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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색의향기
/ 작성일 : 2013-05-29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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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백승훈
제 74회 길 따라 떠나는 문학기행
-작가 한승원과 이청준의 전남 장흥
이청준 한승 원
그래, 누군들 그 따듯한 남쪽 마을을 향한 그리움이
아지랑이처럼 가물가물 일지 않겠는가
내 손과 발과 머리털에서
내 모든 생각들의 시원이 되어
여전히 봄날 철쭉은 붉게 타오르고
늦가을 바람에 억새가 서걱이는
정남진
-김석중의 '누군들 따뜻한 남쪽 마을이 그립지 않으랴' 중에서 -
답사를 떠나기 전날 밤 통화를 했던 별곡문학동인회와 기봉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는 소설가 김석중 선생의 글처럼 전남 장흥군은 '정남진(正南津)'이다. 서울 광화문에서 남쪽으로 똑바로 내려오면 닿는 곳이 바로 장흥이다.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김석중 선생과 만나기로 한 장흥문화예술회관을 내비게이션에 입력하니 주행거리 417km라고 표시창에 뜬다. 천리가 훌쩍 넘는 아득한 장거리다. 혼자 가기엔 먼길이지만 길라잡이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다녀오는 수 밖에.
다행인 것은 딱히 길라잡이가 아니라 해도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장흥은 누구나 찾아가고픈 문학의 향기가 슴배인 문림의향(文林義鄕)이란 것이다. 고속도로에 차를 올리고 차창을 여니 아직 닿으려면 멀기만 한 장흥의 문향인 양 아카시아 향기가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80년대 초, 내가 군에서 제대 후에 첫 직장을 잡고 처음 구입했던 책이 '제3세대 문학전집'이었다. 당시 중진급 작가들의 소설문학을 중심으로 기획 출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24권 짜리 전집이다. 이 전집 속에 군 단위 한 지역에서 세 명의 작가가 포함된 곳이 전남 장흥이었다. 그 세 작가가 다름 아닌 이번 기행에서 조명하고자 하는이청준과 한승원, 그리고 송기숙이다. 그들은 한국 현대소설문학사에 뚜렷한 획을 그으며 장흥이 문학관광기행특구로 지정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기행서경가사의 효시를 이룬 '관서별곡'의 작가 기봉(岐峯) 백광홍(白光弘) 선생을 비롯하여 고죽 최경창과 손곡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으로 불리던 옥봉 백광훈, 호남실학의 거두 존재 위백규 선생이 모두 장흥 출신이다.
남도의 끝자락에 위치한 장흥은 전남도립공원인 천관산을 비롯해 억불산·제암산·사자산·수인산·부용산에 둘러싸여 계곡마다 물이 넘쳐 흐르고 초록의 숲이 찾아오는 길손을 포근하게 반겨준다.
영산강, 섬진강과 거불어 전남 3대강인 탐진강은 56㎞의 긴 물줄기를 이루며 장흥읍을 가로 지르고, 그 물을 먹고 자란 농산물과 축산물은 모두 명품으로 팔린다. 그 자연을 닮은 사람들은 지금껏 오염을 일으키는 공장 하나 들이지 않아 장흥군 전체가 청정지역이다. 장흥 앞바다 득량만은 뭍보다 훨씬 많은 해산물을 제공한다.
장흥군은 북쪽으로 나주와 화순, 서쪽으로는 영암과 강진, 남쪽으로는 완도, 동쪽으로는 보성·고흥과 경계를 이룬다. 지명 ‘장흥(長興)’엔 ‘길이 번창하라’는 임금의 바람이 담겨 있다. 고려 인종이 이 곳 출신 공예태후를 맞아 의종·명종·신종을 낳은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내려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아침 일찍 출발했건만 장흥읍으로 들어섰을 땐 이미 정오를 넘어서고 있었다. 장흥문화예술회관 3층에 있는 기봉기념사업회 문을 두드리니 김석중 선생이 오랜 지기인 양 반갑게 맞아준다. 관서별곡의 작가 기봉 백광홍 선생의 후예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인사를 나누자마자 건네오는 첫 마디가 '수원 백씨요?'하고 물었다. 그 물음이 웬지 정겹다.
김석중 회장은 장흥 토박이로 1979년 삼성문예상 소설부문에 장편'바람'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뒤 '바람' '햇빛 부신 날의 초상;꿈꾸는 물새'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장흥문단을 지키고 있는 중견 소설가다.
때마침 점심 시간이라 음식점도 알아볼 겸 장흥의 명물이 된 '토요풍물시장'을 찾았다. 장흥에 토요풍물시장이 들어선 것은 2005년이다. 원래 장흥시장은 나주 영산포 홍어시장, 함평 학다리 우시장과 더불어 전남의 3대 시장 중의 하나였다. 1960년 대까지만 해도 흥청거리던 시장이 점차 몰락하면서 퇴락해가는 시골장터의 부흥을 위해 관청과 상인이 지혜와 힘을 모았다.
새롭게 단장하고 먹을 거리, 볼거리 뿐만 아니라 체험거리까지 만들어 토요풍물시장으로 거듭났다. 기존의 5일장도 사라진 것이 아니어서 2일과 7일에 장이 선다. 오일장에선 주로 생필품을 구입하러 오는 관내 주민들이, 토요풍물시장에선 주로 옛장터의 향수를 즐기며 이 지역의 특산품을 구입해 가는 외지 손님들이 많은데 최근 방송에 소개되면서 토요일만 되면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장흥의 대표음식은 소위 '장흥삼합'이라 불리는 장흥 한우와 키조개, 그리고 표고버섯이 한데 어우러진 <키조개삼합>이다. 정육점과 식당이 한데 붙어 있어 소고기를 사 가지고 식당으로 가서 약간의 돈만 얹어주면 장흥삼합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 토요일마다 각종 공연이 열린다는 삿갓 모양의 유리천정이 씌워진 야외공연장 바로 앞의 식당에서 장흥삼합으로 허기를 메우고 장흥답사에 나섰다.
장터 옆 탐진강에 돌다리가 놓여 있다. 장터를 벗어나며 윤슬이 반짝이는 탐진강을 바라보는데 김석중 회장이 돌다리를 가리키며 기행 때는 강 건너편에 차를 세우고 돌다리를 밟아 토요풍물시장으로 오는 게 훨씬 멋스럽다고 귀띔을 해 준다.
 1894년 11월27일 2차봉기에 나섰던 동학농민군이 태인전투에서 패배하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등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잇따라 체포되고 흩어진 농민군들은 벽지로 숨거나 도피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장흥에서는 전라도 지역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다. 장흥 석대들은 당시 강진현, 전라병마절도사영, 벽사역, 장흥도호부, 자울재를 지나는 길목에 위치한 지리적 요충지였다.
장흥, 강진 일대의 농민군은 이방언(李邦彦, 1838-1895)을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하며 일본군과 관군, 유생이 중심이 된 민보군에 맞서 동학농민전쟁의 마지막 격돌이 펼쳐지게 된다. 본대에서 해산한 농민군들이 장흥으로 몰려들어 연합 농민군의 규모는 적게는 1만에서 많게는 3만에 이르게 되었다.
세력이 불어난 농민군은 마침내 1894년 12월3일 장흥 벽사역(碧沙驛)과 장흥부를 공격했다. 이어 4일에는 벽사역을, 그리고 5일에는 장흥부성의 수성군을 격파하여 점령했다. 벽사역은 호남 제2의 역졸부대를 거느린 오늘날의 정보기관에 상응하는 막강한 기관이었으나 관군들은 겁을 먹고 모두 달아나 버렸다. 농민군은 텅빈 벽사역을 점령하고 관청 건물과 역졸들이 살던 민가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 때 장흥부사 박헌양 이하 장졸 96명이 피살된다.
그러나 농민군은 압도적인 숫자에도 불구하고 죽창과 몽둥이, 저급한 조총으로는 신식훈련과 기관포로 무장한 관군과 증원된 일본군의 공격을 당할 수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양측 사망자가 2천명이상이나 되는 최대 격전이었다.
장흥 출신의 이방언도 장흥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은신하던 중 25일 이두황 군사에게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석방된 후 보성군 회령면(지금의 회천면) 새터에 사는 이의원(李義元)의 집에 숨어지내다 체포돼 1895년 4월25일 그의 외아들 성호와 함께 장흥 장대(지금의 서초교자리)에서 처형돼 최후를 마친다. 동학군의 최후의 격전지였던 이곳은 송기숙의 '녹두장군' 한승원의 '동학제' 등의 주요 배경이 되었다.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석대들 옆 산허리에는 희생된 농민군 영령을 추모하는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이 서있다. 이 탑은 1992년 세워졌지만 우여곡절 끝에 12년만인 2004년 4월25일에야 비로소 제막식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무명용사 1천165명이 묻힌 자리는 지금 체육관이 들어서 이제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한편, 장흥읍 남산공원 영회당에는 동학군에 맞서 장흥부성을 수성하다가 순절한 장흥부사 박헌양 등 관민 96인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충(忠)과 의(義)가 충돌했던 역사의 현장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생각하며 바라 본 하늘은 너무 쨍하도록 맑았다.
동학혁명기념탑을 뒤로하고 탐진강을 건너 억불산 우드랜드 쪽으로 차를 달리다 보니 왼편으로 아담한 박물관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귀족호두박물관이다. 호두에도 귀족이 있었던가. 동행한 김석중 선생이 장흥에만 있는 귀족호두는 명품이라 한 쌍에 1억을 호가하는 호두도 있다고 했다.
조선시대부터 장흥군에만 자생하던 귀족호두나무는 씨알이 차지 않아 천덕꾸러기로 함부로 톱질을 당해 멸종 위기에 처하기도 했던 나무였다. 속이 차지 않아 개호두로 취급받던 나무가 귀족호두로 현재의 명성을 얻은 것은 약 30여년 전 사람들의 손노리개감으로 인기를 끌면서부터였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던 호두가 지금은 가장 비싼 나무 열매로 기네스북에 오를만큼 귀한 물건이 되어 특허까지 나 있는 귀한 몸이 되었다. 못생긴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옛말처럼 천덕꾸러기 호두가 귀족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속에 내용물이 없어 귀족호도는 파종해도 싹이 나오지 앟아 접목으로 번식하는데 정품 한쌍에 1만원에서 500만원까지 그 품질과 생김새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관장님이 손님접대로 바쁜 것 같아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서려는데 전라도 인심하면 이바지인데 서울에서 오신 손님 그냥 보낼 수 없다며 한사코 귀족호두 한쌍을 선물로 간네주었다. 흐벅진 전라도 인심이다.
편백나무 숲, ‘치유의 땅’으로 변신한 우드랜드
전남 중부권 중앙에 자리한 장흥은 일찍이 강진·영암·완도 등 이웃 고을을 호령하던 곳이었다. 일제 때는 헌병대가 있었고, 검찰과 법원이 일찌감치 자리잡을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농.축산업 등 ‘1차 산업’에만 안주하다보니 이웃 지자체보다 발전이 뒤처졌다. 그러던 장흥이 2000년대 들어 때묻지 않은 산과 계곡,맑은 물과 공기를 밑천으로 크게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곳이 장흥읍이 내려다보이는 억불산 자락 100만㏊ 규모 편백숲 속에 지은 관광휴게시설인 우드랜드이다.
한옥·황토집·통나무집·목공예체험장 등 친환경 공간 28동이 속속 들어섰다. 하루 200명이 묵어갈 수 있는 규모다. 주말 이용 예약은 1~2개월 전에 끝날만큼 대박이 났다.
여기다 편백소금집을 열어 편백나무의 피톤치드향과 천연 소금을 이용한 피부질환치유공간을 마련했다. 한술 더떠 비비에코토피아도 선을 보였다. 1만㎡ 숲속에 들어선 이른바 ‘나체촌’이다. 말 그대로 나체로 다닐 수 있게 하려했으나 동네 어른들이 말려 속옷을 입은 채로 숲을 거닐며 사색에 잠길 수 있게 했다고 한다.
편백나무 숲에서 지친 몸에 생기를 불어넣고 장흥가단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관서별곡의 저자 기봉 백광홍의 '기양사'로 차를 달린다. 가는 길에 큰 건물이 눈에 띄어 물어보니 예전에 대학이었던 것이 학생 수가 줄어 지금은 한방 센터로 바뀌는 중이라 한다. 그러고 보니 그 맞은 편엔 로하스 타운 건설이 한창이다. 길섶에 전남 유형문화재 제205호 기양사선시보주를 알리는 표지판이 눈에 띄는 걸 보니 기양사가 멀지 않은 듯 하다.
약간의 내리막길을 달리다 좌측으로 차머리를 돌리니 마을 입구에 커다란 표지석이 기양사에 다 왔음을 일러준다. 부드럽게 휘인 좁은 돌담길을 따라 50여미터쯤 올라갔을까.담장 앞에 줄느러미 선 비석들이 외지의 객을 맞는다. 기양사는 백광홍 선생을 비롯한 13인을 배향한 서원의 사당으로 사당 앞엔 기양강당이란 강학당이 서 있고 기양사의 편액을 보니 3김씨의 한 명이었던 전 국무총리 김종필씨가 쓴 것이다. 기양사 좌측에 가사비가 서 있고 그 옆으로 1901년 복설 때 만들었던 석조 위패들이 나란히 서 있다.
관서의 명승지에 왕명으로 보내실새
행장을 다스리니 칼 한 자루뿐이로다(중략)
벽제에서 말을 갈아타고 임진강에서 배타고 건너
천수원에 돌아드니 송경(개성)은 옛 서울이거늘
만월대 바라보니 슬퍼지누나
아무리 나랏일이 튼튼치 못하단들 풍경좋음 어이하리
연광정 돌아들어 부벽루에 올라가니
능라도 방초와 금수산 노을은
봄빛을 자랑한다.
천년 개성의 태평스런 문물은
어제인 듯 하지마는(중략)
하늘 높고 땅은 먼 곳에서 흥이 다 하고 슬픈 생각 일어나니
이 땅이 어디런가 부모 생각에 나그네의 눈물이
소리없이 흐르는구나(중략)
어느 때 여러 경치 기록하여서 임금께 사뢰리요
머잖은 때에 임금을 뵈오리라
위 노래는 기행서경가사의 효시로 알려진 백광홍(白光弘:1522-1556)이 지은 `관서별곡(關西別曲)'의 서두이다. 백광홍은 자를 대유(大裕), 호는 기봉(岐峯)이라 했는데 수원인으로 장흥 안양면 기산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삼옥당(三玉堂) 세인(世人)과 어머니 광산 김씨와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조선왕조실록' 선조 22년조에서 송익필, 이산해 등과 함께 당대 8문장으로 불렸다. 그러나 아우 옥봉(玉峯) 광훈의 유명세에 가려지고 임.병 양란의 참상이 시인의 혈육 같은 유고를 삼켜버린 탓에 문집의 간행이 늦어지는 등 여러 연유로 진면목이 감춰졌던, 우리나라 최초의 기행가사 작가이다.
우리 시가문학사상 최초로 기행가사를 지어 한시 물결 도도한 저 16세기에 국문시의 위대함을 떨쳤던 시인이었던 기봉 백광홍, 그는 신사무옥(辛巳誣獄:1521)으로 장흥에 유배와 있던(13년간) 영천(靈川) 신잠(申潛)에게 나아가 배웠다. 신잠이 유배를 마치고 태인의 군수로 가 있을 때 그 곳을 찾아간 기봉은 일재(一齋) 이항(李恒)과 운명처럼 조우한다. 도학자 일재로부터 배운 그의 유학자적 세계관은 ‘인(仁)’ 한 글자로 귀결된다. ‘오곡종지미(五穀種之美)’라는 글에서 “모든 선의 으뜸에는/ 인(仁)이 가장 존귀하지/ 오곡도 안 익으면/ 어여뻐도 예쁘잖코/ 인(仁)이 익지 아니하면/ 귀한자도 천하다네”라고 하여 인(仁)을 유난히 강조했다.
당대 호남의 큰 학자이자 시인이었던 고봉 기대승,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청련 이후백, 송천 양응정과 교유하였음은 물론 율곡 이이와도 교분이 두터웠던 기봉, 그는 명종4년(1549) 28세 때 사마시에 급제한 뒤 1552년 31세로 문과에 들어 홍문관정자에 제수 되었다. 이어 호당(湖堂) 곧 독서당에 들어 공부했는데 명종의 명으로 영호남 문사들이 한 자리에서 시 재주를 겨루었을 때 ‘동지부(冬至賦)’를 지어 장원하였는데 이로써 그의 문명이 전국에 회자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상으로 받은 ‘선시(選試)10책’은 지금도 전해온다. 1555년 34세로 평안도 평사(評事)가 되어 관서지방을 가게 되었을 때 관서별곡을 짓고 1556년 가을 병으로 교체되어 어버이께 문안 오던 도중 부안의 처가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고 `기봉집'은 사후 343년 만에 5권으로 간행되었는데 한시 175수(혹은 185수), 가사 1편 등이 우리 곁을 지키고 있다. 그의 `관서별곡'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최초의 기행가사로서 관서지방의 풍물과 자연을 통하여 일어난 시인의 정(情)을 그곳의 경(景)과 융회하여 쉬운 문체로 드러냈다는 평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이는 기행시가의 모태로서 정철의 `관동별곡', 조우인의 `출관사' 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외 기행시가인 김인겸의 `일동장유가', 이수광의 `조천가' 등에의 영향은 물론 기행산문 기록인 홍대용의 ‘을병연행록’ 부안 김씨 오우당 김순협의 `오우당 연행록'을 비롯한 수많은 조천록(朝天錄: 중국 임금을 만나고 온 기록)의 작성에도 일정한 길잡이를 하였다.
광언(光彦), 광훈(光勳), 광성(光城)과 함께 일문사문장(一門四文章)으로 불릴만큼 문재가 출중했던 4형제의 맏형으로서 그는 아우 친구에 대한 사랑도 남달랐으니 고죽(孤竹) 최경창은 광훈의 친구로서 그를 유난히 따랐었다. 그는 ‘기성문백평사별곡(箕城聞白評事別曲)’ 곧 ‘평양에서 백광홍의 `관서별곡'을 듣고’란 시를 지어 백광홍이 아꼈던 용만 기생 몽강남(夢江南)에게 주었는데 “비단 같은 노을은 옛 모습 그대로 이고/ 능라도의 방초는 이봄에도 피었구나/ 선랑(기봉)이 가신 후로 일자 소식 없으시니/ 관서별곡 한 곡조에 눈물이 두건을 적시네” 최경창이 평양에 갔을 때 관서지방에선 `관서별곡'이 널리 애창되고 있었다고 한다.
`관서별곡'은 전체 8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단은 임금의 명을 받고 떠나는 모습, 제2단은 부임하는 노정을 노래했으며, 제3단에서 제7단까지는 부벽루, 능라도, 백상루, 영변 약산 등 관서지방을 두루 편력한 내용이다. 이어 제8단은 사친애군(思親愛君)하는 내용으로 마무리 부분이다. 한국 기행가사의 전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그의 고향 장흥이 문림(文林)의 고을로서 위백규, 이상계, 위세직 등 걸출한 가사문학 작가들이 나올 수 있도록 선편을 잡았던 기봉 선생, 그는 `관서별곡'에서 우리의 산 이름, 강 이름, 땅이름 등을 과감히 차용하여 시간적인 순차에 따라 서사- 본사- 결사의 구성으로 기행의 감회를 노래했다.
호남 한시단은 물론 가사문학사, 도교문학사, 가전문학사 등에서 그 선점을 차지했던 큰 인물 백광홍, 만시지탄이 있으나 그를 기리고자 2004년 6월의 문화인물로 문화관광부가 선정했다니 다행한 일이다. 앞서 보인 `관서별곡'노래비는 그가 묻힌 장흥 부산면 호계리 월만과 그가 배향된 안양면의 기양사에 세워져 있다. 말만 들어도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의 고향 장흥, 오늘날 문림(文林) 장흥이 된 것은 기봉 백광홍이 씨뿌린 결실이란 생각이 든다.
기양사를 뒤로 하고 한승원 선생의 해산토굴을 향해 떠나는 발걸음이 마냥 설레는 것은 남녘바다가 설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종려나무길 따라 오신 당신께
한 승 원
종려나무길 따라 정남진 장흥 안양의 연꽃바다에
검은댕기 두루미처럼 훨훨 날아오신
사랑하는 당신
어지러운 티끌길이 끝나는 곳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꿈의
길은 열립니다 당신이 싣고 다니시는 암갈색으로 녹슨
당신의 육체와 영혼
꽃무지개 뜨는 꼬마 나폴리 수문항과 여닫이 연안의
은 모래밭
수억 천만 개의 유리대롱같은 금빛 햇살 아래서
배릿하고 달콤한 키조개 바지락 숭어 전어 농어 도미 주꾸미 낙지들의 맨살과 더불어
세모시처럼 하얗게 바래 가지고 가셨다가
정남진의 연꽃 바다처럼 싱싱해지고 향기로워지고 싶으시면
가시는 듯 되짚어 오십시오
검은 댕기 두루미처럼 사랑스러운 당신.
누릇누릇 보리이삭이 익어가는 바닷가 들녘을 지나 종려나무 가로수가 이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기는 도로를 얼마나 달렸을까. 한승원 작가의 해산토굴이라 쓰인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 시대 문단의 거목 한승원 선생이 나고 자란 장흥으로 돌아온 것은 1997년 건강상의 이유였다.스스로 자신의 소설의 9할은 고향 이야기라고 할만큼 선생은 장흥의 갯마을 사람들의 순박한 삶을 그려낸 작품을 여러 편 발표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동행한 김석중 선생이 성큼성큼 앞장서서 돌계단을 올랐다.
한승원 선생의 집필실인 해산토굴은 만리향의 내음이 바다내음과 짭짤하게 어우러져 햇살아래 반짝거렸다. 집필실로 가는 잔디밭 소로길엔 분홍색 사랑초가 해맑게 피어 바닷바람을 타고, 언덕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수문 여닫이 바다는 마치 흰 명주천을 풀어놓은 듯 온통 하얗게빛났다.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자 김석중 선생은 드르륵 문을 열고 앞장 서 집필실 안으로 들어섰다.
선생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다탁 옆으로 이부자리가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잠시 후 한승원 선생이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낮잠을 잤다고 했다. 인사를 건네고 다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평소 차를 즐기는 선생은 자리에 앉자마자 찻물을 끓였다. 아내가 직접 덖은 차라며 선생은 찻잔이 비어질 때마다 아낌없이 차를 따라주었다. 배릿한 차향이 코끝을 스쳤다. 선생의 소설 '초의'를 읽었던 기억을 되살리며 차를 마시며 잠시 차와 선은 한 몸이라는 '다선일체(茶禪一切)를 생각했다. 선은 순리이니 차를 어렵고 불편한 형식에 얽매여 마시는 것은 차를 잘 마시는 것이 아니다. 국적불명,정체불명의 행다법에 주눅들지 않고 편안하게 마시는 것이 가장 잘 마시는 것이란 선생의 말씀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귀한 차를 대접 받고난 후실례를 무릅쓰고 포즈를 취해주십사 부탁을 드렸다. 실내에서 한 장을 찍고 나니 답답하니 밖으로 나가자 해서 밖으로 나와 정원에서 몇 장을 더 찍었다. 해산토굴 앞에는 군에서 지어준 작가의 문학교실 '달 긷는 집'이 있다. 이곳에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문학강연도 하고 대담도 나눈다.
한승원 작가는 언제나 담담하면서도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의 창작공간을 토굴(해산토굴)이라 이름붙인 것도 도인들이 도를 닦는 심정으로 토굴에 들어가 면벽참선을 하듯 치열하게 글을 써내려가겠다는 그만의 결기의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장흥은 그의 문학의 모태였고 마르지 않는 창작의 원천이었다. 신춘문예 당선작인 ‘목선’에도 고향 덕도 사람들의 곡진한 삶을 수채화처럼 풀어놓은 것이었다. 그의 글은 늘 비릿한 바닷내음과 고향의 흙냄새가 섞여 있다. 그의 삶이 늘 잔잔한 바다는 아니었다. 거친 파도가 일렁이는 검푸른 바다처럼 막막하고 공포스러울 때도 많았다. 고향의 중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빠듯한 봉급으로 5명이나 되는 동생들의 학비를 댈 수 없었다. 손가락에 굳은 살이 생기도록 청탁받은 원고를 써대며 신산스러운 삶을 이어나갔다.
80년대 그의 작품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대표작인 된 ‘아제아제바라아제’는 당시 최고의 배우였던 강수연이 주인공을 맡고 임권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으며 그 해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강수연은 이 작품으로 89년 대종상 최우수상은 물론 다음해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밀려드는 원고청탁과 함께 문학계에서 그의 명성도 높아졌다. 그 사이 동생들도 어느덧 장성했지만 그의 몸은 조금씩 병들어 갔다. 만성적으로 위장병에 시달렸고 때때로 부정맥이 와서 그를 괴롭혔다.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고향 바다의 포말이 꿈처럼 밀려들다 잠을 깨고 나면 썰물처럼 사라졌다. 모든 명성과 물욕을 버리고 고향으로 스며들 듯 내려왔다.
한승원 선생이 고향 장흥으로 돌아온지도 어느덧 17년이 흘렀다. 작가는 이곳에서 :연꽃바다' '해산 가는 길''초의' '포구' '흑산도 가는 길' '원효' ''추사' '다산' 등 무려 12권이 넘는 장편을 집필했다. 예전에는 주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에 천착했다면 이제는 사람답게 사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
장흥군 여닫이 해변에는 한승원 시비 30여 기가 20m 간격으로 늘어서 있다. 2004년 세워진 시비에는 고향에 대한 작가의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승원 문학산책로라 이름 붙여진 이 길을 걸으며 작가는 문학에 대한 결기를 다지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해산토굴을 떠나 전화로 예약해둔 숙소인 수문리조트를 찾아 수문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수문리조트는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예약을 했던 곳인데 실제로 둘러보니 기대 이상, 상상 이상이다. 숙소도 깨끗하고 무엇보다 바닷가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확 트인 전망이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는다. 잔디밭에서 일몰의 바다를 바라보며 통기타의 선율에 몸과 마음을 실으면 이승이 이승 같지 않을 것만 같다. 친절한 젊은 여주인의 안내를 받아 숙소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이청준의 생가가 있는 회진면의 진목마을을 향해 부지런히 차를 달렸다.
30여 분 쯤 차를 달렸을까. 작은 고개를 넘은 차가 닿은 곳은 왼편으로는 바다가, 오른쪽으로는 앞을 막아선 산 아래 너른 들이 펼쳐진 마을이었다. 바다 쪽 둑 위로 허름한 집 한 채가 눈길을 잡아 끄는데 그 집으로 다가서는 길목에 천년학촬영지란 팻말이 서 있다. 차를 세우고 보니 도로가에 세운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선학동이란 표지석도 눈에 띄었다. '천년학'은 이청준의 소설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임권택 감독이 영화화 한 100번 째 연출작이다.
1976년 <뿌리 깊은 나무> 에 발표한 총 8편으로 구성된 연작소설 '남도사람' 중 제일 먼저 창작된 '서편제'와 함께 영화로 만들어진 '천년학'은 한과 소리, 억압과 예술에 대한 주제를 다룬 작품이다. 이 영화를 계기로 선자마을은 선학동으로 이름까지 바꾸었다. 영화세트로 지은 집 같지 않게 주막집은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주변의 풍경과 잘 어울린다. 이제는 간척사업으로 들판이 되었지만 바다였던 옛날에는 밀물이 들면 건너편 산 관음봉의 그림자가 물에 비치면 학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는 형상이라 선학동이라 불리워졌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차에 올라 진목마을로 들어섰다.
1960년대 중반에 문단에 나와 40여 년 동안 기복 없이 꾸준한 활동을 펼친 이청준(李淸俊, 1939~2008)은 초기 소설에서 여러 계통의 장인을 내세워 전통적 가치 세계에 예속된 사람들이 날로 변화하는 산업사회 속에서 어떻게 사라져 가는지를 그려냈다. 그 뒤로는 오랫동안 지배 / 피지배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권력과 언어의 관계에 천착하며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우뚝 선다. 이청준은 한국 현대소설사의 별자리에서 뚜렷하게 빛나는 작가의 한 사람이다.
이청준은 1939년 전라남도 장흥의 회진면 진목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겪은 살붙이들의 죽음은 그의 내면세계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여섯 살 때는 세 살 난 막내동생이 홍역을 앓다가 죽었고, 이로부터 반년쯤 뒤에는 맏형이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소설을 좋아했던 맏형이 죽은 뒤로 형이 남긴 소설책을 탐독했다. 소설을 읽으며현실이 가짜 세계 같고, 책 속의 세계가 진짜 세계로 느껴지는 이 도착적 체험은 그의 작품 세계를 관념적·추상적·사변적·논리적으로 만드는 내적 동인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억압하는 세계와 대상을 직접 펼쳐보이기보다 쉽게 잡히지 않는 모호함과 불확실성 속에 은폐할 때가 잦다. 이를테면 정치나 사회 현실에 환멸과 불신을 품고 그 허위성을 해부하거나 현상의 이면을 까발릴 때도, 고도의 상징과 지적이며 복합적인 구도 속에서 작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대상 자체는 소설의 표면 밑으로 가라앉기 일쑤다. 바로 이렇게 비밀스러운 대상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것이 이청준 문학의 특징이다.
1960년, 이청준이 광주에서의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독문과에 입학한 것은 1960년이다. 그는 대학 1학년과 2학년 때 4·19와 5·16을 잇달아 겪는다. 자유에 대한 기대와 용기를 갖게 한 4·19혁명, 좌절 속에 환멸을 되씹게 한 5·16쿠데타, 이 두 가지 상반된 체험은 그의 의식에 내면화되어 뒷날 작품 세계에 투영된다. 대학 시절에 그가 사숙한 작가는 독일의 작가 토마스 만이다. 군 복무 뒤 학교로 돌아온 그는 마땅한 잠자리를 구하지 못해 밤이면 문리대 본관 4층에 숨어 들어가서 자곤 한다. 1965년 이청준은 《사상계》 신인상 공모에 단편 「퇴원」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오는데, 소설 공모에 여러 차례 원고를 보내나 번번이 떨어진 끝에 얻은 당선의 영예여서 그의 기쁨은 자못 크다.
1966년, 이청준은 대학을 졸업하자 호구지책을 위해 곧바로 《사상계》에 입사한다. 그는 같은 해에 「임부」, 「줄」, 「무서운 토요일」, 「바닷가 사람들」, 「굴레」 등을 발표하며 주목받는 신예 작가로 떠오르지만 여전히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죽음’과 함께 오랫동안 그의 소설세계를 지배한 것은 ‘허기’다. 사춘기 무렵부터 자취를 하는 등 가난한 환경에서 비롯된 이 허기의 체험은 이청준 문학의 원체험 가운데 한 가지다. 대학시절 이청준은 너무 배고픈 나머지 친구의 하숙방에 있던 참기름을 보고는 병째로 마셔버린다. 참기름을 병째로 마셨으니 무사할 리가 없었다. 그는 며칠 동안 내내 설사를 하며 부대낀 끝에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사춘기에 이어 청년기까지 줄기차게 따라다닌 이 허기의 체험은 작가의 탈향욕망을 더욱 부추기고 도시의 ‘생산적 의식층’으로 나아가도록 그를 다그쳤다.
1974년 이청준은 《신동아》 4월호부터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장편 「당신들의 천국」의 연재를 시작한다. 1970년대의 정치 현실을 빗댄 이 작품은 그가 소록도 나환자촌을 방문 취재해서 쓴 것이다. 이 소설은 소록도에 나병 환자들의 ‘천국’을 세우겠다는 야망을 품고 나병원의 원장으로 부임해 여러 사업을 벌이는 주인공의 행태와 이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미묘한 갈등과 욕망, 허위의식을 다양하게 그려낸다. 잇달아 문제작을 내놓던 이청준은 1975년 중편 「이어도」로 ‘한국일보 창작문학상’을 받더니, 1978년 중편 「잔인한 도시」로 제2회 '이상문학상’을 받는다. 1970년대에 쓰인 이청준의 주요 작품은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1976), 창작집 『이어도』(1976), 『예언자』(1977), 『자서전들 쓰십시다』(1977), 『남도 사람』(1978), 『잔인한 도시』(1978), 장편소설 『춤추는 사제』(1979) 등으로 묶여 나온다.
“왜 쓰는가?” 하는 문제를 붙들고 오랫동안 씨름해온 작가는 “문학 욕망은 애초 우리가 사는 현실 질서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자가 그 패배의 상처로부터 자신을 구해내기 위한 위로와 그를 패배시킨 현실을 자기 이념의 질서로 거꾸로 지배해 나가려는 강한 복수심에서 비롯된다.”(「지배와 해방」, 1977)고 밝힌 바 있다. 작가에 따르면 문학 창작 욕구의 저변에는 현실에서의 패배와 이에 대한 강한 복수심이 자리 잡고 있다. 이청준은 1980년대에도 수도자처럼 끝없이 글쓰기에 매달려 『살아있는 늪』(1980), 『낮은 목소리로』(1980), 장편소설 『낮은 데로 임하소서』(1981), 창작집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1981), 『젖은 속옷』(1982), 『시간의 문』(1982), 장편소설 『제3의 현장』(나중에 「이교도의 성가」로 게재), 『이청준 문학 선집』(1984), 창작집 『황홀한 실종』(1984), 『비화밀교』(1985), 『따뜻한 강』(1986), 『겨울 광장』(1987), 『벌레 이야기』(1988), 『이교도의 성가』(1988) 등을 펴낸다.
이청준은 1986년 현대에 남아 있는 비교(秘敎)를 치밀하고 섬세하게 성찰한 중편 「비화밀교」로 ‘대한민국문학상’을 받고, 1990년 장편 『자유의 문』으로 ‘이산문학상’을 받는다. 1986년 한양대학교 교수로 출강하지만 두 해 만에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돌아간다.
1990년대에 들어서도 이청준은 여전히 왕성한 집필 의욕을 보여준다. 그는 1980년대 이후 “개인과 사회, 복수와 용서, 갈등과 화해, 자유와 금기, 실존과 계율, 그리고 고통과 기원”(한상규, 위의 글) 등과 같은 충돌하고 대립하는 두 가지 가치의 세계가 어떻게 세계 안에서 만나고 서로 부정성을 지양하며 조화에 이르는지를 탐구한다.
이청준은 짧지 않은 문학 역정을 통해 변화무쌍한 주제·소재·인물·기법을 선보이면서도 작품 속에서 한결같은 긴장감을 유지한다. 이런 건강한 추진력의 근원은 대상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탐구 정신이다. 그의 탐구 정신은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철저한 탐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청준은 자신의 삶에서 우선되는 것은 자기 탐구와 자기 구제이며, 그 한 방편으로 문학을 택한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이청준의 소설 가운데 적지 않은 것이 작가나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고, 흔히 그 주인공들은 알 수 없는 불안과 절망 상태에서 살아남기 위해 현실과 힘겨운 싸움을 벌인다. 이는 ‘소설’이 작가 이청준에게 자기 탐구의 한 양식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많은 작품에서 소설가의 글쓰기를 통한 자기 진술 욕구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며 “왜 쓰는가?” 하는 문제에 끈질기게 파고든다. 이청준은 다양한 글쓰기의 방식을 실험하며, 원인 불명의 위통을 앓는 환자를 내세운 등단작 「퇴원」에서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우리 시대의 ‘환부 없는 아픔’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해 성실하게 싸워온 작가다. 바로 이런 까닭에 이청준은 우리 시대의 지식인 소설 또는 관념 소설의 계보에서 그토록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소설로 삶의 길을 밝히고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던 소설가 이청준은 2008년 7월 31일로 금생의 삶을 마감했다. 그가 온몸으로 쓰고자 했던 ‘소설의 역사’는 더는 이어질 수 없게 되었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와 소설은 서서히 비바람에 풍화되면서 사람들에게 자기 삶을 비춰볼 수 있는 하나의 성찰적 거울로, 혹은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신화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느티나무가 서 있는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우고 이청준 생가를 알리는 표지판을 따라 좁은 골목을 들어섰다. 좁은 돌담길을 두어 번 꺾었을까. 그의 소설 눈길 속에 나오던 그의 생가는 2005년에 복원하였다는데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아담한 시골집이다. 마당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붉은 장미가 물색없이 피어 있다. 활짝 열어젖힌 방안에는 이청준의 소설 작품 속의 내용들이 사진과 함께 전시 되어 있다. 문학작품 속의 행간이 고스란히 읽혀지는 작품의 현장을 돌아보는 감회가 새롭다.
생가의 뒷산에는 현대소설의 고전으로 불리는 '눈길' 탐방로는 그 애잔한 소설의 감동을 반추하며 걷기에 부족함이 없다는데 늘 부족한 게 시간이다. 시간이 많다면 천천히 마을을 돌아보며 이청준 문학의 향기를 흠향하고 싶은데 서둘러 그가 잠든 문학자리를 찾아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이청준의 문학자리는 전남 장흥군 회진면 진목리 갯나들 마을 오른편 산기슭에 있다. 그의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어머니가 밭일을 하셨고 세상을 떠난 후 묻힌 곳이며 이청준이 잠든 곳이기도 하다. 문학자리에서 멀리 보이는 바다가 득량만이고 묘지 앞의 너른 논은 1970년 대 바다를 가로막아 조성한 간척지다.
그의 사후 2주기에 맞춰 개원한 문학자리는 이청준이 '서편제' '눈길' 등 작품의 모태가 된 지역들을 손수 그린 지도가 새겨져 있는 '바닥'. 14톤의 거대한 오석에 그의 호 '未白'이라는 낙관을 새긴 '미백바위'. 오석'글기둥' 네 면에 새긴 이청준의 초상, 그가 유서처럼 남긴 '해변 아리랑'의 한 구절, 그리고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찬문과 간명하게 정리한 그의 약력 등이 새겨져 있다.
한양대학교 정민 교수가 단아하고도 유려한 붓글로 쓴 글기둥의 '해변 아리랑' 한 대목을 옮겨본다.
그는 늘
해변 밭 언덕 가에
나와 앉아
바다의 노래를
앓고 갔다
노래가 다 했을 때
그와 그의 노래는
바다로 떠나갔다
바다로 간 그의 노래는
반짝이는
물 비늘이 되고
먼 돛배의 꿈이 되어
섬들과
바닷새와
바람의 전설로
살아갔다
이청준 선생은 생전에 자주 이 곳을 찾아 묘 주변을 서성이며 잔디밭에 앉아 득량만 바다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곤 했다. 문학자리 위 멀지 않은 곳에 축사가 있어 퀴퀴한 냄새가 풍겨왔지만 그리 싫지 않은 것은 문학이란 낮은 곳에 자리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시 찾아올 것을 기약하며 문학자리를 떠나 천관산 자락에 위치한 천관문학관을 찾았다.
호남정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723M의 아담한 산인 천관산은 지리산,월출산,내장산, 변산과 함께 호남의 5대 명산으로 꼽힌다. 광주의 무등산이나 해남 준령의 두륜산을 제치고 천관산이 명산 반열에 오른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천관산엔 80여 개의 봉우리들이 산능선을 따라 주옥처럼 도열해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보옥을 늘어 뜨린 면류관을 닮아 천관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천관산엔 많은 전설이 서려 있다. 삼국시대 때 김유신과 헤어진 천관녀가 숨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가 하면 이성계가 전국의 산신령에게 자신의 혁명을 지지해 줄 것을 청했다가 이 산의 산신령이 반대를 하는 바람에 유일하게 유배를 당한 산이라고도 한다.
호남을 대표하는 문림의향 장흥의 진산인 천관산에 천관문학관이 세워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여겨진다.
문학관 안엔 가사문학의 새로운 장을 연 기봉 백광홍 선생을 비롯하여 현재 문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존 작가에 이르기까지 장흥 출신의 문인들이 망라되어 전시되어 그들의 문학적 성과를 기리고 있다. 또한 한편에는 문인들의 친필 게시물이 전시 되어 있어 그것을 하나씩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한 고장에서 이름만 문필가 한 명을 배출하기도 쉽지 않은 점을 생각하면 장흥은 문학으로 축복 받은 고장임에 틀림없다. 멀지 않은 곳에 천관문학공원이 있다는데 시간이 부족하여 둘러보지 못함이 못내 아쉽다.
‘기행은 움직이는 학교다’라는 말이 있다 .
장흥을 한 바퀴 돌고 나니 내 영혼의 키가 한 뼘은 더 자란 느낌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천리나 되는 귀로가 아득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장흥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는 동안 내 안에도 문자향이 흠뻑 스민 탓이리라. 어느새 먼 바다로부터 모란꽃빛의 노을이 서서히 내려 앉고 있다. 잠시 노을에 한 눈을 팔다 길을 잘못 들었다. 장흥 출신의 시인 이대흠의 '아름다운 위반'을 떠올리며 과감하게 중앙선을 넘어 유턴을 했다.
기사 양반! 저짝으로 조깐 돌아서 갑시다
어칳게 그런다요 뻐스가 머 택신지 아요?
아따 늙은이가 물팍이 애링께 그라제
쓰잘데기 읎는 소리 하지 마시오
저번챀에 기사는 돌아가듬마는......
그 기사가 미쳤능갑소
노인네가 갈수록 눈이 어둡당께
저번챀에도
내가 모셔다 드렸는디
- 이대흠의 '아름다운 위반'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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