 어머니를 잃은 그해(1801)에 스승 박제가는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 끝에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아내가 죽은 이 해에 스승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그 이듬해에는 양어머니 남양 홍씨마저 서거하게 된다.
참으로 불행과 다행이 그렇게도 씨줄 날줄처럼 추사를 에워싼 연유가 무엇일까? 특히나 불행의 횟수가 많고 농도가 짙어서 더욱
그런 의문을 가지게 되는가 보다. 우연이라면 너무 기구한 운명이지 뭔가? 그래서 누구는 고택의 자리를 탓하고, 누구는 조상의
묘 자리를 두고 길흉을 이야기한다고들 한다. 모두 부질없는 일 아닌가?
꿈속에서도 그리던 연경(燕京)으로
18세기의 한중 교류 즉 청조 북학의 길을 본격적으로 열어 놓은 사람은 담헌 홍대용(1731~1783)이었다고 흔히들 말한다. 1765년
그의 나이 35세 첫 연행 때, 선교사 마테오 리치를 만나 역법에 관한 의논을 하고, 중국의 젊은 학자 엄성, 반정균 등과 교류하게
된다.
이러한 기초 위에 13년 후 1778년에 이덕무와 박제가, 2년 뒤 1780년에 연암 박지원, 10년 뒤인 1790년에는 유득공과 박제가가
동행했다. 그리고 11년 뒤 1801년에 박제가의 3차 연행이 이루어지는데,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자리에서 초정 박제가는
중국학자들에게 추사라는 젊고 영민한 제자를 가르치고 있노라고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한다. 이렇게 추사의 입연(入燕)은 일찍부터
다져지고 있었던 것이다.
추사 나이 23세 때 예안 이씨(외암 이간의 고손녀)를 재취로 맞이하는데 생원시 준비하랴 글씨 연마에 청학 연구에 몰두하느라
혼인 맛을 알았으랴만, 둘째 부인과의 금슬은 더욱 좋아서 그의 여생 동안 오래도록 애틋한 부부애를 나눈 것으로 알려진다.
추사가 동지 겸 사은 부사로 연경으로 가게 된 아버지를 따라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경으로 향한 것은 1809년 10월 말이었고, 동지
무렵에 연경에 도착하여 두 달 간 머물렀다.
(기록에 보면 추사가 생원시에 합격한 것이 같은 해 11월 9일로 나오는데, 이는 착오가 아니라 여행 중에 합격 통보를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자제군관이란 본래 공적인 사명을 띤 것이 아니라, 삼사(三使; 上使, 副使, 書狀官)의 자제들이 그 부형을 사적으로 시중들기 위해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행동도 제약을 받지 않고 매우 자유스러운 것이어서, 일찍부터 중국문물의 도입창구 역할을 해
온 터였다. 북학도 이런 자제군관들에 의해 도입되었으니, 그 비조격(鼻祖格)인 홍대용이나 연암이 모두 자제군관 출신이었다.
(최완수;<추사 김정희>2006, 학고재, 간송문화)
조선 사신들이 연경으로 가는 길은 서울에서 의주까지 천 리, 의주에서 연경까지 이천 리, 대략 한 달 반의 일정이었다.
의주 ㅡ> 압록강 ㅡ> 봉황성 ㅡ> 요동 들판 ㅡ> 심양 ㅡ> 대릉하 ㅡ> 산해관 ㅡ> 연경에 이르는 것이 정코스다.
연경으로 가면서 추사는 역사책에서 또는 옛 시인의 글귀에서 들어 본 곳을 지날 때면 그 감회를 시로 읊었다.
그가 압록강 국경을 넘으면서 쓴 시는 아직 알려진 것이 없지만, 요동의 봉황성[*이익의 <성호사설> 등에서 고구려의 안시성
(安市城)으로 추정함]에 다다랐을 때는 양만춘 장군이 당태종을 물리쳤던 일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유홍준의
전게서)
우뚝 선 뭇 봉우리, 가운데는 들판
수레와 말방울 떨렁떨렁 큰 들판에 널렸구나
성 위엔 아직도 당나라 때 달이 남아 있어
반쪽은 이지러졌고, 남은 빛은 그대로 비치는구나
사신들의 행로에서 결코 빠질 수 없고 많은 기행시가 남아 있는 산해관에서는, 뒤쪽에 있는 각산의 정상까지 올라 동쪽으로 발해를
바라보며 그 광활한 산과 바다를 바라본 감회를 장시로 읊었는데, 앞 부분만 발췌하여 소개한다.
수레와 말이 날마다 티끌을 뒤집어 쓰니
아, 천리 길에 볼깃살이 다 빠졌구나
나는 듯이 올라 보니 벽해가 작고 얕게 보이고
큰 바다가 발밑에 편안하게 깔렸네
십 년 동안 세속에서 노닐던 눈이
어리둥절하여 떨어질까 겁이 나는구나
이렇게도 높은 산이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큰 바다를 막아낼 수 있겠는가 (이하 생략)
추사는 대륙의 광대무비한 대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함께 마음속으로부터는, 머지않아 연경에 들어가서 부딪히게 될 인문 세계의
드넓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단단히 하면서 가슴이 마구 용솟음쳤을 것이다.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온 대학자 완원
연경에 도착한 추사는 스승 박제가에게 소개받은 조강부터 만났다. 조강은 이른바 친한파요, 지한파였던 모양이다. 도착한 추사를
환영하는 글을 지어 맞이해 줄 정도였고, 과거 유득공과 박제가가 갔을 때(1801)는 서화를 정성들여 그려 넣은 부채를 유득공에게
선물하기도 했던 사람이다.
추사는 조강을 통하여 지리학자 서송(1781~1848)을 만났고 서송을 통해서는, 그의 일생을 흔들어 놓고 평생 그의 가슴에서 떠나지
않았던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1733~1818)과 운대(芸臺) 완원(阮元;1764~1849)을 만나게 된 것이다.
추사는 옹방강으로부터는 보담재(寶覃齋)라는 당호를 얻었고 완원으로부터는 완당(阮堂)이라는 아호를 얻었다.
뒷날 그는 제주도 유배 시절에 두 스승을 회상하며 자신의 초상화에 다음과 같이 썼다.
[담계는 “옛 경전을 즐긴다”고 말했고 운대는 남이 그렇다고 말해도 나 또한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 두 분의
말씀이 나의 평생을 사로잡은 것이다.]
완원과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청조문화를 완성하고 선양함에 있어 절대적 공로자이자 당시 청조 학계의
제일인자였던 완원은 아무나 만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원래 항주에 있었는데 마침 일이 있어 연경으로 와서 후실인
공씨댁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완원 47세, 추사 24세로 만났는데 완원은 첫눈에 사람을 알아보고는 황급히 나오느라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왔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걸 보면, 추사도 추사지만 완원의 순수한 인간미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완원은 희대의 명차로 알려진 용단승설(龍団勝雪)이란 차를 끓여 대접했는데, 이를 추억하며 훗날 승설도인이란 호를 자주
쓰기도 했다.
완원은 이 자리에서 송, 원, 명의 유명 학자들이 저술한 경학에 대한 총서이자 보고인 <13경 주소교감기>245권 1질을 선뜻
선물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는 추사에게 자신의 호 한 자를 따서 완당이란 호를 내려 사제의 인증을 확실히 했는데, 김정희는 20대 중반 이후
추사보다 완당으로 더 많이 불리게 된다.
소동파를 보배로 받드는 옹방강과의 만남
옹방강의 나이는 추사보다 53살이나 많은 78세 고령이었다. 그는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으로서 시, 서, 화 삼절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소동파(1036~1101)를 몽매에도 그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당대의 금석학자이자 시, 서, 화 삼절로 추앙받았으며, 특히 건륭 연간의 4대 명필의 한 사람으로서 고서화, 탁본, 전적
수집에 열성을 다하여 이 분야 최고의 감식가요, 컬렉터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간송 전형필 선생을 떠올리게 되는데,
학문의 깊이나 수장품 규모는 과연 어떨지 모르겠으나, 그 투혼에 있어서는 간송이 더 강인했을 것이란 짐작이다.
그의 호 보소재(寶蘇齋)는 ‘소동파를 보배롭게 만드는 서재’라는 뜻을 담은 것인데, 추사는 귀국 후에 이를 본받아
보담재(寶覃齋)라고 하였다.
이로 미뤄 보면 추사에게는 무슨 기념할 만한 사건 또는 사연이 있을 때마다 자의건 타의건 간에 호 하나씩이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노구의 옹방강은 젊은 추사와 마주앉아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점점 더 추사의 총명함에 놀라 “해동에 아직도 이와 같은
영물(英物)이 있었는가?”하고 놀라며, <경술문장 해동제일(經術文章 海東第一)>이란 글귀를 써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후일 후지츠카는 “이 두 사람의 만남이야말로 한중 문화 교류에 있어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일”이라 했다.
옹방강은 추사를, 희귀한 금석문과 진적(眞蹟) 등 수장품 8만여 점을 자랑하는 <석묵서루(石墨書樓)>로 초대했다. 나중에 회상하며
묘사한 글이 있는데, 이 수장고는 너무 넓어서 이층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사람이 개미 만해 보였다고 한다.
가뜩이나 호기심 많고 열정에 가득 찬 추사에게 어떤 감흥과 충격을 안겨 주었을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추사는 떠나기에 앞서 친부 김노경의 당호 유당(酉堂)을 써 주십사 부탁하고, 옹방강은 친필과 함께 많은 책과 귀중한 탁본들을
선물로 주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한 것은 귀국 후에도 끊임없이 자료와 편지로 주고받은 대가의 가르침이었다.
추사에게는 호가 몇이나 될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중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그와 연유한 호가 하나씩 생겨났다. 이름이나 호는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호가 자주 바뀐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혼돈으로 몰고 갈 공산이 커진다는 뜻이다. 비난거리를 찾는 사람에게는 공연한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고, 변덕이 심하다, 건방지다, 교만하다 등으로 오히려 폄하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추사는 개의치 않았다. 괴(怪)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고집스런 예술가의 자유분방한 혼백이 그를 잔뜩 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신비와 축복 속에 태어난 추사는 조부 김이주로부터 정희라는 이름을 받고 자는 원춘인데, 그의 호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헤아릴 수 없다는 말이 사실인 것은, 지금도 아직 발굴되지 않은 그의 숨겨진 서화 속에서 햇빛 볼 날을 기다리는 호가 또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남겨진 그의 시문서화 간찰 중 90%가 가짜’라는 말이 있는 걸 보면, 200여 개가 된다는 호 중에는
혹시 가짜 호가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니, 이래저래 추사는 신비한 안개 속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가 보다.
가장 잘 알려진 추사가 있고 연경에 다녀온 후 완원에게서 받은 완당을 많이 쓴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 하나 자주 보이는 호로서,
예산 사람이란 뜻으로 쓴 예당(禮堂)이 있다.
여러 문헌에서 그의 호에 대하여 수 십 개 혹은 백 개가 넘는다고 언급하고 있지만, 전게한 윤천근의 석사 논문 <추사 김정희의
서화 연구>에서는 모두 165개 호를 뽑아서 열거해 놓았다. 완전 불완전을 떠나서 이 정도만 해도 분명히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 특이한 것만을 몇 개 골라서 살펴보기로 하자.
* 보담재는 담계 옹방강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 앞서 말했는데, 보연재(寶硏齋)는 담계의 ‘담’과 완원의 호 연경재(硏經齋)의 ‘연’을
가운데에 넣어 두 스승을 함께 섬기는 뜻이 담긴 것이다.
* 두 스승 또는 소동파와 관련되는 것으로는 보소실(寶蘇室), 소당(蘇堂), 노완(老阮), 완파(阮坡), 병완(病阮), 연재(硏齋), 삼연재
(三硏齋), 삼연실(三硏室) 등이 있다.
* 연경에 갔을 때 조선 사람이라는 자의식과 자부심을 가지고 썼을 법한 조선국인(朝鮮國人), 동해필생(東海筆生), 동해서생
(東海書生), 동해유생(東海儒生), 동해한구(東海閒鷗), 동국유생(東國儒生), 동국유자(東國儒子), 동해제일통유(東海第一通儒),
동이지인(東夷之人) 등이 많이 보인다.
* 유배 후 마포 쪽 강가에 살면서 쓴 칠십이구초당노인(七十二鷗草堂老人), 삼십육구초당노인(三十六鷗草堂老人) 등 익살스런
호도 있다.
* 한강 가에 살다가 나이 들어 과천에 살면서 자유롭게 썼던 과(果)자 돌림 호들이 있다.
초과(初果), 과노(果老), 과파(果坡), 과전(果田), 과월(果月), 과도인(果道人), 과농(果農), 과칠십(果七十), 칠십일과(七十一果)
등이 있다.
그 밖에 병거사(病居士), 무용도인(無用道人), 취옹(醉翁), 고다노인(苦茶道人) 등 미소를 머금게 하는 호들도 있다.
평양에서의 두 일화(逸話)
완당의 부친 김노경은 1828년 63세에 평야감사로 임명되어 평양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 완당은 마침 예조참의를 그만두고 관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였다. 친부를 늘 공경하고 따랐던 추사도 평양에서 한 동안 머물렀는데, 이때 당대의 명기 죽향(竹香)을 만난다.
시는 물론이고 난초와 대나무를 잘 그려 그 이름이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도 올라 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화훼초충첩> 13폭이
소장되어 있기도 하다. 시서화 삼절의 자하 신위와 한 때 사귀기도 했고(나중에 윤상도 옥사의 빌미가 됨), 당대의 풍류가들에게
소문이 자자한 죽향을 추사도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었나 보다.
그녀에게 두 수의 시를 지어 보냈는데 그 중 희롱의 빛깔이 꽤나 짙은 시 한 편, 사랑을 나누어 보자는 구애시를 감상해 보기로 한다.
피리소리 요란하자 구멍마다 향기 나는데
노랫소리 이 마음을 길게 끌어당기는구나
벌통의 벌이 꽃 찾아가잔 약속을 지키려 하니
높은 절개인들 어찌 다른 애간장이 있을쏘냐
이 시에 대한 화답이 시로 왔는지 그림으로 왔는지 미소로 왔는지 또는 매몰찬 거절의 편지로 왔는지는 문헌 근거가 없어 알 수가
없으니 어쩌겠는가?
이렇게 모처럼 한가하게 지내고 있을 무렵, 중국에서 돌아오는 사신이 아버지 평안감사에게 선물한 수선화 한 그루를 완당이
얻었다. 다시 정성스레 고려자기 화분에 심어 스물 네 살 위의 존경하는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에게 보냈다. 이 사실은
다산이 이 수선화를 받고 지은 시 한 수가 <여유당전서>권18에 전하고 있기에 알 수 있다.
원 제목은 <수선화>이고 부제는 <늦가을에 벗 김정희가 향각(香閣)에서 수선화 한 그루를 부쳐왔는데 그 화분은 고려청자로구나>
였다. 모두 12구로 되어 있는데 앞 구절만 소개하기로 한다.
신선의 풍채나 도사의 고격 같은 수선화가
30년을 지나서 나의 집에 이르렀다.
복암 이기양이 사신 길에 가지고 왔었는데
추사가 이제 대동강가 아문에서 옮기었다오
정쟁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일으킨 완당 바람
추사의 소년기 청년기에 너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보니 그의 서화 세계에 대한 내용은 소홀하게 생겼는데, 앞서 얘기한 대로
연구가 아니고 탐방이므로 문학 작품과 일화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끌고 갈 수밖에 없음을 양해 받아야겠다.
아버지 김노경이 평안감사에서 물러나 있고, 완당 45세 때 규장각 대교를 거쳐 동부승지에 이르렀을 무렵, 정국은 안동 김씨와
다른 일족 간의 세력 다툼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정쟁 상황이 되어 가고 있었다.
모함 받은 부친이 호전 반전 끝에 윤상도 옥사에 연루되어 1830년 가을에 고금도(오늘날 완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일 년 반이 되도록 해배 기미가 없자 임금 행차길에 나아가 꽹가리를 치는 격쟁(擊錚)으로 직접 호소했다. 들어 주지 않자 1년 후에
다시 나섰지만 끝내 1년이 더 지난 1833년 가을에야 해배가 되었다.
그 후 1836년에 다산이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그 다음 해에 친부 김노경이 세상을 하직했다. 집안의 어른과 마음 속
어른을 한꺼번에 잃은 완당의 충격은 매우 컸으리라.
이런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도 완당은 꾸준히 청학을 받아들이면서 국제적인 영역에서 새로운 서예를 구축해 가며, 벗과 제자
심지어 선배에까지 영향을 주면서 더욱 거세게 ‘완당 바람’을 일으켜 갔다.
이재 권돈인, 자하 신위, 우봉 조희룡, 초의선사, 석파 이하응, 우선 이상적, 역매 오경석, 소당 김석준, 고람 전기, 소치 허련,
희원 이한철, 북산 김수철 등 역사상 뚜렷하게 이름자를 남긴 사람만 해도 이렇게 많다.
이중에서 동갑이자 평생의 금석지우는 이재 권돈인이고, 속마음을 터 놓을 수 있었던 사람은 초의선사, 그림 제자 중 첫째가는
사람은 우봉 조희룡이라는 데에는 거의 의견이 일치한다. 또 한 사람 완당을 지극 정성으로 모신 제자가 있으니 이가 곧 우선
이상적(1804~1865)이다.
유형의 섬으로 가는 이천 리 길
완당이 55세(1840) 되던 해, 병조참판을 지내고 있던 완당은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감격에 겨웠다. 30년 만에 그리던 연경엘 다시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때, 완당에게는 저승사자 같은 그 옛날의 김우명이 대사간이 되고 김흥근이 대사헌이 되어 양사를 장악한 안동
김씨들이, 10년 전의 윤상도 사건을 재거론하며 이미 죽은 김노경을 공격하면서 그의 세 아들들을 싸잡아 제거하려 들었다.
최완수 선생은 이를 두고 반 안동 김씨 세력이었던 당시 우의정 조인영, 형조판서 권돈인, 병조참판 김정희에 대한 안동 김씨 집안의
집요한 공격으로 해석했다.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대왕대비는 우의정 조인영 등의 상소-차본에 힘입어 목숨만은 구한 채 제주도 대정으로
위리안치 유배를 가게 된다.
조선시대 행형제도 중 유배에는 여러 형태가 있었는데, 천사(遷徙)는 고향에서 천리 밖으로 내쫓는 것이고, 부처(付處)는 유배
도중의 한 곳에서 지내게 하는 것, 그리고 안치(安置)는 주거 제한의 연금이다.
이 중에는 본향안치, 자원처안치, 주군(州郡)안치 등 다소 가벼운 유형이 있고, 가장 가혹한 유배로 절도안치(絶島安置)와 위리안치
(圍籬安置)가 있는데, 김노경은 절해고도에 갇히는 절도안치를 당했고 추사는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가 쳐진 제주도 대정에 위리안치
된 것이다.
추사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
귀양살이를 떠나게 된 완당은 육지 천리, 바다 천리 멀고 먼 길을 가면서 해남 대둔사의 초의를 만나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었다.
대둔사에 당도하여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이란 글씨를 보고 혹평을 하며, 자신의 글씨로 바꾸라면서 초의에게 무량수각이란
글씨와 함께 현판 글씨를 써 주고 간 일화는 유명하다.
완당은 유배객 신세가 된 자신을 돌아보며 <영주(瀛洲) 화북진 도중>이란 시를 읊었다.
촌 아이놈들 몰려서 나를 보니
쫓겨난 신하 눈엔 가증스럼도 많네.
마침내 백 번 꺾이고 천 번 갈릴 곳이로되
남극성 은혜로 바다엔 파도가 일지 않네
가시 울타리 속에 피어난 눈물과 웃음
제주 유배 시절에 그는 수많은 편지를 썼다. <완당선생전집> 전 10권 중 1, 2권의 설(說)과 8권의 잡식(雜識), 9, 10권의 시(詩)를
제외한 3, 4, 5, 6, 7 다섯 권이 모두 편지로 되어 있으니 그 비중이 절반이다. 그 편지들도 다만 실용적인 문안 편지만이 아니라
문학성이 매우 높은 수상(隨想) 정도에 해당할 것이므로, 문집의 질이나 양으로만 본다면 조선조의 어느 문인 못지않은 전문
문학가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아내와 주고받은 유려한 필치의 한글 편지도 여러 통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여러 가지 풍토병으로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는 가운데 소치 허련이 그 먼 바닷길을 마다않고 찾아와서 몇 달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유배 생활 2년이 될 때쯤 해서 귀양살이를 힘겹게 그리고 지성껏 뒷바라지하던 예안 이씨 아내가 지병 끝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통곡의 제문을 지어 보냈다.
“어허! 어허! 나는 형틀이 앞에 있고 큰 고개와 큰 바다가 뒤를 따를 적에도 일찍이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는데,
지금 부인의 상을 당해서는 놀라고 울렁거리고 얼이 빠져서 아무리 마음을 붙들어 매자 해도 길이 없으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이오. (중략)
지금 끝내 부인이 먼저 죽고 말았으니 먼저 죽어 가는 것이 무엇이 유쾌하고 만족스러워서 나로 하여금 두 눈만 뻔히
뜨고 홀로 살게 한단 말이오. 푸른 바다와 같이 긴 하늘과 같이 나의 한은 다함이 없을 따름이외다.“
1943년 봄, 아내를 잃은 완당을 위로하기 위해 초의가 와서 약 2년 동안을 함께 지냈다. 참으로 두터운 우정이었다. 그에게 지어
준 시가 있다.
스님은 마냥 내 곁에서 웃고만 계시는구려
마음에 걸림 없는 곳이 바로 여기 아니오?
(중 략)
한 침상에서 다른 꿈 없는 것이 좋기만 한데
같은 음식 먹으면서 다른 속내 있겠는가요?
천만리 먼 길을 왕래한 세한도(歲寒圖)
충직한 제자 이상적은 역관으로 북경을 여러 번 다녀오면서 완당에게 필요한 책들을 날라 오고, 옛 벗들에게 보내는 편지 배달부
노릇도 지성으로 해 내었다. <만학집>, <대운산방문고> 옹방강과 완원의 책 등 몇 수레나 되는 책을 여러 번에 걸쳐 보내 주었다.
59세의 완당은 천추에 남을 명작 <세한도>로 답했다. 모두 잘 아는 세한도이기에 끝 부분만 소개하기로 한다.
(전략)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했는데......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요, 후라고 덜한 것도 아니다......
아! 쓸쓸한 이 마음이여. - 완당노인 쓰다.
뜻밖의 선물에 감격한 이상적은 스승에게 감사의 편지를 드린 다음, 연경으로 가져가서 옛 완당의 벗들에게 보였다. 거기 모인
유명 문사 16인이 제와 찬 그리고 세한시를 지어 주었고 우선 이상적은 이 작품들을 함께 표구하여 두루마리로 만들어서 완당에게
다시 가지고 갔으니 이 얼마나 지극한 정성이랴.
세한도
이 보배로운 <세한도> 두루마리는 이상적 사후 그의 아들과 제자에게로 넘어갔다가, 민영휘와 아들을 거쳐 완당 연구가인
후지츠카에게 팔아넘기게 된다.
1943년 여름 세계2차대전이 한창일 때, 서예가이자 완당 작품 컬렉터였던 소전 손재형이<세한도>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구입하려 했으나 거절당하고, 이듬해 후지츠카는 많은 명품들과 함께 <세한도>를 가지고 귀국해 버렸다.
소전은 일본으로 뒤따라 건너가서 무려 두 달 동안이나 끈질기게 애소한 끝에 그를 굴복시켰는데, “<세한도>를 지킬 사람은
소전밖에 없구나” 하며 내 주었다는 것이다. 길 잃은 국보가 제 나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이리하여 <세한도>는 천만 리 바닷길을 다시 한 번 왕복하여 되어 집으로 돌아왔지만, 소전의 정치 인생에 휘말려 저당잡히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가 지금은 미술품 소장가 손세기를 거쳐 그의 아들 손창근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정말 거기 잘 있는지
안부가 궁금하다.
‘<세한도>의 빛나는 안식’ 기원! 완당의 파란만장한 삶이 예산 고택 언덕에서 영면하듯, 그 끈질긴 역마살을 영원히 끊어 버리고
세한도 역시 그의 품 가까운 곳이거나 국립박물관 같은 곳에서 영원토록 편안히 빛나기를 기원해 본다.
추사체란 과연 무엇인가
문학기행 답사기에서 서예를 논하고 설명한다는 것이 사실 분에 넘치는 일이요, 언감생심 함부로 할 일이 아니기에 많이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대목은 마지막 순간까지 빼기로 마음먹었다가 다시 하루를 연기한 후 끼워 넣게 된 것이다.
현대 시서화라는 명제가 예술계 일각에서는 아직도 중요한 화두가 되어 여러 형태의 창작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고, 또 한 편에서는
고답적이고 퇴행적인 예술 행위로 치부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물론 예술뿐 아니라 어느 분야에서도 시시각각 변모해가는 시대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앞서가지 못하면 퇴출당하거나 남의 뒤를 따라 흉내 내기만 하다가 손을 거두어야 한다.
요컨데 예술 형식이나 장르 개념은 시대와 함께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고, 개혁과 복고의 변증법적 발전 과정에 따라 변모해
가는 것이므로, 어떤 창작 동기를 통해서 어떤 모습의 장르 형태를 선택하여 창작에 임하든 그것은 작가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이나 입고신출(入古新出)이란 말이 지향하는 바 즉 옛 것을 익혀 새 것을 안다는 말은 당연히 불변의 진리인
것이며, 과거의 훌륭한 본보기로부터 에너지를 얻고 자신이 나아갈 길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현명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 하더라도 만고의 시서화 삼절이라 칭송되는 추사의 문학 세계를 돌아보면서 그림은 물론
추사체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 보려는 노력은 그리 무모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국어사전을 보거나 백과사전을 보면, 김생체, 한석봉체 등 그 누구의 이름을 딴 글씨체 명칭도 나오지 않지만 ‘추사체’ 하나만은
뚜렷이 나온다. 신라의 명필인 김생은 서성(書聖)이라 불리었고 서예의 본 고장인 송나라에서도 왕희지를 능가하는 명필로 이름이
났다는데, 왜 그럴까?
한글 글씨를 두고는 궁체, 판본체, 정자체, 흘림체 등 특징이나 성격으로 명명한 경우는 있어도, 인명을 붙여 00체라고 하는 경우는
한글, 한자를 통틀어 추사체 하나밖에 없으니 도대체 그 까닭이 무엇인가?
현대 서예계의 중추 역할을 했던 고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선생은 추사체를 어떻게 정의했을까?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서화가 추사 김정희의 독특한 글씨체. 김정희는 약관에 백가(百家)의 서를 통달하였고 깊고
넓기가 바다와 같았다. 13경에 전심용력하여 특히 주역에 깊었다고 하며, 금석, 도서, 시문, 전예(篆隸)의 학에 근원을
캐지 않은 것이 없고, 특히 서법으로 천하에 이름이 났다.
예법(隸法)은 서법의 근원으로서 서도에 뜻을 두려면 예를 모르고선 안 된다. 또한 예법은 가슴속에 청고(淸高)
고아(古雅)한 뜻이 없이는 쓸 수 없다. 그리고 청고 고아한 뜻은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가 없이는 능히 손가락
끝에 나타내지 못한다.
평범한 해서와는 비할 바도 아니며, 먼저 문자향 서권기를 가슴속에 갖춤으로써 비로소 사예(寫隸; 예서의 법첩을
모사하여 익힘)를 시작할 수 있다.
추사는 학문이 높고 서학(書學)에 깊었으며 상하 천고에 독특한 글씨를 써서 추종할 자가 없다.“
(동아세계백과사전; 1989, 동아출판사)
완당 연구의 최고 권위 최완수는 <추사 김정희>란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추사는 청조 고증학의 난만한 발전 결과로 출현한 서예금석학 즉 비학(碑學) 제파의 이론을 겸수(兼修)하고 그 이론을 그의 타고난 예술적 천품으로써 구현해내었으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추사체다. 그러므로 추사체는 비파서학(碑派書學)이 추구하던 이상적인 경지에 우뚝 올라 선 결정체라 할 것이다.”
괴(怪)와 파격(破格)이 추사체의 본질인가
추사와 같은 시대 인물로서 조희룡과도 교유가 깊었던 초산(樵山) 유최진(1768~1840)은 <초산 잡저>의 ‘추사 글씨 편액에 부쳐’란
글에서 가장 멋진 비평을 해 놓았다.
“추사의 예서나 해서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는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중략)
추사체의 특징이 잘 드러난 글씨일수록, 그것은 마치 머리를 산발하고 의복을 함부로 걸쳐서 예법(禮法)으로는 구속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감히 비유해서 말하자면 불가 도가에서 세속을 바로잡고자 훌쩍 도장(道場)을 벗어남과 같다고나 할까?"
아마도 초산은 이렇게 말하면서 머릿속에다가, 대 문장가 최치원이나, 생육신 김시습, 대중불교의 선구자 원효대사와 같은
기인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완당평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추사를 함부로 논하기 힘든 첫 번째 이유는 추사체의 글씨, 이른바 추사체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중략)
우리는 흔히 추사체라고 쉽게 말하지만, 실체를 보면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매우 힘들다.
예를 들어 추사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다 떨어진 책과 무뚝뚝한 책이 있는 서재, 유배 후 한강가
시절 작품>, <선게비불(禪偈非佛); 간송미술관 소장, 행서로서 추사체의 명작>, 그리고 <판전(板殿); 운명하기 3일 전에 쓴 현판
글씨, 고졸미(古拙美)의 극치라 일컬음> 같은 작품에서는 서체상 어떤 공통점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개성이
강한 글씨라는 점뿐이다.
추사는 정통적인 순미(純美), 우미(優美)가 아니라 미학 용어로 말해서 추미(醜美)를 추구했다. 즉 파격의 아름다움, 개성으로서
괴(怪)를 나타낸 것이 추사체의 본질이고 매력인 것이다.“
추사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결론을 추사 자신에게 내리게 한다면?
추사는 평생 동안 수많은 문자 도장을 스스로 파든지 제자에게 새기게 해서 두인(頭印)으로 사용했다. 그 중에 즐겨 쓴 것으로
‘불계공졸(不計工拙)’이란 것이 있는데, ‘잘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결국 추사체의 정의는 ‘파격으로 시작해서 괴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완당 바람’에 대한 반성과 재평가
한편 추사의 예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성과 평가가 조심스럽게 내려지기도 한다.
“완당 바람은 추사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전 시대에 모처럼 발흥한 진경산수나 풍속화의 새 물결에 찬 물을 끼얹게
되었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뭇 사람에게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고봉(高峰)을 가리키며 올라가라고 강요하는 결과가 된 것이다.
더구나 더욱 야릇한 것은 완당 바람의 방향과 시대 조류의 방향이 어긋났다는 역사적 현실이다. 마치 구정객들이 닥쳐오는 외래
세력을 오로지 쇄국과 수동으로 처리하려고 우왕좌왕하다가 망하듯이, 완당 바람 속에서 난초와 괴석과 여전히 관념 산수를
그리는 동안에 세상은 바뀌고, 서화는 그것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적인 미감과 유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옛 그림; 이동주,
1995, 학고재>
그림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불이선도(不二禪圖)> 이야기나 그가 남긴 몇 점의 산수화, 글씨마다에 새겨진 재미있는 사연,
진흥왕순수비 황초령비 발견에 관한 이야기, 유배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와 편지들, 한강변 강상(江上) 시절, 과천 시절 일화들은
지면상 여기서 접을 수밖에 없는 점이 매우 아쉽다.
하지만 완당의 유배지 대정을 돌아보며 정성스런 추모와 위로의 염을 담아낸 문효치 시인의 시 한 수가 있어, 넉넉한 마음으로
추사 고택의 탐방을 마치고, 경주 김씨 집안의 원찰(願刹)인 화암사(華巖寺)로 발길을 돌린다.
추사에게
그대가 보내던 편지의 길
그 길을 되짚어 대정에 가네
질긴 고독을 접어 넣어
묶어 둔 보자기 속에서
희한하게도 소나무는 꿋꿋이 자라고
오두막에 가두어 둔
춘란 그 꽃잎도
파도를 건너 뭍으로 줄줄이 기어오르네
절해고도에 묻어 둔 번민이
더운 땅 속에서 황금으로 익어
제주의 오름으로 솟네
대정 가는 길
물 위에서
그대의 편지 다시 읽네
-문효치, 국토기행 에세이, <시가 있는 길>-
화암사(華巖寺)-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
완당의 예산집 인근 오석산(烏石山) 아래, 증조부 김한신이 1725년에 세운 원당(願堂) 사찰인 화암사가 있다. 이 작은 절의 현판은
월성위 김한신의 친필이다. 대웅전 뒤에 있는 긴 병풍바위에는 옹방강에게서 선물 받은, 송나라의 유명한 애국시인 육방옹의 글씨
<시경(詩境)> 탁본을 음각으로 새겨 놓았고, <시경> 오른쪽에는 <천축고선생댁>이란 완당의 친필 글씨를 역시 음각으로 새겨
놓았다.
<천축고선생댁>을 풀이하면 ‘고대 인도의 옛 선생집’이 되겠는데, ‘석가모니의 집’을 이렇게 재미있게 재해석하여 바위에 새겨
놓았으니, 글씨에만이 아니라 글 내용에도 괴(怪)가 있다 할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이곳에 와서 경학과 글씨 공부에 열중하곤 했었는데, 퍽 만족스러웠는지 이 절 뒷산 큰 바위에는 <소봉래(小蓬萊)>
라고 써 놓고 금강산에 비기기도 했으며, 요사채의 누마루를 ‘시경루’라 이름 짓기도 했다.
완당이 자신의 안식처이자 수련도장이었던 혈육의 고향 예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시 한 수가 있다.
예 산(禮 山)
예산은 젊잖아라 팔짱을 낀 듯
이 산은 고요하여 조는 것 같네
뭇 사람이 보는 바는 똑 같지마는
나 혼자 신바람 나는 곳이 바로 여기
너른 벌은 진실로 기쁘거니와
좋은 바람 역시 흐뭇도 하이 (이하 생략)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의 충의사(忠義祠)를 찾아서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요란한 폭발음이 들렸다. 순간, 일제 침략자들의 전승기념 축하식장은 보기 좋게 날아가
버렸고 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잘 알려진 대로 이분이 바로 고려 때 윤관 장군의 31대손으로서, 25세의 젊음을 기꺼이
나라에 바친 윤봉길 의사다.
그는 1908년 가야산 기슭의 예산군 덕산면 사량리에서 태어났다. 11세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기미독립만세가 터지자
학교를 그만두고는, 한문교육에 전념했다 한다.
19세에 야학회와 독서회를 조직하여 문맹 퇴치와 농촌계몽운동에 힘을 쏟았다. 20세에는 <농민독본>을 저술하고, 농촌부흥원을
설립했으며 증산운동을 펼치는 가운데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중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충의사를 참배하고 내려와서 기념관으로 들어서는 입구 양쪽에 7~8미터는 됨직한 장승 두 개가 서 있다. 기둥 아래에 새긴 글씨를
자세히 살펴보니 왼쪽에는 <저한(抯韓; 한국을 건져낸) 천하대장군>이라 쓰였고. 오른쪽에는 <광현(光顯: 빛을 드러낸)
천하대장군>이라 쓰였다. 필자가 보았던 천하대장군 중에서는 과연 으뜸이고 꼭 제 자리를 잘 찾아 서 있구나 싶다.
두 장승을 지나 오른쪽에는 낯설게 느껴지는 ‘보부상 유물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윤의사의 농촌계몽운동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자칫 ‘저 상관 없는 건물이 왜 저기에 서 있지?’하는 부끄러운 짐작을 하도록 만들 것 같기도 하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
윤의사 기념관에 들어서면 그 당시 우리나라의 피폐하고 어두웠던 생활 모습과 이를 타개하고자 한 줄기 빛을 비추려 안간힘을
쏟았던 젊은 날 그분의 모습이 애처롭게 그리고 꿋꿋하게 살아 나온다. 혹시나 현세 우리들의 부유로운 삶과 너무 동떨어진 과거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여 그분의 뜨거운 조국애를 마음속에 생생하게 살려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기우가 가슴 밑바닥에 내려앉는다.
윤의사가 거사 이틀 전인 1932년 4월 27일에 의거 장소인 홍구공원을 답사하고서, 거기에 피어 있던 무심한 방초들에게 결의를
다짐하며 읊은 절명시가 있다. 죽음을 앞둔 25세 청년의 심경이 어떠했을까?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홍구공원을 답청(踏靑)하며
처처(凄凄;쓸쓸한)한 방초여
명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왕손(王孫)으로 더불어 같이 오세
청청(靑靑)한 방초여
명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고려강산에도 다녀가오
다정한 방초여
금년 4월 29일에
방포일성(放砲一聲)으로 맹세하세(윤봉길 의사 시문집; 2004, 역사공간)
청춘을 불사르고-인적 없는 수덕사
수덕사는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이름 그대로 고색창연한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건립된 것으로,
현재까지 정확한 창건 연대를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이다. 이미 지난 4월에 다녀온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이 신라
문무왕 16년(676)인 데에 비하여 연대는 훨씬 뒤지지만 정확한 창건 연대를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703년이라고 한다면, 목조 건축으로서 과연 그 세월이 얼마인가? 초현대식 공법에 의해 철골이나 콘크리트로 아무리
튼튼하게 짓는다 해도 100년도 못가서 허물어야 할 판에, 나무로 지어 700년이라니 참으로 세월을 이겨내는 인간의 힘도 대단하구나
싶다.
수덕사 경내에서 서쪽 계곡을 끼고 덕숭산으로 올라가는 등산길에서 1200 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일제강점기에 송만공
(宋滿空;1872~1946)) 스님이 머물던 정혜사가 있다.
만공은 젊은 여자의 허벅지를 베지 않으면 잠이 안 온다고 했다 한다. 일곱 여자의 허벅다리를 베고 잤다고 해서 ‘칠선녀와선
(七仙女臥禪)’이란 말까지 생겨났다는데, 망치스럽기 이를 데 없는 일이긴 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 추사의 괴(怪)가 떠오르는
장면이기도 하다.
대웅전의 건축술과 여러 유물들에 대해서는 문화 해설사에게 맡기기로 하고 두 여인에 얽힌 이야기를 잠깐 하고 드넓은 예당호
쪽으로 가야겠다.
한 사람은 잘 알려진 일엽스님(1896~1971)인데, 목사의 딸로 태어났으나 조실부모했다.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난 후 여성 잡지 <신여자>를 창간하고 신문화 신여성운동의 선구 역할을 담당했던 시인이다. 그의 시 한 편을
감상해 보자.
으서져라 껴안기던 그대의 몸
숨가쁘게 느껴지던 그대의 입술
이 영역은 이 좁은 내 가슴이 / 아니었나요?
그런데 그런데 / 나도 모르게
그 고운 모습들을 싸안은 세월이
뒷담을 넘는 것을 창공은 보았다잖아요
이렇게 뜨거운 젊음을 노래한 일엽은 38세 되는 해에, 만공스님을 만나 머리를 깎았다.
그녀는 인생회고록으로 <청춘을 불사르고>를 남겼던 것이다.
수덕사는 수많은 여스님들을 말없이 품어 참선의 도량 역할을 다하고 있지만, 세인에게 잊히지 않는 또 한 여인을 안고 있다.
고암 이응노 화백의 본부인이다.
수덕사 입구의 수덕여관 주인 할머니신데, 지난 번 답사 길에서 아직도 생존하고 계신지 확인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고암은 1957년 자신의 예술을 국제무대에 펼치기 위해 제자 박인경과 독일을 거쳐 빠리로 건너갔다. 그러고는 그만이었단다.
본부인을 버린 고암은 1968년 이른바 ‘동백림공작사건’으로 강제 귀국되어 옥살이를 할 때에도 그 힘든 옥바라지를 이분이 했다는데,
고암은 다시 외면했다.
문자 추상 등 고암의 예술은 동양과 서양을 마음껏 넘나든 위대한 것이었다고 추앙받는다. 수덕여관 뒤뜰 우물가에는 크고 널찍한
암반이 있고 거기엔 고암의 문자 추상화가 새겨져 있다. “1969년 이응로 그리다”란 낙관과 함께 새겨진 작품은 최고 예술품으로
꼽힌다.
예술과 사랑의 불연속선, 이해하기 어려운 변주곡이 한 가락이 은은히 들려온다.
내해(內海)만큼 넓은 예당호
지면도 초과되고 답사기 마감 시간도 이미 넘어 버렸다. 장마는 바야흐로 습습한 바람과 후덥한 실내기온으로 찜통더위를
선사한다.
이렇게도 끈적끈적한 답사기를 한시라도 빨리 끝내고 싶은 이 답답한 심정을 어디에다 풀어 놓지?
아! 이런 때, 타임머신을 타고 세월을 한 달 쯤 앞당겨 답사 당일로 돌아가서는, 예당호 너른 가슴에 풍덩 안겨서 흰 구름 흘러가는
푸른 하늘 한번 바라봤으면 좋겠는데...
어라차, 어느 틈에 예산 문학기행 가는 날이 일주일밖에 안 남았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