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손 시린 나목(裸木)의 가지 끝에
홀로 앉은 바람 같은
목숨의 빛깔
그대의 빈 하늘 위에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차 오르는 빛
구름에 숨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누이처럼 부드러운 달빛이 된다
잎새 하나 남지 않은
나의 뜨락엔 바람이 자고
마음엔 불이 붙는 겨울 날
빛이 있어
혼자서도
풍요로와라
맑고 높이 사는 법을
빛으로 출렁이는
겨울 반달이여
- 이해인 -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하루가 다르게 물소리 깊어지고 높아만 가는 하늘을 보면 무슨 핑계를 대어서라도 떠나고 싶어지는 요즘, 문학을 핑계로 길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누군가는 무작정 문밖을 나서는 순간 이미 여행은 시작된다고 했다. 시집 한 권 챙겨 단풍 구경 가는 기분으로 이해인 시인의 고향 양구로 떠났다.
예전엔 오지에 속하는 인제.원통에 근무하는 군인들이 양구로 배치받아 가는 군인을 보고 위안을 받았다는 말이 생겨날 만큼 양구는 강원도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에 속했다. 한낱 변방에서 한반도의 정중앙으로 변신 중인 양구의 한 축을 조용히 빛내고 있는 예술인이 화가 박수근과 수녀 시인 이해인이다. 양구는 화가 박수근과 시인 이해인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맑고 고운 언어로 만인에게 행복과 희망을 전하는 수녀 시인 이해인의 고향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양구는 내게 새롭게 다가온다. 이해인은 1945년 6월7일,양구에서 태어났고, 난 지 3일만에 카톨릭 세례를 받았다. 서울에 살 때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아버지가 납북되면서 집안이 어려워졌다. 문학소녀였던 해인은 김천 성의여고에 입학해 수녀원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전국 고등학생 백일장에 나가 '산맥'이란 시로 장원을 하기도 했다. 본명이 명숙이었던 이해인은 수녀원에 들어가 '해인;이란 필명을 만들어 가톨릭에서 발간하는 <소년>지에 시를 투고하곤 했다. 언니(이인숙) 오빠(이인구) 이름에 들어 있는 어질 인(仁)자가 부러웠고 늘 바다를 바라보며 기도했기에 바다 해(海)를 넣어 필명을 지은 것이었다.
1970년 '소년'에 '하늘'을 포함한 세 편의 동시가 추천 완료되면서 등단, 시인의 길을 걸으며 필리핀 성 루이스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76년 종신서원과 더불어 첫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출간하고 서강대학원 종교학과를 마쳤다. 1979년엔 두번 째 시집 <내 영혼에 불을 놓아> 세번 째 시집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1989년 <시간의 얼굴>,<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작은 위로, 작은 기쁨, 엄마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는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 등이 있다.
이해인 수녀의 시는 어렵지 않아 좋다. 말의 표현으로 보면 어른이 아닌 어린아이처럼 천진스러운 데가 있다. 몸에 밴 신앙생활,기도로 잘 닦기고 씻겨진 심성이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이해인 수녀의 시는 절대자에 대한 간절한 기도의 언어이기 때문에 정화된 시의 빛깔을 띠고 있으면서도 난해하지 않다. 그런데도 그녀의 시는 봉숭아 꽃물 들 듯 우리의 가슴에 스며들어 심금을 울린다.
2011년 봄, 이해인 수녀는 암 투병 속에서 더욱 섬세하고 깊어진 마음의 무늬들을 진솔하게 담은 산문집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를 출간했다. 산문집으로는 근 5년여 만에 펴내는 신간《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에는 암 투병과 동시에 사랑하는 지인들의 잇단 죽음을 목도하는 아픔의 시간들을 견뎌내며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현재의 삶을 긍정하는 이해인 수녀의 깨달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꽃이 지고 나면 비로소 잎이 보이듯이, 고통의 과정이 있었기에 비로소 보이는 일상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이 수도자로서의 삶과 살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삶을 아우르며 때론 섬세하게, 때론 명랑하게 그리고 때론 너무나 담담해서 뭉클하게 다가온다.
'요즘은 매일이란 바다의 보물섬에서 보물을 찾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있어 어느 때보다도 행복합니다.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보니 주변에 보물 아닌 것이 없는 듯합니다. 나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이미 놓쳐 버린 보물도 많지만 다시 찾은 보물도 많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아직도 찾아낼 보물이 많음을 새롭게 감사하면서 길을 가는 저에게 하늘은 더 높고 푸릅니다. 처음 보는 이와도 낯설지 않은 친구가 되며, 모르는 이웃과도 하나 되는 꿈을 자주 꿉니다.'
이른 아침, 길을 재촉하여 서울 춘천간 고속도로에 차를 올렸다. 춘천까지 가는 동안 수시로 안개가 길을 막아서곤 했지만 첫 기행지인 박수근미술관에 도착했을 때엔 개관 전인 이른 시간이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한나절은 족히 걸리던 길이었는데 그 사이 도로사정이 확연히 달라졌다. 2001년 화가의 생가터에 건립된 미술관은 화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화강암 질감을 모티브로 한 나선형 건물로 외관이 주변 풍경과 잘 어울린다. 벌겋게 녹이 슨 철제 다리 건너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박수근 화가의 동상이 우리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로비에서 미술관 직원이 타주는 커피를 마시며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올해는 양구가 낳은 천재화가 박수근 화백이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20세기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추앙받는 미석(美石) 박수근은 서민의 삶을 소재로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드러내는 데 일생을 바친 양구 출신의 화가다. 지금 그의 그림은 작은 작품 한 점에도 수억원을 호가하지만 그는 일생을 가난 속에 살았던 화가였다. 사후에라도 이렇게 그를 기리는 미술관이 마련된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생각도 든다.
미술관 정원에는 사명산 자락을 배경으로 편안하게 앉아 있는 박수근 화백의 동상이 있고, 오른편으로는 빨래터가 있어 그의 작품 속 풍경을 떠올리게 하고 빨래터 뒤로는 흰 자작나무 숲이 바람을 타고 있다. 전시실엔 작가의 손때 묻은 유품과 스케치, 드로잉 같은 습작에서 판화, 삽화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박수근 화백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제1전시실엔 생전에 박수근 화백과 돈독한 인연을 맺어온 갤러리 현대 박명자 회장이 기증했다는 '굴비'와 8억원을 호가한다는 '마을' 등이 전시 되어 있어 쉽게 발길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 외에도 화가의 유품이나 가족사진, 그리고 지인들과 교환했던 편지들이 전시되어 있어 우리 민족의 일상적인 사람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냈던 화가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미술관을 나와 산길을 따라 그의 묘를 찾았다. 산자락에 아담한 부부 합장묘 위로 조각난 가을 햇살이 떨어지고 있었다. 산을 내려오며 전시실에서 보았던 그의 말을 곱씹어본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할 뿐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 아이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박수근 -
시와 철학의 공간
우리는 다시 차에 올라 시와 철학의 공간, 이해인 시문학관으로 공간이동을 했다. 천재화가의 작품을 감상한 여운이 길어서일까. 양구에 <박수근미술관>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군사도시의 이미지를 벗기에 충분한데 이해인 수녀의 시를 더하니 양구는 말 그대로 예술의 고향이란 느낌이 가슴을 촉촉히 적셔온다. 용머리공원에 자리한 문학관에 도착하니 문학관으로 들어가는 길 양옆으로 줄지어 선 코스모스가 객을 반긴다.
몸 달아/기다리다/ 피어오른 숨결// 오시리라 믿었더니/오시리라 믿었더니//눈물로 무늬진/연분홍 옷고름//남겨주신 노래는/아직도/맑은 이슬//뜨거운 그 말씀/재가 되겐 할 수 없어//곱게 머리빗고/고개 숙이면//바람 부는/가을 길 노을이 탄다.
- 이해인의 시 '코스모스' 전문 -
양구 파로호 상류에 이해인 시 문학공간 및 김형석 안병욱 철학의 집이 건립돼 문을 연 것은 2012년 12월 1일이었다. 인근의 양구읍 정림리에 박수근미술관과 함께 양구는 이제 미술과 문학, 철학을 아우르는 예술의 고장으로 한층 풍성해진 느낌이다.
“수도자로서의 삶과 시인으로서의 사색을 조화시키며 기도와 시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수녀 시인” 이해인 시문학관엔 벽마다 이해인 수녀의 시가 씌어 있다. 한 편 한 편, 천천히 감상하다 보면 가슴이 따뜻해져 온다. 1994년 인도 방문 당시 마더 테레사 수녀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 한 장이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모습은 이해인 수녀의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진다. 문학관에 전시된 아름답고 쉽게 읽히는 시편들을 가만히 소리내어 찬찬히 읽어가다 보면 DMZ. 안보,지뢰와 같은 단어들로 바짝 긴장됐던 마음이 절로 느슨해진다.
양구읍 동수리 부지 1,931㎡에 지상 3층 규모로 건립된 건물의 1층에는 이해인 수녀의 시 문학 공간이 자리 잡았고 이해인 수녀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품과 원고, 사진, 작품집 등이 전시돼 있다. 1945년 양구읍 동수리에서 태어난 이해인 수녀는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시작으로 다수의 시 작품을 냈으며 최근에는 암 투병을 하면서 산문집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를 펴내기도 했다.
이해인 수녀는 문학관이 문을 열게 되었을 때 “이 같은 공간이 꾸며진 것은 감사하지만 수도자로서 생전에 이름이 부각돼 조심스럽다”며 “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을 때 시가 정서를 맑고 밝게 가꾸는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건물 2층에는 대표적인 철학자인 김형석·안병욱 선생의 철학의 집이 조성됐으며 양구군은 이들이 사용하던 책상, 저서 등을 전시하고 인문학 특강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지역 주민들의 문화에 대한 갈증을 풀어 주고 있다.
김형석 박사는 1920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에세이집 `김형석 전집(10권)', `오늘을 사는 지혜', `철학 입문' 등을 펴냈다. 안병욱 박사는 1920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태어나 `현대사상', `사색인의 향연', `도산사상', `휴머니즘 사상' 등의 저서를 펴냈다. 가난하고 힘들던 시절 사색적이고 서정적인 에세이로 지친 영혼을 위로해준 우리시대의 대표적 멘토인 두 철학자의 공간이 이곳에 마련된 것은 실향의 아픔을 지닌 두 사람을 양구군에서 배려한 덕분이다.
3층으로 올라가니 전망대와 세미나실이 있는데 청춘관에선 어코디언을 연주하는 노신사가 반갑게 우리를 맞아준다. 어코디언에서 흘러나오는 과꽃이란 동요가 가슴을 저며온다.
"꿈이 없는 20대는 죽은 인생이다. 이상이 없는 40대는 방황하는 사람이다. 젊은 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열린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이란 김형석 교수의 글이 장군죽비가 되어 등을 내려친다.
한곳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발길을 재촉하여문학관에서 멀지 않은 한반도섬을 찾아갔다. 일찍이 강원도 영월의 한반도 지형은 가 보았지만 양구에 한반도를 닮은 섬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한반도섬은 파로호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대(163만제곱미터)의 인공습지다. 워낙 넓다보니 높은 곳에 오르지 않고는 한 눈에 한반도의 형상을 가늠할 수는 없다. 한반도 형상을 제대로 조망하려면 반대편 산기슭에 잇는 전망대에 올라야 한다. 섬으로 이어진 나무데크를 따라가면 제일 먼저 반달곰이 방문객을 반긴다. 제주도는 물론이고 울릉도와 독도까지 재현해 놓은 세심함이 오히려 인공의 냄새가 짙어 감동이 반감되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나무데크를 걸어 들어가는 것 말고 한반도섬으로 가는 특별한 방법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짚라인을 타고 하늘을 날아 들어가는 것이다. 양구읍 동수리에 설치된 65m 높이의 타워에서 출발, 와이어를 타고 750m 거리의 허공을 날아 한반도 섬에 도달하는 것이다. 빠른 속도감과 함께 파로호와 한반도 섬을 아우르는 양구의 수려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어 양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인기라고 한다. 다만 한반도섬은 아직 미완이라 명소로 자리잡기까지에는 다소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한반도섬을 둘러보고 나니 어느덧 속이 출출하다. 양구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은 시래기다. 시래기 축제를 할만큼 양구의 시래기는 부드럽고 맛이 좋기로 정평이 나 있다. 시래기요리 전문점 '시래원'은 한국인의 밥상에 소개될 만큼 유명세를 타는 농촌진흥청지정농가맛집이다. 시래기가 건강식품으로 부각되면서 시래기무를 재배하여 일교차가 극심한 양구에서 말린 시래기는 여느 지역 시래기와는 달리 부드럽고 맛있다. 어머니의 정성과 고향의 따뜻한 인정이 묻어나는 정갈한 밥상은 입안 가득 군침을 돌게 한다.
어머니의 손맛이 느껴지는 시래기정식으로 맛난 점심을 먹고 DMZ 트레킹을 위해 두타연으로 향했다. 양구 8경 가운데 제1경인 두타연은 민통선 북방 내금강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국내 최대의 열목어 서식지로 주변경관이 수려하고 물이 맑기로 유명하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일 때 가장 자연스럽다. 6.25 전쟁 이후 반 세기 넘게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두타연은 빠른 회복력으로 원시자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최북단에 위치한 청정지역이다.
꽃들이 자리바꿈하는 가을 들머리, 초록이 지쳐가는 원시의 숲에 드문드문 눈에 띄는 야생화와 눈맞추며 걷는 길은 걸을수록 힘이 솟는 산소길이다. 분홍,노랑, 흰색의 물봉선과 쑥부쟁이,벌개미취, 금마타리 등 어여쁜 꽃들이 자꾸 발걸음을 더디게 만든다. 금단의 땅에서 2004년 두타연 일부 구간이 개방된 뒤 2009년 관광코스로 알려지면서 원시의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생태관광지로 각광받아온 두타연.
두타연은 금강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양구의 깊은 골짜기를 흘러내리다가 굽어진 한 부분이 절단되면서 만들어진 너를 소(沼)를 일컫는다. 10여m 높이에서 떨어지는 우렁찬 물소리의 폭포와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는 맑고 너른 못을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싸며 천혜의 비경을 보여준다.
예전에는 두타연에 가기 위해서는 예약과 해설사 동행이 필수였지만 지난 해 11월부터는 당일 개별관광도 가능해졌다. 이목정 안내소에서 출입신청서를 작성하여 신분증과 함께 안내소에 제시하고 위치추적 태그가 부착된 출입증을 목에 걸면 두타연 주차장까지 차로 이동이 가능하다.
두타연을 둘러보고 주차장 쪽으로 발을 옮기면 양구전투위령비가 서 있다. 위령비 뒷편엔 '길 가소서'란 시가 적혀 있는데 최근에 지은이가 고 박정희대통령이란 사실이 밝혀졌다고 한다. 위령비 오른편에 시를 옮겨 적은 시비가 따로 서 있다.
......
님이시여!
지금은 피 맺힌 원한도
사무친 그리움도 모두 풀 때
이승에서 못다 이룬 민족의 화합
魂界에서 하나 되어
밝고 고운 한 빛으로
부디 길 가소서 ......
<위령비의 시 '길 가소서' 일부>
위령비 맞은 편엔 조각공원과 전차 등 6.25 전쟁 당시 사용했던 장비들이 전시되어 60여 년 전의 이곳의 치열했던 전투를 상기시켜준다. 두타연 갤러리 앞에는 소지섭길 안내판과 소지섭의 손을 본뜨기 한 조형물이 서 있다. 몇 년 전 드라마 '카인과 아벨'을 양구에서 촬영한 인연으로 소지섭은 DMZ 배경 사진 에세이 '소지섭의 길'을 출판하기도 했는데 양구군이 그가 좋아하는 숫자 51에서 힌트를 얻어 총 51Km의 '소지섭길'을 만들었다.
자리바꿈을 시작한 가을꽃들의 화사한 자태를 즐기며 원시자연의 풀향기, 숲향기를 흠향하며 한가로이 걷는 즐거움이 각별하다. '지뢰' 표지가 있는 흙길을 따라 가다가 언덕 위 두타정 전망대에 오르면 발 아래 폭포가 우렁찬 굉음을 내며 흰 물줄기를 쏟아내고 커다란 소가 검푸른 물빛으로 우리를 맞는다. 데크에서 계곡 쪽으로 내려가면 맞은 편으로 건너가는 출렁다리(두타교)가 계곡에 그림처럼 걸려 있다.
옛날 두타사란 절이 부근에 있어 이름 지어진 두타연은 물이 맑고 깨끗하여 1급수에만 사는 열목어의 국내 최대의 서식지로 다양한 물고기들이 살고 있는 청정지역이다. 탐방로엔 다양한 들꽃들이 철 따라 피어나 천혜의 비경에 아름다움을 더하고, 바위틈으로 굽이치는 폭포 위쪽의 물은 한반도 형상을 그리며 흘러 10여 미터의 절벽으로 하얀 물줄기를 시원하게 쏟아낸다.
돌아서지 못하게 발목을 놓아주지 않는 두타연의 물소리를 뿌리치고 을지전망대가 있는 해안면으로 향한다. 이목정 안내소를 나와 30여 분을 달려 돌산령터널을 통과하면 을지전망대가 있는 해안면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해안분지가 펀치볼(punch bowl)로 불리게 된 것은 6.25 전쟁을 겪으면서부터다. 6.25전쟁 당시 외국의 종군기자들이 이곳의 지형을 보고 지형이 마치 화채볼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펀치볼이다. 해안(亥安)이란 지명은 분지 안에 돼지를 키운 뒤로 많던 뱀이 사라져 마을이 평안해져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양구는 6.25 전쟁 때 치열했던 전투가 9개나 벌어졌던 격전지다. 계속된 포화 속에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살아남지 못했다 하니 이곳에서 산화한 목숨은 얼마나 많았을까.
을지전망대를 가기 위해선 통일관에 들러 출입신청서를 작성하고 출입허가를 받아야 한다.
1988년에 지어진 을지전망대는 2층 건물로 남방한계선에서 가장 가까운 전망대다. 북한군의 초소와 그들의 먹거리를 재배하는 밭을 육안으로 볼 수 있고 맑은 날에는 금강산 비로봉의 4개의 봉우리가 보일 만큼 가까운 곳이다. 해발 1,242m의 가칠봉의 일곱 봉우리 중 마지막 봉우리(1,049m)의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가칠봉을 더해야 금강산 1만2천봉이 완성된다고 한다.
을지전망대에서 금강산까지는 불과 38km. 백리가 채 안 되는 거리다. 북녘의 산하가 한눈에 들어오고 금강산 봉우리도 아스라히 보인다. 산능선을 따라 이어진 철책선이 분단의 현실을 새삼 느끼게 하지만 등을 돌리면 가을빛에 곱게 물든 해안분지가 가을볕 아래 졸고 있는 모습이 평화롭기 그지 없다. 을지전망대를 내려오는데 초소를 지키던 병사가 바리케이트를 치워주며 거수경례를 한다. 내려서 어깨라도 한 번 토닥여주고 싶은데 돌아갈 길이 너무 멀다. 산을 내려와 제4땅굴까지 돌아보고 서울로 가는 귀로에 올랐다. 석양으로 물들어가는 산천이 가을빛을 닮아 있다. 한 번 찾아오면 십년이 젊어진다는 청춘 양구, 문학의 이름 빌려 찾은 탓일까? 문학소년처럼 자꾸만 가슴이 뛴다. 길섶에 피어 바람을 타고 있는 구절초나 개미취, 쑥부쟁이 같은 들국화 무리를 보니 이해인 수녀가 중학생 때 지었다는 '들국화'란 시가 아슴하게 떠오른다.
꿈을 잃고 숨져간
어느 소녀의 넋이 다시 피어난 것일까
흙냄새 피어오는
외로운 들길에
웃음 잃고 피어난 연보랏빛 꽃
하늘만 믿고 사는 푸른 마음 속에
바람이 실어다 주는
꿈과 같은 얘기
멀고 먼 하늘 나라의 얘기
구름 따라 날던
작은 새 한 마리 찾아주면
타오르는 마음으로
노래를 엮어
사랑의 기쁨에 젖어보는
자꾸 하늘을 닮고 싶은 꽃
오늘은 어느 누구의 새하얀 마음을 울려주었나
또 다시 바람이 일면
조그만 소망에
스스로 몸부림치는 꽃…
-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