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서 정들고
오면서 추억이 되는
아라메길
세월이 닳지 않은
마애삼존불의 얼굴에
너의 미소 활짝 피었다
보원사 오층탑에 앉았던 봉황
개심사 아미타여래랑
해미읍성 저 멀리
도비산 너머 바다를
한숨에 다녀왔는데
너는 지금
아라메길
어디쯤 가고 있니
-이생진의 '아라메길' 전문 -
하루가 다르게 뜨거워지는 태양의 열기 속에 절로 바다가 그리워지는 계절, 태안반도를 끼고 있는충남 서산으로 길을 놓는다. 그 곳이 바다빛을 똑 닮은 시집으로 30여 년 동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시인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로 널리 알려진 시인 이생진(85)이다.
"바다는 나에게 이끌림이다. 바다의 방랑자처럼 나는 섬으로 간다. 때로는 절벽과 등대 밑에서, 때로는 어부의 무덤과 방파제에서 삶이 뭐고 인생이 뭔가.고독은 뭐고 시는 무엇인가물었다. 그때마다 나는 섬이었다. 물 위에 뜬 섬이었다. 그러나 통통거리며 지나가는 나룻배,벙벙 울며 떠나가는 여객선, 억센 파도에 휘말리며 만년을 사는 기암절벽, 양지바른 햇볕에 묻혀 조용히 바다를 듣는 무덤, 이런 것들은 내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낙원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살아서 낙원에 다닌 셈이다. 그 낙원에서 맑고 깨끗한 고독을 마실 때 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그것을 시로 쓴 것이다."
한평생 바다와 섬을 소재로 시를써 온 이생진 시인의 고백은 바닷빛을 닮아 있다.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이생진 시인은 어린 시절 십리쯤 떨어진 바다를 즐겨 찾곤 했다. 친구가 살고 있는 섬에도 놀러 갔다. 이때부터 바다는 시인의 놀이터였고 시인의 정서가 되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소설 심훈의 '상록수'와 이광수의 '흙'을 읽고 농촌 계몽활동에 매료되면서 본격적으로 섬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즈음 아버지가 세상을 뜨면서 섬과 바다는 새롭게 다가왔다. 바다와 섬은 누구에게도 위로받을 수 없는 상실감을 달래주었고 고스란히 시가 되어주었다. 서산 중앙고등학교에 가면 이생진 시인의 시 '무명도'가 새겨진 시비와 함께 돌하루방 명장인 장공익 선생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돌하루방은 육지로 반출이 허락되지 않지만 제주명예도민이기도 한 이생진 시인에 대한 특별배려로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이생진 시인은 서산중앙고등학교 1회 졸업생이다.
일제 강점기와 군사독재 정권으로 이어진 시대를 감내하는 수단으로 섬을 떠돌며 시를 썼으니 그에게 시는 운명인 셈이다. 교사 재직 시에도 방학이 되면 어김없이 섬을 찾았고 팔순을 훌쩍 넘긴 지금도 섬을 떠돌며 시를 쓴다. 한국의 섬은 총 3215 개 중에 유인도가 494 개,무인도가 2721개라고 한다. 이생진 시인은 1000여 개의 섬을 가고 또 갔으니 유인도는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무인도도 그의 발길이 스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다.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 저녁이면 인사동의 한 카페엔 어김없이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생진 시인이 십수년 째 이끌고 있는 시낭송 모꼬지가 열리기 때문이다. 이곳에 모이는 사람들은 의사.변호사. 교사 등 직업도 다양하고 멀리 부산이나 목포,대구, 광주 등 지방에서도 올라온다. 모두가 이생진 시인을 사랑하고 시가 사라지는 현실이 안타까워 모이는 사람들이다. 시가 사라지는 것은 곧 인간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나도 그 모임에 두어 번 참석하여 시인께 인사를 드리고 시낭송을 했던 추억이 있다.
그때 이생진 시인은 인간은 숨이 멎는 순간까지 가치 있는 존재이기 위해선 영원한 청춘이어야 한다며 매순간이 인생의 꽃이라고 했다. 그를 보면 나이듦이 용도 폐기의 과정이 아니라 또 다른 질적 생산의 과정이란 것을 새삼 느께게 된다. 이생진 시인은 건강하면 60세 이후가 즐거운 천국이란 것을 섬을 찾아 다니며 여실히 증명해 보이고 있다.
이생진 시인은 지금도 카카오톡으로 시를 쓰고 스마트폰으로 그림을 그리고 매주 한 편의 시를 블로그에 올린다. 북한산 자락에 살고 있는 그는 섬 여행과 시낭송회를 빼고는 거의 시내에 나오지 않는다. 유일한 나들이라면 서점에 가는 정도다. 하루에 40분씩 세 번의 산책이 시인의 유일한 건강 비결이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세상도 사랑하게 되는 법. 시인은 자신을 잘 챙겨 여생도 아낌없이 섬시에 바칠 것이 분명하다.'노인은 사자꿈을 꾸고 있었다.'라는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문장이 이마를 치고 간다.
시인의 고향 서산으로 가는 길목에 어린 시절, 시인에게 감명을 주었던 소설 '상록수'가 쓰여진 '필경사'가 있다. 서해대교를 건너 송악 나들목을 빠져나와 한진나루에 닿기 전 상록초등학교를 지나면 필경사라는 안내판을 만나게 된다. 논밭 사이로 이어진 농로를 따라가다 보면 이내 정비가 잘 된 필경사에 닿는다.
'붓으로 밭을 일구는 집'이란 뜻의 필경사(筆耕舍)는 그 유명한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선생의 고택으로 1997년 충청남도 기념물 107호로 지정되었다. 집 앞에는 이 집의 내력을 적은 안내문도 잘 만들어져 방문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건물은 남남동향에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바로 앞에는 상록수문화관 건물이 들어 서 있다. 문화관 뜰에 서면 아산만의 물결과 서해대교가 한눈에 잡힌다. 필경사 뒤로는 대숲이 우거져 바람이 불 때마다 파도소리를 낸다. 심훈고택과 문화관을 둘러보다 보면 자연스레 상록수의 스토리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주인공 채영신과 박동혁이 이 마을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폈던가. 그러나 채영신의 본 인물 최영신은 경기도 반월의 샘골마을에서 농촌운동을 하던 여인이고 박동혁은 심훈의 조카로 역시 농촌운동을 하던 심재영의 소설 속 인물로 두 사람은 실제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어쨌든 최영신의 고향에는 수도권전철 상록수역이 세워져 있고 이곳 심재영의 고향에는 상록초등학교가 서 있어 두 사람의 소설속 행로가 완전히 허구의 산물만은 아니었음을 느끼게 한다. 심훈은 1933년(1932년이라는 설도 있다)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부친이 살고 있는 이곳으로 내려와 <영원의 미소>, <직녀성> 등을 집필하였다. 1934년 독립하면서 직접 설계하고 지은 집이 바로 필경사이다.
심훈선생은 1935년 이 집에서 대표적 농촌소설인 상록수를 집필했다. 필경사는 한 때 그의 장조카인 고 심재영옹이 관리하다가 당진시에 기부한 이후 군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1996년 한국문인협회가 세운 시비(詩碑)에는 그날이 오면 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어 생전의 심훈선생 음성을 듣는 듯하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 끊치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중략)/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필경사를 일별하고 갔던 길을 되짚어 나와 다시 서해안 고속도로를 올라타고 해미읍성을 찾아간다. 남쪽으로 차를 달리다가 해미나들목에서 길을 내려서면 가까운 곳에 성벽 위에 오방색의 군기가 펄럭이는 해미읍성이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진남문을 향해가는데 성벽 위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을 환영한다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해미는 작은 시골 면소재지에 불과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충청 병마절도사영이 있었던 인근에서 중심이 되는 고을이었다. 사적 제116호인 해미읍성은 조선 시대 읍성 가운데에 전북의 고창읍성과 함께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읍성이다.
해미(海美)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르기를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 두 현을 조선 태종 7년(1406)에 병합하면서 두 현에서 한 자씩 따서 지은 이름이다. 태종 14년(1413)에 병마절도사의 병영을 덕산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나서 성종 22년(1491)에 성벽이 완성되었다. 효종 2년(1651)에 병영이 청주로 옮겨가기까지 서해안 방어의 군사요충지로 1578년에는 이순신이 이곳에서 병사영의 군관으로 열 달 동안 근무했던 곳이기도 하다.
해미읍의 읍지에는 그 모습을 둘레가 6,630척이며 높이가 13척, 옹성(甕城이 둘, 우물이 여섯 개 있으며 성 둘레에 탱자나무 울이 둘려 있다고 하였으니 해미읍성을 ‘탱자나무성’[枳城]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성 안쪽에만 길게 심어져 있다. 남북으로 좀더 긴 타원형 모양을 한 해미읍성은 둘레 길이가 1.8㎞, 넓이는 대략 2만여 평쯤 된다. 5m 높이의 성벽이 2m 남짓한 두께로 둘려 있어 쭉 따라 걸으면 한 시간쯤 걸린다. 성벽에는 담쟁이덩굴이 보기 좋게 뒤덮고 있어 분위기를 한층 살려 준다.
읍성의 남문인 진남루는 잘 보전되어 왔다. 홍예를 올려 문을 삼고 그 위에 3칸 2층 누각을 세웠다. 해미읍성이 평야 지역에 있어서 진남루에만 올라도 주위의 모습이 다 들어온다. 진남루 앞쪽으로 돌아나와 살펴보면 석수장이였을 사람의 이름자가 새겨져 있다. 동문과 서문은 1974년에 복원한 것이고 본래 북문은 없었다. 진남루에서 서쪽으로 항아리처럼 배를 불쑥 내밀고 있는 곳이 옹성이다. 망루 역할을 하는 중간지점이다.
진남루 아래 문을 통해서 따라 들어가면 관아 자리에 동헌과 객사를 복원해 놓았다. 들어가는 길 양쪽으로 탱자나무가 빽빽하게 울을 이루고 있으니 가을이면 노란 탱자열매가 탐스럽게 달린다. 오른쪽으로 탱자 울 너머에 훌쩍 키 큰 나무 한 그루가 어둠처럼 서 있다. 600년이 넘은 고목으로 해미영의 감옥이 있던 자리에 서서 해미의 역사를 지켜보아 온 ‘호야나무’로 불리우는 회화나무다. 나무 아래 서면 나희덕 시인의 '해미읍성에 가시거든'이란 시가 가슴을 저며온다.
해질 무렵에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당신은 성문 밖에 말을 잠시 매어두고
고요히 걸어들어가 두 그루 나무를 찾아보실 일입니다
가시 돋힌 탱자 울타리를 따라가면
먼저 저녁해를 받고 있는 회화나무가 보일 것입니다
아직 서 있으나 시커멓게 말라버린 그 나무에는
밧줄과 사슬의 흔적 깊이 남아 있고
수천의 비명이 크고 작은 옹이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이 많기도 하지만 하필
형틀의 운명을 타고난 그 회화나무,
어찌 그가 눈 멀고 귀 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의 손끝은 그 상처를 아프게 만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걸어가 또 다른 나무를 만나보실 일입니다
옛 동헌 앞에 심어진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 드물게 넓고 서늘한 그늘 아래서 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잊은 듯 웃고 있을 것이고
당신은 말없이 앉아 나뭇잎만 헤아리다 일어서겠지요
허나 당신, 성문 밖으로 혼자 걸어나오며
단 한 번만 회화나무 쪽을 천천히 바라보십시오
그 부러진 나뭇가지를 한 번도 떠난 일 없는 어둠을요
그늘과 형틀이 이리도 멀고 가까운데
당신께 제가 드릴 것은 그 어둠뿐이라는 것을요
언젠가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사이를 걸어 보실 일입니다
- 나희덕의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전문 -
내포땅은 충청도에서도 선진문물이 빨리 전파되는 곳으로 18세기 말에 이르면 천주교인이 늘어남과 함께 순교자도 늘었다. 특히 1866년 병인양요에 이어진 박해 때에는 이 지역 천주교인들이 토포사(討捕使)가 있었던 이곳 해미영에 끌려와서 감옥에 갇히고 더러는 호야나무에 묶여 고문을 당하고 목매달려 죽기도 했다.
또 형리들은 그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처형하는 것이 힘들자 해미천에 구덩이를 파고 한꺼번에 생매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서문 밖에서는 천주교인들을 돌다리에 자리개질을 쳐서 죽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천주교인들에게는 순교의 성지로 해마다 수만 명의 성지순례행렬이 이어지는 해미읍성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읍성에서 1.2KM쯤 떨어진 거리에 천주교 성지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해미순교성지가 있다. 1866년부터 1882년 사이 천주교 박해 때 1천여 명의 신자를 생매장한 곳이다.많은 천주교도들을 처형하기 힘들자 해미천에 큰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을 했는데 생매장시 천주교도들이 죽음에 앞서 예수마리아를 부르며 기도하는 소리를 예수머리로 알아들은 주민들이 '여숫골'이라 불렀던 순교성지다. 자리개질,생매장,수장 등 갖가지 방법으로 순교한 신자들의 수가 1천여 명이 넘은 이곳에 1975년 해미순교탑이 16M 높이로 세워지고 2003년에는 전국 신자들의 성금으로 세워져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매년 수만에 이르는 성지순례자들을 맞고 있다.
순교자들의 대부분은 1866년(고종 3)부터 시작된 병인박해(丙寅迫害)로 희생되었는데, 특히 병인양요(丙寅洋擾) 이후 내려진 선참후계령(先斬後啓令)[군율을 어긴 자를 먼저 처형한 뒤에 임금에게 아뢰던 일]은 영장이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처형을 단독으로 수행할 수 있는 구실을 주었다. 따라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후에 보고하지 않았거나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못한 순교자들도 상당수에 이른다. 당시의 천주교 신자들은 유교적 사회 질서로부터 소외된 인간성과 불합리한 현실을 천주 신앙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다. 목숨까지 바쳐 지키려 하였던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금도 수많은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마음 속으로 성호를 긋고 해미순교성지를 떠나 개심사를 향한다. 개심사는 가야산 상왕산 줄기에 위치한 오래 된 사찰이다. 청벚꽃과 왕벚꽃이 장관을 이루는 봄날이 가장 아름답지만 녹음이 짙은 한 여름의 개심사도 마음을 열기엔 부족함이 없는 절이다. 이국적 풍경의 목장의 드넓은 초원지대를 지나 사과밭과 저수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소풍 가듯 들뜬 기분으로 가다 보면 어느새 소나무와 잡목이 어우러진 산 속 깊숙히 잠겨 숙연해진다.
새로 세워진 일주문을 지나며 마음을 씻고 홍송이 울창한 숲을 지나 돌계단을 천천히 올라서면 개심사에서 먼저 만나는 것은 장방형의 연못이다. 연못 왼쪽으로 경사진 흙길도 있지만 연못 가운데로 난 나무다리를 건너 층층계단을 오르는 것이 제 길이다. 근대 명필인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년)이 대자 전서로 쓴 ‘상왕산개심사(象王山開心寺)’ 현판이 달린 안양루(安養褸)를 돌아 해탈문을 들어서면 개심사 대웅보전 안마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에는 대들보가 자연스러운 심검당(尋劍堂)이 그 질박한 느낌 때문에 눈에 들어온다. 조선 초기의 건물인 대웅보전과 심검당은 개심사의 역사성을 말해 준다. 창건은 백제 말기인 654년에 혜감(慧鑑)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처음 이름은 개원사(開元寺)였는데 1350년에 처능(處能)이 중창하면서 개심사로 바꾸었다. 그 뒤 1475년에 다시 중창하였는데 대웅보전과 심검당은 그 무렵에 지은 건물이다. 1740년에 건물들을 또 고쳐 지었으며 지금 모습은 1955년에 전체적으로 상한 곳은 고치고 단청도 새로 한 것이 남아 있다. 40년 묵은 모습이라도 그런대로 세월의 맛을 느끼게 해준다.
대웅보전(보물 제143호)를 중심으로 심검당(尋劍堂)과 무량수전, 안양루를 에워싼 중정(中庭)은 사방 20여 미터 내외의 정방형으로 사찰의 중심 역할을 하며, 그 옆으로 명부전과 해우소·종각·산신각·연못이 자연스럽게 배치돼 있다. 전각이 많지 않은 절이지만 짜임새 있는 배치로 답답하지도 왜소해 보이지도 않는다. 명부전 너머에 있는 산신각에 올라 보면 이런 경내 모습이 가장 잘 보인다.
개심사 전각 가운데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회자되는 건물이 바로 심검당이다. 심검당은 해탈문을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비끼어 보이는 건물로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이다. 자연스럽게 휘어진 나무를 기둥과 부재로 삼아 조선 건축에서 보이는 자연미를 한껏 간직하고 있다. ‘심검(尋劒)’은 번뇌를 끊는 반야검, 즉 지혜의 칼을 찾는다는 의미로 절집에서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의 당호로 많이 쓰여진다.
1962년에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1477년 3중창했고 영조 때까지 6번이나 중창을 거쳤다고 되어 있으니 이 절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기둥 사이의 길이와 기둥 높이의 비례가 3.5 대 1로 평활(平闊)한 구성을 보이는 것은 수덕사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충청도 지역 가옥의 넉넉한 모습을 보여준다. 단청을 하지 않아 깊은 맛이 오히려 좋다.
심검당에 이어 다듬지 않은 나무를 그대로 살려 부재로 삼은 건축은 심검당의 부엌으로, 후대에 지어 이은 것이다. 개심사 심검당은 전남 승주 송광사(松廣寺)의 하사당(下舍堂), 경북 경산 환성사(環城寺)의 심검당과 함께 조선 초기 요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건축물들이다.
봄날의 토종 왕벚꽃의 장관을 못 본 것이 아쉽기는 해도 마음 수행처의 정갈한 공간의 미를 음미한 것만으로도 마음이 흡족해진다.
제주에 올레길이 있다면 서산에는 '아라메길'이 있다. 바다의 순 우리말인 '아라'와 산의 순 우리말인 '메'가 합쳐진 말로 바다와 산이 만나 어우러지는 서산지역의 특성을 잘 살린 아라메길은 가족이나 친구, 혹은 연인과 함께 걷기에 좋은 길이다. 개심사를 뒤로 하고 '백제의 미소'로 일컬어지는 용현리 마애삼존불을 찾아가는 길은 아라메길의 1-1구간에 속한다.
마애삼존불을 만나러 가는 길목에 장승처럼 서 있는 석불이 먼저 우리를 맞는다. 강댕이 미륵불이다. 강댕이로 진입하는 곳에 있던 것을 고풍저수지로 수몰되게 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은 석불이다. 조성연대는 고려말에서 조선초로 추정되는데 높이는 216cm로 머리엔 보간을 쓰고 오른팔을 올려 가슴에 붙이고, 완팔을 구부려 배 위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전설에 의하며 서해로 통하는 중국 사신들이 오가는 통로에 세워졌다고도 하고 보원사를 수호하는 비보장승이었다고도 한다.
강댕이미륵불 바로 옆에 하얀 대리석에 이생진 시인의 '아라메길'이 새겨진 아담한 시비가 나그네를 반긴다. 고향을 떠나 평생을 섬과 바다를 떠돌며 시를 쓴 이생진 시인이 고향에 남긴 유일한 흔적이다.
시비를 일별하고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국보 제84호인 용현리 마애삼존불을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가장 뛰어난 백제 후기의 작품으로 평가 된다. 1959년 학계에 알려지기 전 마을 사람들은 마애여래삼존상을 산신령과 산신령의 두 부인으로 보고 건방지게 앉아 있는 둘째 부인에세 첫째부인이 돌을 던지려고 하는 형상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10미터가 넘는 거대한 암벽의 동쪽 면을 깎아 만든 본존과 우 협시보살은 입상이고, 좌 협시 보살은 반가사유상으로 특이한 구도를 갖고 있다. 오전엔 온화한 미소를, 오후엔 근엄한 미소, 저녁엔 넉넉한 미소를 띄며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보이게 한 백제인의 슬기가 놀라울 정도로 돋보이는 마애여래삼존상은 백제의 대표적인 불교미술작품이다.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마애여래삼존상의 흐뭇한 미소를 마주하고 돌아서려니 문득 바다가 그리워진다. 크고 작은 배들이 물이랑을 일구며 지날 때마다 끼룩거리며 날아드는 갈매기떼의 군무가 보고 싶어 삼길포로 향한다. 삼길포는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아라메길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곳이자 사시사철 싱싱한 회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삼길포를 여정에 포함시킨 것은 서산 문학기행의 대미를 장식할 이벤트 때문이다.
이름하여 '갈매기와 함께 만드는 추억의 유람선 여행'이다. 삼길포항에서 유람선을 타코 대산항과 대산임해공단, 대난지도와 소난지도, 당진 도비도를 거쳐 다시 삼길포로 돌아오는 1시간의 유람선 여행은 서산기행의 화룡점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원한 바닷바람 맞으며 유람선이 일군 물이랑을 따라오는 갈매기떼에게 새우깡을 나눠주다 보면 이생진 시인이 왜 바다와 섬을 떠도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유람선이 스치는 섬 풍경을 바라보며 이생진 시인의 '무명도'를 입속에 넣고 되뇌인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 눈으로 살자
지는 해마저도 뜨는 기운으로 받아 안는 서산의 바다 끝으로 서서히 해가 지고 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