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이 풀리는 내음새
강바람은
산 짐승의 우는 소릴 불러
다 녹지 않은 얼음장 울멍울멍 떠내려간다.
진종일
나룻가에 서성거린다.
행인의 손을 쥐면 따뜻하리라.
고향 가까운 주막에 들러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양귀비 끓여다 놓고
주인집 늙은이는 공연히 눈물지운다.
간간히 잔나비 우는 산기슭에는
아직도 무덤속에 조상이 잠자고
설레는 바람이 가랑잎을 휩쓸어 간다.
예제로 떠도는 장꾼들이여
상고하면 오가는 길에
혹여나 보셨나이까
전나무 우거진 마을
집집마다 누룩을 디디는 소리, 누룩이 뜨는 내음새...
- 오장환의 <고향 앞에서> -
피반령에 올라서니 골을 타고 올라온 바람이 나를 반긴다. 피반령은 충북 청주에서 보은으로 가는 25번 국도에 있는 청원군과 보은군의 군계를 가르는 고갯길이다. 지금은 청원상주고속도로가 시원스레 뚫려 있지만 예전에는 충북 보은을 찾으려면 청주를 지나 피반령을 넘어야만 했다. 단풍이 들기 시작한 산자락 사이로 뱀처럼 휘어진 길이 산 아래로 길게 이어져 있다. 저 아래 어디쯤에 그의 고향이 있을 것이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고 골이 깊으면 바람도 긴 법이라 했던가. 바람에 등 떠밀리듯 산 아래를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피반령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산천을 살펴본 뒤 장차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와 명나라에 큰 화가 미칠 것이라 여겨 이곳 피반령에 이르러 군사를 시켜 산허리를 끊으려 하자 피가 쏟아져 나왔다는 전설의 고개다.
회인(懷仁) 고을에 부임하는 사또마다 피반령 고갯마루에서 첩첩산중의 제 고을을 내려다보며 관원살이가 아니라 귀양살이를 하러 왔구나 하며 눈물을 지었다가 돌아갈 때에는 후한 인심에 또 한 번 눈물 지었다는 바로 그 고개다.
굳이 보은 땅을 찾아가며 험한 피반령을 넘은 것은 오장환문학관과 시인 오장환의 생가터를 둘러보기 위해서다. 초행길임에도 파출소와 주유소를 지나면 잇달아 식당이며 가게들이 나타나는거리 풍경은 여느 면소재지의 풍경처럼 전혀 낯설지 않다. 면사무소 쪽으로 가다 표지판을 보고 오른 쪽으로 차 머리를 돌리면 시인 오장환의 생가 터와 그의 문학관이 나그네를 반긴다. 너른 터에 자리잡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문학관과 문학관 우측으로 깔끔하게 복원된 초가지붕의 아담한 생가가 사립문을 반쯤 열어 놓은 채 가을볕 아래 졸고 있다.
1918년 이곳 보은에서 태어난 오장환 시인은 아직 살아 있다면 95세가 되지만, 그는 6·25전쟁 중 서른넷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이 두메산골에서 자란 그가 어린 나이에 서울로 올라가 휘문학교를 다녔으니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 난 셈이다. 휘문고보 시절 열다섯 어린 나이에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으니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3천재로 불릴 만큼 문재 또한 빼어난 시인이었다.
1931년 휘문고보에 입학하여 정지용 시인을 만나 시를 배우고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휘문> 교지에 첫 작품인 <아침>과 <화염>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이후 <시인부락>. <낭만>. <자오선> 등의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통해 <성벽>과 <헌사>를 통해 ‘시단의 새로운 왕이 나왔다.’는 찬사를 듣게 된다.
1930년대에 유행하던 모더니즘 경향을 좇으며 작품 활동을 한 그는 주로 서정적인 시를 썼다. 그러나 광복 이후에는 급격한 사상적 변모를 보였다.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해 계급의식을 담은 시를 쓰는가 하면, 좌익 계통의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결국 월북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오장환(1918∼1951)은 병상의 시인이었다. 그가 활동한 1930∼40년대 일제 치하와 해방기라는 시대적 배경 자체가 당대 문학의 병상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는 병상에서 많은 작품을 썼고 해방도 병상에서 맞이했다. “8월 15일 밤에 나는 병원에서 울었다./ 너희들은 다 같은 기쁨에/ 내가 운 줄 알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일본 천황의 방송도,/ 기쁨에 넘치는 소문도,/ 내게는 곧이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병든 탕아로/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고 원통하였다.”(‘병든 서울’ 부분)
해방 직후에 쓴 ‘병든 서울’은 그의 세 번째 시집 제목이기도 하다. 해방을 전후해 그는 신장병 치료차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당시 그를 병문안 온 지인 가운데는 화가 이중섭도 있었다. 시인 김광균(1914∼1993)은 해방 후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던 오장환을 문병하러 갔다가 이중섭을 처음 만난 뒤 절친한 사이가 돼 이후 이중섭을 알게 모르게 도와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장환은 1918년 충북 보은군 회북면 중앙리에서 아버지 오학근과 어머니 한학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친모가 오학근의 첩이었던 관계로 서자의 슬픔을 안고 세상에 나왔다. 193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던 해, 아버지의 본처가 사망한 것을 계기로 적출이 되었다. 어쩌면 그가 해묵은 전통인 족보를 거부하고 무산계급을 추종하게 됐던 것은 태생적 필연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친모에게만은 효자 중 효자였다.
어머니 서울에 오시다.
탕아 돌아가는 게
아니라
늙으신 어머니 병든 자식을 찾아오시다.
(중략)
-이것아, 어서 돌아가자
병든 것은 너뿐이 아니다. 온 서울이 병이 들었다.
생각만 하여도 무섭지 않으냐
대궐 안의 윤비를 어디로 가시라고
글쎄 그게 가로 채였다는구나.
시골에서 땅이나 파는 어머니
이제는 자식까지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신다.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나는 그런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어머니 서울에 오시다’ 부분-
1946년 3월 12일에 쓴 이 시를 마지막으로 서울대병원에서 퇴원한 그는 1947년 6∼7월 문화공작단으로 활동했다. 남조선 문화단체총연맹 소속 여덟 개 단체 예술가 200명 가운데 일원이 돼 전국방방곡곡을 돌았던 그는 이 순회공연의 목적을 수기 ‘남조선의 문화예술’에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속개에서 더욱이 비등된 민주 역량과 이를 축하하기 위함”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하지만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문화예술인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테러가 자행되면서 당한 집단구타와 신장병으로 몸을 가눌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오장환은 1947년 하반기에 월북, 평안남도 남포에 있는 소련적십자병원에 입원한다. 오장환은 이후 소련군정의 배려로 모스크바 볼킨병원으로 옮겨가지만 그의 모스크바행에 대해선 아직까지 속 시원히 밝혀진 게 없다. 유일한 단서가 1950년 5월 북한에서 발행된 그의 다섯 번째 시집 ‘붉은 기’이다. ‘붉은 기’에 따르면 오장환은 1948년 12월 열차 편으로 하바롭스크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1929년 외국의 간섭군과 싸워 하바롭스크를 사수한 인민 영웅 김유천 거리를 둘러본 뒤 ‘하바롭스크 크라이(구역) 콤(코뮤니스트) 강사실’에서 유숙하며 항공 스케줄을 기다리다가 이윽고 32인승 항공편으로 시베리아 상공을 날아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붉은 기’ 수록 시편 가운데 가장 늦은 창작 일자는 ‘크라스노야르스크’를 쓴 1949년 8월이다. 그는 시베리아횡단열차 편으로 크라스노야르스크를 거쳐 귀국했던 것이다. 오장환이 언제 어디에서 러시아어를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1946년 6월 서울 동향사에서 ‘예세닌 시집’을 번역 출간했을 만큼 그는 능통한 러시아어 구사자였다.
1949년 가족과 함께 북으로 간 시인 조운(1900∼?)은 시집 ‘붉은 기’ 발문에 이렇게 적었다. “장환이 소련에 다녀왔다. ‘나는 언제나 한번 가보나!’하고 모두들 동경하는 소련에 다녀온 장환이 여장을 풀면서 우리들 앞에 선물로 내놓은 것이 이 시집이다. 장환의 소련행은 우리 공화국을 대표한 사절도 아니요 문화연구를 위한 시찰도 아니요 호화로운 만유(漫遊)나 우정의 시를 지으려고 간 것은 더욱 아니다. 우방의 한 젊은 예술가에게까지도 알뜰히 관심을 놓치지 않는 위대하고도 자애로운 소련은 우리들의 아끼는 장환, 이 젊은 시인의 병이 다스리기 어려운 중세임을 알자 고쳐주려고 데려간 것이다. 위대한 소련이 예외의 우우(優遇)와 분에 넘치는 온정에 장환은 병구를 이끌고 모스크바의 품에 안기었던 것이다. -1950년 5월.”
하지만 오장환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1951년 3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한국전쟁 중 오장환과 우연히 조우했던 김광균에 따르면 그는 북으로 가서도 감시 대상이었다. 보위부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들러 보고를 받고 있어 감옥살이하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는 것이다．
1988년, 월북문인에 대한 해금조치가 이루어지면서 논의조차 불가능했던 오장환 문학세계에 대한 연구논문을 비롯하여 전집.평론, 시집 등이 발간되었다. 1996년 ‘제1회 오장환문학제’가 개최되어 매년 기념행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2006년 그의 고향에 문을 연 오장환문학관은 많은 문인들과 문학애호가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문학관 옆에 새로 복원된 시인의 생가는 아담한 초옥이다. 담장을 타고 오른 박넝쿨은 탐스런 박을 자랑처럼 내어달고 부엌 아궁이에선 장작불이 타고 있었다. 호기심에 열어본 가마솥 안엔 감자떡과 고구마 등이 익어가며 나그네의 시장기를 돋운다. 문학관 문화해설사 임선빈 선생이 건네준 고구마와 시인의 시 ‘나의 노래’ 탁본을 배낭 속에 꾸려 넣고 총총히 문학관을 떠나왔다.
오장환문학관을 나와 회인 I.C에서 청원.상주간 고속도로로 차를 올렸다가 속리산 I.C를 빠져나오면 장내리에 닿는다. 조선시대에 이곳에 마장(馬場)이 있었는데 그 안쪽이라는 뜻으로 장내 또는 장안이라는 이름을 얻은 마을이다. 장내리는 속리산에서 흘러내린 삼가천의 맑은 물이 큰 개울을 이루고 개울 중간에 돌과 흙이 모여 삼각주를 이루어 배 모양의 섬으로 된 마을인데 그 끝자락 쯤에 선병국 가옥이 있다.
소나무와 상수리 나무 같은 키 큰 교목들이 우거진 드넓은 터에 궁궐 같은 아흔아홉 칸 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집터가 자리잡은 곳이 풍수지리학상으로 하회마을처럼 연꽃이 물에 뜬 듯한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명당이라고 한다. 이런 곳에 터를 잡으면 자손이 번성하고 장수를 누리며 모두 고귀하고 화려한 생활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마을에는 잘 지어진 조선집 몇 채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한껏 돋보이는 집이 ‘선병국(宣炳國) 가옥’이다. 중요민속자료 제134호로 지정된 이 집은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숲을 이룬 중앙에 아흔아홉 칸의 큰 기와집이다.
조선시대에는 민가를 지을 때 조정으로부터 그 집의 규모와 배치에 대해 규제를 받았다. 세종 13년에 공포된 가사 규제에 따르면 신분에 따라 서민들은 10칸까지, 대군은 60칸까지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그러한 규제가 무너지고 각자의 재력과 신분에 따라 집을 짓게 되었다. 답사 때 만나는 많은 한옥들이 그때 지은 집인데 선병국 가옥도 그런 혜택(?) 속에서 지어졌다.
1919~1921년에 지어진 선병국 가옥은 전통적 건축기법에서 벗어나 건물의 칸이나 높이 등을 크게 하던 시기의 대표적 건물로 알려져 있다 집은 안채와 사랑채, 사당 세 공간으로 나뉘어져 안담이 그 각각의 공간들을 두르고 바깥 담이 전체를 크게 둘러싸고 있다. 잔디가 깔린 마당과 붉은 벽돌로 축대를 쌓은 모습 등은 전통의 고택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색적이다.
당시는 개화의 물결을 타고 이른바 개량식 한옥의 구조가 시험되던 때이기도 해서 재래식으로 질박하게 짓기보다는 진취적인 기상으로 새로운 한옥의 완성을 시도했다고 한다. 그와 같은 시대적인 배경에서 특성 있게 지어졌으므로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된 이 집은 1980년 수해 때 돌각 담들이 무너져서 원래의 아늑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본래는 대문 맞 좌우로 길게 달린 바깥 행랑채가 여러 구비 꺾여 사랑채로 들어가는 중문채로 이어져 있었고 그 안에 여러 채의 부속 건물들이 있었으나 6ㆍ25동란 이후 무너져서 지금은 볼 수 없다.
이 집을 지은 선병국의 부친 선정훈은 전남 고흥에서 크게 부를 쌓은 뒤 명당을 찾아 타향인 이곳에 집을 지었다고 전한다. 그는 구례의 99칸 고택 운조루를 벤치마킹하고 경복궁을 중수했던 당대 최고 목수들만 가려 뽑아 후하게 대접하면서 이 집을 지었다고 하니 당시 그의 재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짐작이 간다.
보성 선씨의 원래 고향은 전남 고흥군 금산면이다. 100여 년 전에 18대 손인 영홍공이 명당을 찾아 봉은으로 이사했다. 350년 내력을 가진 종가의 씨간장이 아흔아홉 칸 대가의 위용을 떠받치고 있다. 무릇 큰 집안의 이야기는 묵은 장맛부터다. 선영홍 종가에는 맛의 바탕이 스며 있다.
영홍공은 관선정이라는 무료교육기관을 열고,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후학을 양성했다.
솟을대문과 조선 소나무 숲은 옛날의 영화를 그대로 간직한 듯 보이지만 살아 있는 사람은 시절을 흐름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듯 가옥은 전통찻집으로, 전통장 체험장으로 바뀌어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고풍스런 가옥을 둘러보며 가을 정취에 심취했다가 시장끼를 느껴 허기를 메울 요량으로 복해가든을 찾았다. 복해가든은 선병국과 형제지간인 선병우 가옥의 또다른 이름이다. 선병국 가옥과 같은 시기에 지어진 선병우 가옥이 시절따라 복해가든이란 상호를 내어걸었기 때문이다.
종가음식은 그 지역에서 나는 신선한 농산물을 사용한 향토음식이며, 지역 공동체의 구성원이 함께 모여 음식을 만들고, 손님에게는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정의 문화가 담겨 있다.
종가의 음식 솜씨가 담긴 속리산에서 채취한 버섯으로 끓인 버섯매운탕이 일품이다. 음식도 정갈하고 반찬 또한 맛깔스럽다. 집에서 직접 담갔다는 동동주는 첫 맛이 술 못하는 나의 입맛마저 끌어당길만큼 달착지근한데 숙취가 전혀 없다는 게 안주인의 설명이다.
보은 읍소재지를 빠져나와 속리산으로 가다보면 멀지 않은 곳에 산허리를 두르고 있는 산성이 눈에 들어온다. 수년 전 복원 작업을 마친 사적 제235호인 삼년산성(三年山城)이다. 삼국시대 때 보은의 지명이 삼년군이어서 이 이름을 얻었다는 설과 성을 쌓는 데 3년이 걸려 삼년산성이란 이름이 유래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漁岩里)의 최북단에 위치한 삼년산성은 우리나라 고대의 축성사를 규명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성이다. 즉 삼국시대의 다른 성과는 달리 삼국사기 에 축성연대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어 당시 신라의 축성술과 공역기간, 그리고 추풍령로를 통한 신라의 북진과정을 고찰하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년산성이 처음 축조된 것은 신라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13년(470)의 일이다. 해발 350m 정도로 그리 높지 않은 산에 자리 잡았지만 막상 성에 올라가 보면 사방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10～15m에 달하는 성의 높이는 우리나라의 어디를 가도 볼 수 없는 삼년산성만이 가지는 위용이다.
성문 앞에 차를 두고 산책 삼아 성벽을 따라 천천히 걸어보는 일이 근사하다. 산길이 완만하고 주위가 고즈넉해서 더욱 그렇다. 여인의 눈썹을 닮은 반달 형국의 아미지(蛾眉池)라는 연못 옆을 비롯하여 5개소의 우물터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이 주위의 암벽에는 옥필(玉筆)·유사암(有의 바위에는·아미지(蛾眉池) 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데, 김생(金生)의 필체로 전해 오지만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다.
성 쌓기에 얽힌 비극적 전설은 이곳에도 있다. 장사로 태어난 오누이가 서로 힘자랑을 하고 결국 어머니가 아들 편을 들어 누이를 죽게 한다는 이야기다. 오빠보다 먼저 성을 쌓은 누이가 엄마의 해코지로 죽임을 당한다는 이 전설 속에도 '남존여비'의 뿌리 깊은 습속이 배어 있다.
수직으로 쌓아올린 삼년산성에 올라 보은 시내를 굽어보려니 바람결에 옛 군사들의 함성이 들리는 것만 같다. 성벽이란 안쪽에 있는 사람들에겐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주지만 외면당하는 존재들에겐 소외의 벽이 되기도 한다. 오장환의 '성벽'이란 시를 떠올리며 산성을 내려왔다.
세세전대만년성(世世傳代萬年盛)하리라는 성벽은 편협한 야심처럼 검고 빽빽하거니 그러나 보수는 진보를 허락치 않아 뜨거운 물 끼얹고 고추가루 뿌리던 성벽은 오래인 휴식에 인제는 이끼와 등넝쿨이 서로 엉키어 면도 않은 터거리처럼 지저분하도다.
- 오장환의 '성벽' -
가을 해는 어느덧 설핏 기울어 나그네의 발길을 재촉한다. 충북 보은은 조선 말 우리 근대사에서 두 번의 뚜렷한 족적을 남긴다. 모두 동학과 관련해서다. 첫번 째가 1893년 2월 복합상소(교조신원운동)직 후 2대 교주 최시형에 의해 전국의 동학교도들이 모여든 보은 취회이고, 두번 째는 동학혁명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북실전투였다.
단순한 신원교조운동으로 시작하여 척양척왜라는 반외세 운동으로 번졌던 동학혁명은 대규모의 보은취회를 통해 그 뜻을 분명히 했다. 보은취회에 모인 동학교도들의 수는 기록마다 다르나 1인 당 돈 1푼씩 걷었는데 모두 2백 3십냥이 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적어도 2만 3천명 이상이 모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보은읍에서 속리산 방향으로 승용차로 십여 분쯤 가다보면 동학농민기념공원이 있다. 이 기념공원은 십여 년 전만 해도 포장도 되지 않은 좁은 도로였으나 말티재를 넘지 않고 속리산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을 보은군이 새로 만들면서 속리산 터널 가기 전 성족리 일대에 이 공원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한국 최초의 민중봉기였던 동학혁명을 기리기 위한 기념공원이 이곳에 들어선 것은 동학혁명의 마지막 격전지로 북실전투에서 동학교도 2,500여 명이 장렬히 전사하여 집단 매장된 뼈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 역사의 중심으로 두 번이나 떠올랐던 보은 지역은 동학 제2세교주 최시형이 도소(都所)를 둔 곳이었고 교통이 편하여 삼남의 교도들이 오가기 쉬웠던 까닭에 1894녀 또다시 동학의 본부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흐드러지게 핀 노란 산국향을 따라 나무계단을 내려오는데 잠자리를 나꿔 챈 사마귀 한 마리가 혹여 제 먹잇감을 빼앗길까 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뒷걸음을 친다. 약육강식의 생존의 룰이 적용되는 것은 비단 야생의 세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기념공원을 돌아나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 편한 길을 버리고 차머리를 돌려 속리산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말티고개를 넘는다. 속리산이 여느 산과 달리 신비롭게 여겨지는 것은 속리(俗離)라는 이름과 함께 열두 굽이 이 험준한 산길을 거치는 통과의식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 태조는 물로 조선조의 태종, 세조 임금이 이곳으로 행차했다는 얘기가 있으니 말티재는 ‘왕의 고갯길’인 셈이다.
형제들까지 죽이고 옥좌에 오른 태종 임금은 평생 그 죄의식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진다. 등극 3년째 되던 해, 그는 살해된 두 아우 왕자들의 원혼을 달래는 천도불사를 속리산 법주사에서 거행했다. 그 덕일까. 마음속의 아픔과 두려움도 말끔히 가셨다고 한다. 하여 지방 행정구역을 개편하던 때에 종전까지 부르던 보령(保齡)이란 지명을 ‘보은(報恩)’으로 고쳤다고 전한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게 마련인데 가파른 산길을 높이 올랐건만 내려가는 길은 완만히 고도를 늦추는가 싶으면 이내 평지가 나온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분지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특히 문장대 편 산봉들의 위용이 대단하다. 옛 시대의 비기(秘記)들이 저마다 이곳을 세상의 환난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의 하나로 꼽은 이유도 알 만하다.
왕의 고갯길을 넘어서니 정이품송이 정중하게 나그네를 맞이한다. 오랜 세얼 병충해에 시달리고 1993년 강풍에 가지가 꺾여 비록 불구의 몸이 되었어도 6백여 년의 풍상을 이겨낸 노송은 의연하기만 하다. 세조의 법주사 행차길에 가마에 가지가 걸릴 듯 하자 슬쩍 가지를 들어 정이품의 벼슬을 받았다는 천연기념물 103호인 정이품송은 속리산을 찾는 나그네에겐 더없이 반가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훤칠한 산이 있으니 그 품에 어울리는 큰 도량이 없을 수 없다. 떡갈나무, 단풍나무, 소나무들이 숲을 이뤄 터널을 이룬 오리숲은 법주사의 진입로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숲길이다. 이 길을 걷다보면 어느 순간 세상을 떠나온 듯한 속리의 느낌에 빠지게 된다. 그 숲길이 끝나는 곳에 호서제일대가람 법주사가 있다.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된 절은 긴 세월을 지나오면서 여러 차례 중건과 중수를 거쳤다. 정유재란 때는 승병들의 본거지라 하여 왜군들이 절간을 모조리 불태워버리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본래의 법주사 가람 배치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하는 화엄신앙축과 용화보전을 중심으로 하는 미륵신앙축이 팔상전에서 직각으로 교차하게 돼 있었다고 한다. 그랬던 것이 현재의 금동미륵대불이 조성되면서 그 배치가 흩어졌다고 하는데 팔상전은 복원 공사중이라 구경할 수가 없고 ‘동양 최대’ 라는 대불만이 팔상전을 굽어보며 저녁 햇살을 받고 엷은 미소를 짓고 있다.
욕심같아선 세조가 시를 읊었다는 문장대까지 오르고 싶지만 굳이 산을 오를 일은 아니다. 국보 55호인 팔상전을 못보았다고 아쉬워 할 일도 아니다. 쌍사자석등이나 석련지, 사천왕석등 같은 보물들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지만 가을 산사에서는 낡은 기와 담장 위에서 저녁햇살을 받고 있는 담쟁이 이파리에서도 속리의 어여쁨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느린 걸음으로 석양빛에 한층 붉어진 단풍나무 오리숲을 되짚어 나오다 보면 대학시절 빼고는 보은을 떠난 적 없는 송찬호 시인의 시가 개울물소리를 따라오는 것만 같다.
이 곳에 숨어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병이 깊어 이제 짐승이 다 되었습니다
이름모를 꽃과 새들 나무와 숲들 병든 세계에 끌려 헤매다 보면
때로 약 먹는 일조차 잊고 지내곤 한답니다
가만,땅에 엎드려 귀대고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를 듣습니다
종종 세상의 시험에 실패하고 이 곳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몇 번씩 세상에 나아가 실패하고 약을 먹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리우면 당신들의 세상 가까이
내려갔다 돌아오기도 한답니다
지난번 보내 주신 약꾸러미 신문 한다발 잘 받아 보았습니다
앞으로는 소식 주지 마십시오
병이 깊을 대로 깊어 이제 약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병든 세계를 헤매다보면
어느덧 사람들 속에 가 있게 될테니까요
- 송찬호의 '이 곳에 숨어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 全文 -
가을과 겨울이 자리바꿈 하는 스산한 계절, 훌쩍 떠나온 보은으로의 문학기행은 다시 한 번 속리의 경계에 나를 세운다. -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