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지방엔 때 아닌 폭설로 몸살을 앓는다는데 남녘의 꽃소식은 겨우내 얼어붙은 마음에 봄바람을 마구 불어넣는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날아들어 마음을 흔들어대는 꽃소식 중엔 변산바람꽃 개화 소식도 들어있었다. 변산바람꽃은 1993년 변산반도에서 처음 발견된 우리나라특산종으로 이른 봄, 눈이 녹기도 전에 하얀 꽃망울을 터뜨리는 봄의 전령과도 같은 꽃이다.
2014년 청마의 해를 맞아 첫 기행지로 시인 신석정의 고향 부안을 선택했다. 일찍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가 전남 강진과 함께 답사 1번지로 꼽았던 부안은 조용하고 조촐한 가운데 우리에게 무한한 마음의 평온을 안겨주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다.
호남정맥 줄기에서 떨어져 나와 바다를 향해 내달리다 우뚝 멈춰 선 변산, 그 산과 맞닿은 고요한 서해, 전나무 숲길이 깊은 그늘을 만드는 단정한 내소사, 울금바위를 병풍 삼아 아늑하게 들어앉은 개암사, 켜켜이 쌓인 해식 단애가 신비로운 풍경을 연출하는 격포 채석강, 드넓은 곰소염전과 소박하고 평화로운 갯마을의 서정을 간직한 부안의 자연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그리고 그곳엔 아름다운 자연이 낳은 시인, 신석정(1907~1974)의 숨결이 스며있다. 변산바람꽃 때문에 신석정 시인을 떠올린 것인지, 신석정 시인을 때문에 변산바람꽃이 생각이 난 것인지 선후가 분명하진 않지만 꽃을 만나는 일이나 시인을 만나는 일 모두 가슴 설레는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힌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 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마서요
나와 가치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즈시 타고 나려오면
양지 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때 우리는 어린洋을 몰고 돌아옵니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五月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나리면
꿩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가마귀 높이 날어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함께 고 새빨간 능금을 또옥똑 따지 않으렵니까?
신석정 시인의 고향 부안으로 길을 놓는다. 일찍이 신석정이 유희경, 직소폭포와 더불어 부안삼절이라 일컫던 이매창을 찾은 지 십여 년 만이다. 조선 중기의 기생으로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3대 여류시인으로 꼽혔던 이매창의 무덤을 찾아 술을 따르던 그때는 무덤의 금잔디에 파릇한 새싹이 돋아있던 무르익은 봄이었다. 천한 기생의 몸으로 피붙이 하나 없이 평생 거문고 하나 자식 삼아 살다가 거문고와 함께 부안 땅에 묻힌 이매창. 4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뭇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그녀의 시편들을 읊조리며 새삼 시의 힘을 느끼던 그때의 감회가 부안으로 향하는 차의 가속페달에 자꾸 힘을 얹어준다.
변산반도의 고장 부안을 생각하면 관광지로 유명한 채석강이나 내소사를 떠올리기는 쉬워도 이매창이나 시인 신석정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시 한편을 가슴에 품고 바라보는 풍경은 새로운 감동으로 가슴에 음각되어 평생토록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하기도 한다.
신석정 시인(1907년∼1974)의 본명은 석정(錫正)이다. 아호는 석정(夕汀·釋靜·石汀) 외에 석지영(石志永)·호성(胡星)·소적(蘇笛)을 쓰기도 하였다. 신석정은 1907년 7월 7일 전라북도 부안군 동중리에서 아버지 신기온과 어머니 이윤옥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시인의 생가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지만 다행히 부안읍 선운리에 시인의 숨결이 배어 있는 고택 ‘청구원’이 남아 있다. 전주-부안 4차로 국도의 부안 진입로에 자리 잡은 청구원 맞은편으로 2008년 착공하여 2011년 10월에 개관한 석정문학관이 산뜻하게 단장된 모습으로 방문객을 반긴다.
널찍한 터(1만6870㎡)에 2층으로 지어진 '석정문학관'은 잔디정원과 쉼터까지 아기자기하게 갖춘 문학공원으로 조성되어 신석정의 시 세계와 꼿꼿했던 문학정신을 돌아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석정문학관은 상설·기획전시실과 학예연구실, 교육·세미나실, 수장고까지 갖춰 시인 신석정의 유품을 전시·보관하는데 그치지 않고 지역과 전국의 문인, 학생, 일반인들의 소통·교육 공간으로 활용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문학관 내에는 서정주 강은교 김영랑 등 수많은 문필가로부터 받은 편지를 비롯해 '가난 속에서 흙에 살다 흙에 묻힌 고고함의 인간상'인 신석정을 말해주는 5000여 점의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석정이 1954년 전주로 이사할 때까지 살던 고택 청구원(靑丘園) 주변엔 18세 때 '소적'이라는 필명으로 신문에 실은 첫 작품 '기우는 해'에서 4·19를 앞두고 쓴 '단장(斷腸)서곡'까지 6편의 시가 지역 중견 서예인들에 의해 붓으로 쓰여, 화강석에 새겨져 세워져 있다.
문학관 1층의 상설. 기획 두 전시실엔 그의 시집과 수필집, 육필 원고와 일기, 서화, 지인들과의 편지들이 가득하다. '촛불'(1939)에서 '대바람소리'(1970)까지 석정이 펴낸 시집 5권의 초간본과 유고시집(2007)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 그리고 그가 번역한 당시(唐詩)와 매창시까지 전시되어 있다. 전시장 한편에는 밀랍으로 고인의 인형을 제작, 그가 작업했던 집필실과 서실도 재현해 놓았다. 영상실에선 그의 시와 일대기를 영상과 사진으로 볼 수 있다.
부안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하며 일찍이 망국의 한에 젖어 명리보다 시문의 길을 걷던 신석정은 1924년 4월 19일자 조선일보에 소적이라는 필명으로 〈기우는 해〉를 발표하면서 시인의 길로 들어선 뒤 朝鮮을 비롯하여 東亞, 中央의 지상에 시를 발표하였다.
1930년 상경하여 지금의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 박한영(朴漢永)문하에서 1년 남짓 불전을 연구하며 회람지 「원선(圓線」을 편집하기도 하였으나 전원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귀향하여 1933년 청구원 집을 마련했다.
그곳에서 빈한과 인고의 삶에서도 여러 곳에서 찾아오는 시우들과 문학으로 위안을 삼으며 시 창작에 열중했다.
1939년 첫 시집 「촛불」이 상재되자 김기림은 신석정을 시문학사에 휘황한 횃불을 밝혀든 목가시인이라 말했다. 광복 후에도 선생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시창작과 후생교육으로 일관했다. 6·25사변 이후 태백신문사 고문을 지내다가 1954년 전주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55년부터는 전북대학교에서 시론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1961년에 김제고등학교, 1963년부터 1972년 정년퇴직 때까지는 전주상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67년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라북도지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31년 「시문학」지에 시 〈선물〉을 발표하여 그 잡지의 동인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전개하여 1974년 7월 8일 동아일보에 유고시 「뜰을 그리며」를 남기기까지 장장 반세기의 시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 시문학사에서 이렇게 일생을 오로지 시 창작에만 몰두한 시인은 흔치 않다. 설령 오랜 문단 활동을 지속했다 해도 끝내는 이를 발판으로 권력이나 금력을 탐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신석정은 일생을 교육계에 종사하면서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며 삶을 마감했다.
일제 말 협박 강요하던 창씨개명을 거부하기 위하여 생계를 꾸려야 할 직장도 버리고 군 징집의 위협에 한 동안 잠적할 정도로 일제에 저항적이었다. 문예지에 투고한 작품이 사상불온으로 검열에서 삭제되기도 했고 일문(日文)으로 시 쓰기를 청탁받았으나 ‘차라리 푸른 대’로 살기 위하여 기꺼이 붓을 꺾었던 지조 있는 시인이었다.
반세기 동안 초지일관 지조를 지켰지만 일언지하에 이름 지을 수 있는 시 세계를 고수하지는 않았다. 연의 세계에서 꿈꾸는가 하면 삶의 현장에서 신음소리를 뱉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시문학사는 첫 시집인 「촛불」에서 ‘이 밤이 너무나 길지 않습니까’의 울부짖음은 잊고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의 속삭임만을 기억하여, 선생의 시세계를 ‘목가시’니 ‘전원시’니 하는 한정된 울안에 유폐시켜 놓았다.
신석정 시인은 생활과 시를 하나로 보았다. 생활에서 시를 찾고 시에서 생활을 찾았던 신석정은 생활에서 시를 찾을 땐 친자연적인 목가시인이 되고, 시에서 생활을 찾을 때면 시대적인 참여 시인이 되었다.
한시에서 시적 감성을 길어 올려 시 창작의 에너지로 삼았던 신석정은 시 창작에만 머물지 않고 한시 번역에도 관심을 보여 제대로 된 한시 번역서가 없을 때 선생이 번역한 한시는 교과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 향리 출신인 이매창의 시를 번역하여 지방의 천민 시인으로 잊혀지던 그녀를 조선의 빼어난 시인으로 새로 부각시켰다.
1973년 12월21일 전북문화상 심사 도중 뇌혈전증으로 졸도한 석정은 200일이란 기나긴 시간을 병상에서 투병했으나 1974년 전주 남노송동 비사벌초사에서 향년 예순여덟으로 생을 마감했다.
1939년 처녀시집 「촛불」을 시작으로 1947년 제2시집 「슬픈목가」, 1956년 제3시집 「빙하」, 1967년 제4시집 「산의 서곡」, 그리고 1970년 제5시집 「대바람 소리」등 한국시단에 불후의 공적을 남겼다.
문학관을 돌아보고 청구원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TV방송국에서 크레인까지 동원하여 촬영을 하느라 분주하다. 카메라를 피해 청구원을 돌아보는데 노신사 두 분이 말을 걸어온다. 문학기행 사전답사를 왔노라고 했더니 반색을 하며 명함을 건넨다. 석정문학관 소재호관장과 김환생 사무국장이다. 잠시 인사를 나눈 뒤 매창공원으로 가는 길을 물어 차에 올랐다.
매창이 누구인가. 석정이 “박연폭포, 황진이, 서경덕이 송도삼절이라면 부안삼절은 직소폭포, 매창, 유희경”이라 했다는 그 기생이자 여류 시인이 이매창이다. 피붙이 하나 없던 매창은 평생 거문고를 자식 삼아 살다가 거문고와 함께 이곳 매창뜸에 묻혔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연인이었던 촌음 유희경을 그리며 쓴〈이화우〉는 매창의 대표 시다. 이화우(梨花雨)에서 추풍낙엽으로 이어지는 시간적 이별이 일순간 천리 공간을 뛰어넘어 그리운 임에게로 향하는 이별가의 절창이다. 1586년 부안의 관기로 있던 매창이 천민시인 유희경(1545∼1636)을 만나 사랑을 나누다 이별한 뒤 쓴 이 시조는 <가곡원류>에 실려 있다. 연인과 이별한 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어느 쓸쓸한 가을 저녁, 문득 그리움에 사무쳐 이 시를 썼을 매창의 마음 풍경이 아슴하게 그려진다. 처음 만날 당시 매창은 14세, 유희경은 42세였다(후일 유희경은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참전한 공로로 면천이 된 뒤 종2품 가의대부에까지 이른다). 매창공원엔 이 시비 외에도 오랜 세월 깊은 우정을 나눈 허균이 매창의 죽음을 전해 듣고 쓴 애도의 시와 가람 이병기가 매창의 무덤을 찾아 읊었다는 〈매창뜸〉도 시비로 남아 있다.
매창공원은 원래 매창뜸이라 불리던 공동묘지였다. 그러던 것이 2001년 매창을 기리고 관광객 유치를 위해 매창과 명창 이중선의 묘만 남겨두고 수많은 묘들을 이장한 뒤 공원을 조성하여 시비를 세웠다.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는 매창은 1573년(선조 6년)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었기에 계생(癸生), 또는 계랑(癸娘)이라 하였으며, 향금(香今)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매창은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히며 기생이 되었는데, 이로 보아 어머니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생이 되어 그는 천향(天香)이라는 자(字)와 매창(梅窓)이라는 호(號)를 사용했다. 조선시대 여성들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당호(堂號)를 가진 귀족 여성, 이름만 있는 기생들이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이름, 자, 호까지 지니며 살았던 매창은 몸은 비록 천한 기생의 신분이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사대부 이상의 행세를 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유희경은 한 남자만을 사랑할 수 없는 천한 기생의 신분이었던 이매창에겐 몸과 마음을 다바쳐 진심으로 사랑한 남자였다. 유희경에게도 매창은 자신의 문집인 <촌은집>에 매창을 위해 쓴 시가 7편이나 전할만큼 애틋한 사랑이었다.
서른여덟 해라는 짧은 생을 살았던 매창의 전반기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 유희경이었다면 후반기에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단연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이다. 1601년 스물아홉의 매창은 세곡선을 감독하는 전운판관이란 관리 신분으로 부안에 내려왔던 허균과 첫 만남을 가졌고 이내 마음이 통해 이후 매창이 죽을 때까지 10여년 간 신분을 초월한 벗으로 지냈다.
처음 허균과 만나 종일토록 시를 주고받았던 매창은 그날 잠자리에 기생이었던 조카딸을 들여보낸다. 천하의 바람둥이 허균이 매창을 품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거문고와 시를 쓰는 능력이 탁월한 매창을 오래오래 친구 고 싶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608년 공주목사로 재직하다 파직 당한 허균은 아주 눌러 살 생각으로 부안 변산의 우반골에 정사암에 들어가 칩거한다. 우반골은 1653년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 1673)이 은거하면서 <반계수록>을 저술한 곳이기도 하다. 비록 4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이때도 매창과 시를 주고받으며 교유했다. 학자 중엔 허균이 이곳에서 머물 때 홍길동전을 지었을 것이라 추정하도 한다. 홍길동전의 이상국인 율도국의 모델이 부안의 섬 위도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누구보다도 이매창의 시를 사랑했던 허균은 1610년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에 시 2편을 지었다.
매창이 죽은 지 45년 뒤인 1655년에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졌고, 그로부터 다시 13년 뒤엔 그녀가 지은 수 백편의 시들 중 고을 사람들에 의해 전해오던 시 58편을 부안 고을 아전들이 모아 목판에 새겨 개암사에서<매창집>을 간행하였다. 당시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보아도 한 여인의 시집이 이러한 단행본으로 나온 예는 없다. 시집이 나오자 하도 많은 사람들이 이 시집을 찍어달라고 하여 개암사의 재원이 바닥났다고 전할만큼 그녀의 시집은 당대 베스트셀러였다.
그후 세월이 지나 그의 비석의 글들이 이지러졌으므로 1917년에 부안 시인들의 모임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높이 4척의 비석을 다시 세우고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고 새겼다. 부풍시사에서 매창의 무덤을 돌보기 전까지는 마을의 나뭇꾼들이 서로 벌초를 해오며 무덤을 돌보았다고 한다. 가극단이나 유랑극단이 부안 읍내에 들어와 공연을 할 때에도 그들은 제일 먼저 매창의 무덤을 찾아 한바탕 굿판을 벌이며 그녀를 기렸다.
매창의 시는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이 난다. 평생을 거문고를 끌어안고 사랑 노래만을 부르다가 생을 마친 기생이었지만 그녀의 뛰어난 시편들은 부안 사람들의 자랑이 되고 부안을 문향으로 자리매김하는 데에 초석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매창의 무덤 앞에 술 한 잔 따르고 일어서려니 격포에 둥지를 틀고 시를 쓰는 송수권 시인의 시가 지긋이 가슴을 밟고 간다.
이매창의 무덤 앞에서
송 수 권
이 세상 뜻있는 남자라면 변산에 와서
하룻밤 유숙하고 갈 만하다
허름한 민박집도 많지만
그러나 정작 들러야 할 민박집은 한 군데
지금도 가얏고 소리 끊이지 않고
큰 머리 옥비녀 꽂았는데
머리 풀기를 기다리는 여인
서해 뻘밭을 끓이는 아아 후끈 이는 갯내음
변산 해수욕장을 조금만 비껴 오르면
부안읍 서림공원 그 아랫마을 공동묘지
바다 우렁이 속 같은 고둥껍질 속에
한숨 같은 그녀의 등불이 걸려 있다
온 몸의 근질근질한 피는 서해 노을 속에 뿌리고
서너 물밭 간드러진 물살에
창창하게 피는 낙싯줄
이 세상 남자라면 변산에 와서
하룻밤 그녀의 집에 들러 불 끄고 갈 만하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뻘 속에 코를 처박고 싶은 여름날
아아
이 후끈 이는 갯내음
매창공원을 떠나 다시 신석정의 묘를 찾아간다. 부안읍에서 격포방면으로 가다보면 성황산의 서쪽면과 마주보는 낮은 솔밭산을 볼 수 있는데 석정의 묘가 있는 행안면 역리의 고성산이다. 매창공원에서 10여분 거리다. 도로변에 이정표가 있고, 묘소로 들어가는 마을 초입 벽에는 데뷔작 〈기우는 해〉와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쓴 〈가슴에 지는 낙화 소리〉 시화가 그려져 있다. 시인의 묘소는 조금은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오른 편 위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부인의 묘와 나란히 누워 있다. 묘비의 비문은 사위인 시조시인 최승범이 썼다. 그리고 묘 우측으로 시인의 초상과 함께 ‘소년을 위한 목가牧歌’가 새겨진 웅장하고 멋스런 시비가 새로 세워졌다.
신석정의 문단 활동은 1931년 10월『시문학詩文學』3호에 「선물」을 발표하고, 박용철·정지용·김영랑·김기림 등과 교류를 갖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뒤이어 30년대에 발표된 작품만으로 이루어진『촛불』(1939)을 출간했다. 「임께서 부르시면」,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등의 절창이 들어있는 이 시집은 가히 한국시의 규범으로 꼽힌다. 이 무렵 석정 시의 이상향에 대한 갈구는 ‘오히려 암담한 현실을 이와 같은 아름다운 공간과 대조시켜 놓음으로써 그 어둠을 강조한 것’(정한모)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단지 아름다운 자연만을 읊조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어둠을 껴안는다」나 「이 밤이 너무나 길지 않습니까」 등은 망국의 하늘 아래 영위하는 삶이 저절로 뱉어내는 신음소리라 할 수 있다.
이후 제2시집『슬픈 목가』에 이르러 선생은 한때 잠시 머물던 자연에서 삶의 공간으로 복귀할 것을 다짐하고『촛불』 의 긴 대화체와 ‘어머니’를 결별하게 된다.
이어 8·15 해방과 6·25 및 4·19의 격랑을 치르면서, 여성적 내공성에 기초했던 초기 시의 속삭임에 어느덧 늠연한 기개에 찬 남성적인 목소리가 섞였다. 6·25의 상흔으로 얼어붙은<빙하>속의 심장은 제4시집<산의 서곡>에 이르러 어떤 불의나 비가치와도 겨뤄 이겨내려는 격정적인 기세로 이어진다. 이 무렵에 발표한 「나에게 어둠을 달라」·「전아사」·「쥐구멍에도 햇볕을 보내는 민주주의의 노래」·「영구차의 역사」 등의 작품들이 그 좋은 보기이다.
시인 신석정은 일제 말 협박 강요하던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군 징집의 위협에 한 동안 잠적했다. 1940년 7월<문장>에서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竹로」가 사상불온으로 검열에서 삭제되자 이에 굽히지 않고 ‘푸른 대’를 ‘조각’으로 둔갑시켜 이듬해 3월 「어느 지류에 서서」를 동지에 게재했다. 그러나 막바지에 다다른 일제는<문장>등을 폐간하고 어용지<국민문학>을 출현시켜 일어로 시 쓰기를 청탁했으나, 신석정은 원고청탁서를 찢어버리고 ‘대나무 정신’ 속에서 광복의 날까지 시의 붓을 꺾었다.
“시 정신이 없는 민족, 시 정신이 없는 국가는 흥할 도리가 없다. 시 정신의 바탕이 되는 것이 신념이요 신념은 바로 지조로 통하는 길이다.”라면서 줄곧 지조의 상징으로 ‘푸른 대’를 노래하였다. 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를 좌우명으로 삼았던 그가 ‘단 하나의 뿌리의 시인’으로 지칭되는 까닭이다.
일제 식민 치하에서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표상으로 ‘대’가 내세워졌다면 광복 후 분단의 민족사에서는 ‘산’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초기 시에서 명상하던 산은 역사적 상흔과 간극을 초월하는 미적 충당으로 흡수되면서 항시 가난한 이웃과 통합하려는 다중과 일치된 휴머니즘이 내재된 산으로 변형된다. 이는 한 시인이 시의 호흡을 그 민족의 역사 현실에 밀착시켜 항시 그들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시 정신에서 연유된다고 하겠다.
<대바람의 소리>이후 작고하기까지 4년 동안 발표된 100여 편의 작품들을 보면, 늑대 떼가 울고 있는 「오한」과 승냥이 떼가 울고 있는 「수선화가 피더니」 등에서 그 시제야 어떻든 현실과의 준열한 대결의 양상을 다시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석정은 온몸으로 자연을 사랑하는 한편, 역사와 현실의 증언자가 되기 위해선 ‘산도 강도 바다도 소리 없이 묻히는 어둠을 달라’며 역으로 그 자연을 거부하는 데도 인색하지 않았다. 그의 시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자연을 통해 보편적으로 소유하려는 미적 이상향을 추구하는 낙원지향의 자아와 식민지 치하에서부터 끊임없이 정반합의 반복적 파도 속에 다져온 시대양심의 구현체로서의 자아가 이루어낸 갈등과 통합의 문법이라 할 수 있다. 국 시의 자연서정과 현실 참여라는 이원적 경험을 외롭게 한 몸으로 흡수 통합하고자 한 석정은 한국시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시인이었다.
아름다운 자연은 시인을 키우고 시인은 아름다운 자연을 시로 빚어낸다. 이매창과 신석정 같은 훌륭한 시인을 탄생 시킨 것만으로도 부안은 매혹적인 여행지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제 시인을 키워낸 산과 바다, 들판이 조화롭게 어울려 ‘서해안의 진주’로 불리는 부안의 자연을 만날 차례다.
30번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달리다 보면 고사포해수욕장이 보인다. 이곳에서 국도를 버리고 해변 도로 표지판을 따라가면 모세의 기적처럼 바다가 갈라지며 육지와 연결되는 하섬, 해안을 따라 1.5km 정도 이어지는 변산반도국립공원 격포 자연관찰로, 적벽강, 채석강 등이 차례로 이어지고, 유홍준 교수가 환상의 해안 드라이브 코스라고 칭찬한 ‘격포에서 모항 지나 내소사를 거쳐 곰소로 가는 길’이 차례로 펼쳐진다.
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내딛는 걸음마다 문학의 향기가 짙게 배어나는 곳이지만 허기는 그 모든 느낌을 단숨에 지워 버린다. 부안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인 바지락죽의 맛집을 찾아 차를 달렸다. 입에 착착 달라붙는 바지락 죽과 뽕 막걸리를 곁들여 허기를 달래고 서둘러 채석강을 향한다.
엷은 먹물이 번진 한지처럼 하늘은 흐려 있었고 내심 파란 바다를 기대했지만 물빛은 하늘만큼이나 칙칙했다. 하지만 변산에선 물빛이 흐려도, 날이 좀 궂어도 별 상관없다. ‘맥없이 찡한 구석이 있는 변산의 바다는 눈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곳이다. 변산을 속으로 깊이 느낀 문인들의 시 한수, 책 한권 들고 가면 더없이 좋은 곳이다.
바닷길인 외변산 제1의 명소는 뭐니뭐니해도 격포해변이다. 여느 서해안과 달리 갯벌이 없고 수심이 깊다. 그곳에 가면 해안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채석강과 적벽강이 유혹한다. 약 7천만 년 전 자연이 빚은 ‘퇴적예술’의 걸작품이다. 멀리서 보면 수만 권의 책을 쌓아 올린 듯한 채석강은 퇴적암 층리(켜)가 차곡차곡 쌓여 이뤄진 절벽으로, 격포항 오른쪽의 닭이봉을 중심으로 해수욕장까지 길게 펼쳐져 있다.
채석강은 당나라의 시성 이태백이 술에 취해 뱃놀이를 하던 중 물에 비친 달의 그림자를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중국의 채석강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머리를 식히러 온 여행객들은 해산물을 파는 행상 곁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멀리 위도가 보이는 앞바다에선 작은 고깃배가 물결을 타고 넘실거린다. 채석강은 우리나라 3대 일몰 명소 중 하나로 꼽힐 만큼 해넘이가 아름다운 곳이다.
몇 해 전에도 이곳으로 낙조를 보러 왔었다. 저녁 햇살을 받은 바다가 은빛 카펫을 펼쳐놓은 듯 윤슬로 반짝이고, 해가 가까워질수록 금빛에서 주홍으로, 다시 진홍빛으로 출렁거리는 바다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하지만 그런 행운을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낙조를 못 본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내소사로 향한다.
많은 생각들이 실타래처럼 엉킨다. 부안은 국내 제1호 노동자시인으로 통하는 박영근이 나고 자란 땅이기도 하다. 민중가요로 잘 알려진 노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가사가 박 시인의 시다.
천하 명찰 내소사에서는 조선 시대 김시습에서부터 현대소설가 윤흥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인이 머물렀다.
특히 소설 '장마'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등을 쓴 윤흥길은 1960년대 후반 내소사의 향기에 반해 일부러 전근을 신청, 사찰 앞 초등학교로 직장을 옮기고 아예 절에서 먹고 자면서 습작을 했다. 방학 때조차 지척에 있는 정읍 고향집에도 가지 않고 습작을 한 끝에 그는 1968년 중앙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돼 등단했다. 곰소항과 곰소염전은 인근 정읍 출신인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에서부터 올봄 출간된 박범신의 소설 '소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소설과 시 영화에 등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변산하면 흔히 바닷가를 떠올리지만 변산은 외변산과 내변산으로 나뉜다. 채석강이 있는 바닷가가 외변산이고 내변산은 내륙으로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산봉우리와 그 사이 개암사, 내소사, 월명암 등 유서 깊은 고찰을 품었다. 깨끗한 골짜기와 아름다운 숲길,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까지 두루 갖추었다.
곰소만을 사이에 두고 북쪽 부안은 신석정, 남쪽 고창은 서정주의 고장이다. 신석정보다 여덟 살 아래인 서정주는 문학청년 시절부터 신석정을 친형처럼 따랐다고 한다. 마지막 기행지인 내소사일주문을 들어서며 서정주의 ‘내소사 대웅전 단청’이란 산문시를 떠올린다.
내소사 대웅보전 단청은 사람의 힘으로도 호랑이의 힘으로도 칠하다가 칠하다가 아무래도 힘이 모자라 다 못 칠하고 그대로 남겨놓은 것이다. 내벽 서쪽의 맨 위쯤 앉아 참선하고 있는 선사, 선사 옆 아무 것도 칠하지 못하고 너무나 휑하니 비워둔 미완성의 공백을 가보아라. 그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대웅보전을 지어 놓고 마지막으로 단청사를 찾고 있을 때, 어떤 해어스럼제 성명도 모르는 한 나그네가 서로부터 와서 이 단청을 맡아 겉을 다 칠하고 보전 안으로 들어갔는데, 문고리를 안으로 단단히 걸어 잠그며 말했었다.
“내가 다 칠해 끝내고 나올 때까지는 누구도 절대로 들여다보지 마라.”
그런데 일에 폐는 속(俗)에서나 절간에서나 언제나 방정맞은 사람이 끼치는 것이다. 어느 방정맞은 중 하나가 그만 못 참아 어느 때 슬그머니 다가가서 뚫어진 창구멍 사이로 그 속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나그네는 안 보이고 이쁜 새 한 마리가 천정을 파닥거리고 날아다니면서 부리에 문 붓으로 제몸에서 나는 물감을 곱게곱게 단청해나가고 있었는데, 들여다보는 사람 기척에
“아앙”
소리치며 떨어져내려 마루바닥에 납작 사지를 뻗고 늘어지는 걸 보니 그건 커어다란 한 마리 불 호랑이였다.
“대호스님! 대호스님! 어서 일어나시게라우!”
중들은 이곳 사투리로 그 호랑이를 동문(同門) 대우를 해서 불러댔지만 영 그만이어서, 할 수 없이 그럼 내생(來生)에나 소생(蘇生)하라고 이 절 이름을 내소사(來蘇寺)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 단청하다가 미처 다 못한 그 빈 공간을 향해 벌써 여러 백년의 아침과 저녁마다 절하고 또 절하고 내려오고만 있는 것이다.
- 서정주의 산문시 ‘내소사 대웅전 단청’ 전문 -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에 창건된 1300년 역사를 간직한 절이다. 원래 이름은 소래사였다. 산문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하늘 향해 쭉쭉 뻗은 전나무가 줄지어 선 600여ｍ의 청정한 전나무 숲길이 맑은 향기를 뿜어내며 나그네를 반긴다.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면 단청을 들이지 않은 원목 그대로의 절 건물이 담백한 운치를 풍긴다. 대웅보전은 조선 인조 때 만든 불전으로 못을 쓰지 않고 나무를 끼워 만들었다. 특히 정면 창호문의 꽃문살을 보면 누구나 감탄을 연발한다. 나무를 손으로 깎고 다듬어 정교한 연꽃과 국화꽃 무늬가 눈길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이 밖에도 경내에는 신라양식의 3층 석탑과 봉래루, 미려한 모란당초문으로 장식된 고려 동종, 염주알로 쓰이는 둥근 열매가 맺히는 300년 된 보리수가 우뚝 서 있다. 대웅전 앞마당에 산수유 한 그루 지난 해 빨간 열매를 매단 채 노란 꽃망울을 부풀리고 있다. 며칠만 더 햇살이 머물다 가면 꽃이 필 것이다. 그때 봄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좋은 사람들과 함께 거닐 생각을 하니 내 안에도 꽃 한 송이 벙그는 것만 같다.
변산대교 근처에는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가 새겨진 신석정 시비가 서 있다. 다시 떠나온 서울을 향해 돌아가려니 노을 지는 변산의 풍광에 반해 이곳에 눌러앉은 송수권 시인의 시 ‘적막한 바닷가’의 시구가 가슴을 쳐온다.
‘더러는 비워 놓고 살 일이다/하루에 한 번씩/저 뻘밭이 갯물을 비우듯이/더러는 그리워하며 살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