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소설의 개척자 동농 이해조와 포천, 그리고 시인 김종삼
글.사진 : 백승훈
남녘에서 시작된 봄은 사람의 걷는 속도로 북상하면서 꽃을 피운다. 그러니까 봄꽃을 오래 즐기려면 섬진강변에 매화필 때 남녘으로 내려가 상경하는 봄을 따라 걸어서 올라오는 게 상책이다. 한데 성미 급한 사람들이 자동차의 가속페달을 밟아대며 꽃이 안 보인다고, 봄이 실종됐다고 공연히 불평만 늘어놓는다.
38선을 품고 있는 포천은 경기도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봄이 늦다.
남녘에선 꽃빛을 삼켜버린 풀빛이 녹음을 드리우기 시작할 무렵에야 포천의 봄은 무르익는다. 최근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등재된 국립수목원이 있는 광릉숲은 오월이 되어서야 꽃빛을 지우고 신록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꿈을 꾸면서도 키가 자라는 아이처럼 오월의 광릉숲은 하루가 다르게 산빛을 달리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포천은 '근대소설의 개척자 동농 이해조 선생'의 고향이자 길라잡이의 고향이기도 하다. 너무 풍경에 익숙해진 탓에 길을 제대로 일러주지 못하는 시골사람처럼 막상 내가 나고 자란 고향에 대해 말하려니 한마디로 정리되지가 않는다.
2013년 올해는 포천현 설치 600주년, 시 승격 10주년이 되는 포천시가 정한 '포천방문의 해'여서 이런 때에 포천을 소개하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긴 하나 자화자찬으로 비쳐질까 조금은 주저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천을 5월의 기행지로 정한 것은 '포천이 낳은 근대소설의 개척자'로 '자유종'을 쓴 '동농 이해조' 선생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찾아갈 때마다 어린아이처럼 나를 가슴 설레게 하던 광릉숲의 눈부신 신록을 보여주고픈 욕심 때문이다.
광릉숲은 조선 4대 임금인 세조의 광릉을 조성하면서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천연자연림이다. 1,018ha의 자연림과 100ha에 이르는 전문전시원·산림박물관·산림생물표본관·산림동물원·난대온실·열대식물자원연구센터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국립수목원은 포천시에, 세조대왕의 광릉은 남양주시에 속한다. 하지만 사색의 향기 문학기행은 문학의 향기를 좇아 시계(市界)쯤은 무시하고 자유로운 행보를 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답사를 떠나던 날은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처마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여행배낭을 챙기던 마음을 몇번이나 주저앉혔지만 주저앉는 마음을 다독여 이른 아침 광릉수목원을 향해 길을 떠났다. 광릉국립수목원 가는 길은 의정부를 지나 43번 국도를 타고가다가 축석령에서 우회전하여 동쪽으로 난 314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는 길과 구리에서 퇴계원을 거쳐 진입하는 두 가지 길이 있는데 이번 답사는 평소에 다니던 43번 국도를 버리고 구리를 돌아 제일 먼저 춘원 이광수의 기념비가 있는 봉선사를 찾았다.
봉선사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 25교구 본사로 969년(고려 광종 20)에 법인(法印) 국사 탄문(坦文)이 창건한 절로 처음엔 운악사로 칭했다. 1469년(예종 1)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 윤(尹)씨가 세조를 추모하여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89칸의 규모로 중창한 뒤 봉선사라고 했다. 봉선사는 광릉의 원찰로 <선왕의 능을 받들어 모신다(奉護先王之陵)는 뜻을 담고 있다. 당시 봉선사의 현판은 예종이 직접 썼다고 하며, 이 해에 정희왕후 윤씨가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든 봉선사 대종은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한국불교의 근대적인 교육방법의 필요함을 절감하고 동국대학교의 전신이 되는 명진학교를 설립한 월초화상의 뒤를 이어 후진양성과 경전번역에 평생을 바친 운허스님이 1970년 복원한 큰법당은 최초의 콘크리트 사찰건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로 등재되었다.
내리는 비 때문인지 봉선사 주차장은 주말임에도 한가로웠다. '운악산봉선사'라는 한글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 왼쪽에는 넓은 연꽃방죽이 있다. 연꽃 피는 여름날이면 주차장에만 들어서도 맑고 그윽한 연꽃향기가 방문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아직은 겨울 빛을 지우지 못한 채 깊은 사색에 잠겨 있다. 개인적으로도 연꽃 보러 자주 찾아왔던 연지인데 나무데크가 새로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니 꽃구경 오는 인파가 많이 늘어난 모양이다.
연지의 반대편엔 도열하듯 늘어선 승탑과 비석들 사이에서 갓도 없이 비를 맞고 서 있는 우리나라 근대문학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는 춘원 이광수의 기념비가 눈에 띈다.
봉선사의 주지였던 운허스님과 팔촌지간이었던 춘원이 이 절에 칩거한 적이 있던 인연으로 운허스님의 도움을 받아 그의 유족들이 1975년에 세운 기념비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이광수는 열 살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뒤 친일단체 일진회의 추천으로 도일해 메이지 학원 중학부에서 공부했다. 1917년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인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했고, 1919년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후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뒤 친일 행위가 두드러진다.
이광수는 1943년 말 도쿄에 건너가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유학생들을 상대로 학병 지원을 격려하는 연설을 했다. 그러나 시국이 점차 험악해지자 귀국 후 서울 생활을 접고는 1944년 3월 아내와 자녀들을 서울에 둔 채 진건면 사릉리에 땅을 사고 조그만 초가를 지어 살면서 농사도 직접 지었다. 같은 정주 태생으로 불교 운동에 정진했던 삼종 이학수(운허 스님)가 근처 봉선사의 주지로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비록 시골 농막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서울의 부름에는 언제나 마다하지 않았던 그였다. 1944년 6월 18일 조선문인보국회의 평의원으로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아 결전 태세를 강조하는 강연을 하였다. 1944년 11월 11일부터 14일까지 중국 난징에서 열린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했다. 광복을 맞기 직전인 1945년 상반기에도 이런저런 정치 행사에 얼굴을 내밀며 친일 강연을 계속했다. 이런 행적 때문에 그가 은둔을 자처하면서 혼자 살림을 살았던 사릉의 농막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직접 소를 사서 기르며 논밭을 갈아 보기도 했지만 이것은 한낱 호사가의 일에 불과했다.
1945년 8월 16일, 이광수는 사릉천변의 산책길에서 운허스님으로부터 광복의 소식을 접하고는 잠깐 혼돈 상태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삶과 그 족적을 다시 쓸어 덮을 수가 없음을 알고 차라리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죽음을 택할 용기가 없었다. 그는 병을 핑계 삼아 인근 봉선사 절간으로 숨어들었다. 주지인 운허 스님이 경내에 작은 방 하나를 내주었으니 ‘다경향실(茶經香室)’이라는 편액이 걸린 방이었다.
이광수는 여기서 수필집 ‘돌베개’와 ‘나의 고백’을 쓰며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당시 문단에서는 일제강점기 문화 잔재 청산이 가장 중요한 슬로건이 되면서 이광수의 이름 앞에는 ‘광적인 친일분자’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광수는 당시의 심경을 ‘나의 고백’에서 이렇게 털어놨다.
‘과거 칠팔 년 걸어 온 내 길이 그 동기는 어찌 갔든지 민족정기로 보아서 나는 정경 대도를 걸은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조선 신궁에 가서 절을 하고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이름을 고친 날 나는 벌써 훼절한 사람이었다. 전쟁 중에 내가 천황을 부르고 내선일체를 부른 것은 일시 조선 민족에 내릴 듯한 화단(禍端)을 조금이라도 돌리고자 한 것이지만 그러한 목적으로 살아 있어 움직인 것이지만 이제 민족이 일본의 기반(羈絆)을 벗은 이상 나는 더 말할 필요도 또 말할 자격도 없는 것이다. 가장 깨끗하자면 해방의 기별을 듣는 순간에 내가 죽어 버리는 것이지마는 그것을 못한 나의 갈 길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이광수의 자기비판은 단순한 개인적 윤리의식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문제가 많다. 그가 살아왔던 삶과 그가 지향했던 문학은 모방과 굴종에서 비판과 저항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문화가 드러내는 모든 문제성을 고스란히 배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때늦은 반성의 글쓰기는 친일적 행위에 대한 혹독한 자기비판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춘원은 글을 통해 독자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길이란 글을 쓰지 않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춘원 이광수.
한국 근대문학의 맨 앞자리에 있으면서도 한국문학의 가장 깊은 정신적 상처이기도 한 그를 만나러 이 절을 찾았던 문인 중에 김종삼 시인이 있다. 이제 춘원이 기거하던 다경향실도 사라졌고 춘원을 찾아왔던 김종삼 시인도 고인이 된지 오래다. 그런 사연을 아느지 모르는지 추녀 끝의 풍경은 한가로이 울고 석가탄신일을 앞둔 대웅전 절마당은 울긋불긋 내걸린 수많은 연등으로 가득차 있다. 새삼 세월무상을 느끼며 봉선사를 떠나 광릉으로 발길을 옮겼다.
많은 사람들이 광릉수목원은 잘 알아도 광릉이 조선 7대 임금인 세조(世祖)와 왕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능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광릉 숲은 조선 7대 세조의 능이 조성되면서 그 주변 숲을 능림(陵林)으로 지정하여 보존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시대 440여 년 동안 풀 한 포기 뽑는 것도 금지되어 잘 보호된 이 광릉 숲은 세계적인 희귀종 크낙새.하늘다람쥐.장수하늘소.원앙새 등 20여 종 천연기념물이 서식하고, 천연림을 비롯한 2,900여 종의 식물, 3,000여 종의 동물이 자생하고 있어 생태계의 원형을 이루고 있다. 한마디로 광릉 숲은 동식물의 낙원이며 천연의 자연사 박물관이다.
광릉의 주인인 세조는 1417년(태종 17년) 9월 29일에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조는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높았으며, 또한 기골이 장대하였다. 처음에는 진평대군(晉平大君)이었으나, 함평(咸平)대군, 진양(晉陽)대군 등으로 바뀌다가 다시 1445년(세종 27년)에 수양(首陽)대군으로 바꾸었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때는 세종의 명을 받아 불서(佛書) 번역을 관장하고 향악의 악보를 정리에도 힘을 쏟았다.
그러나 그 해 5월에 형인 문종이 승하하고 나이 어린 조카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양대군은 측근 심복인 권람.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이듬해인 1453년(단종 1년) 10월 10일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문제는 세종이 자기가 적장자인 양녕을 대신하여 왕위에 오른 것이 마음에 걸려 병약한 문종을 왕위에 올린데서 엄청난 비극이 싹튼 것이었다.
수양대군은 자기와 대립 관계에 있던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 등과 안평대군을 제거하고, 종국에 가서는 어린 조카인 단종 마저 죽인 참극의 주인공이 됨으로써 세조는 조선사에서 씻을 수 없는 천륜을 어긴 임금으로 우리에게 각인되었다.
단종복위를 계획했다가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사육신의 한사람인 충목공 유응부 장군이 태어난 곳이 지척거리에 있다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무봉리 순대국'으로 유명한 무봉리가 만고의 충신으로 칭송받는 유응부 장군의 고향으로 그를 기리는 사당인 충목단이 있다.
세조는 왕이 된 후 국정을 안정되게 수행하고 나라 전반에 대해 지대한 공을 세웠으나 자기의 죄값에 늘 불안을 느껴 불교에 심취하다 1468년 9월 7일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 다음날 52세로 수강궁에서 승하했다.
세조는 죽으면서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하니 석실과 석관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광릉은 다른 왕들의 묘와 달리 검소한 능이 되었다.1468년(예종 원년) 9월 25일에 예종은 선왕의 능호를 광릉, 묘호를 세조라 하고, 같은 해 11월 28일에 이 곳 주엽산 아래 예장했다.광릉은 같은 능역에 있지만 왕릉과 왕비의 능을 각각 다른 언덕 위에 단릉처럼 조성하는 형식인 동원이강의 능 형태이며, 두 능의 중간 지점에 정자각을 세운 최초의 능이다.
진달래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재실을 지나 조선 왕릉 유일의 하마비가 남아 있는 입구를 지나면 능까지 오르는 완만한 경사길이 좌우로 빽빽하게 늘어선 고목들로 서늘한 숲기운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한수 이북에 위치하여 유난히 봄이 늦은 광릉숲은 4월도 하순으로 접어드는데 이제 겨우 잠에서 깨어나는 중이다. 조선 역대 왕과 왕비의 무덤인 조선 왕릉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됨으로써 인류 모두의 귀중한 유산이 되었다.
절대왕권을 휘둘렀던 세조대왕도, 그 왕릉을 지키고 섰던 고목들도 세월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능을 오르는 길섶의 숲엔 지난 2010년 초가을 태풍 곤파스에 쓰러진 수백년 된 고목들이 초록 융단 같은 이끼를 덮고 누워 있는 모습이 간간히 눈에 띈다.
능역은 크게 능침(陵寢, 성역)과 제향(祭享, 성역과 속세가 만나는 공간). 진입(속세)의 세 공간으로 나뉜다. 철없던 시절, 이곳으로 소풍을 오면 그런 성역인 줄도 모르고 친구들과 능침까지 마구 오르내리며 뛰어다녔던 생각을 하면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다행히 광릉은 홀수날은 왼편의 세조릉을, 짝수날엔 오른편의 정희왕후릉의 능침까지 오르는 길을 개방하여 왕릉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
옛추억을 반추하며 광릉을 돌아보고 홍살문을 지나 주차장으로 내려오는데 숲속 어딘가에서 산비둘기 울음이 들려왔다. 일찍이 연암 박지원은 아침에 뜨락에 서서 우짖는 새소리를 듣고 부채를 내리치며 '나는 오늘 아침 책을 읽었다'고 했다던데 그럼 나도 책을 한 권 읽은 것인가.
또한 연암을 스승처럼 섬겼던 홍길주는 '문장은 다만 책 속에 있지 않고, 독서는 다만 책 속에 있지 않다. 산과 시내, 구름과 새나 짐승, 풀과 나무 등의 볼거리 및 일상의 자잘한 일들 속에 독서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신록의 숲을 거닐며 새소리까지 들었으니 너무 독서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닌지.
다시 차에 올라 김종삼 시인의 시비를 찾아 고모리 저수지로 향하며 여행이야말로 가장 문학적인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광릉주차장에서 멸 걸음 옮겨 내를 건너면 광릉국립수목원이다. 그 수목원 주차장을 확장하면서 인근 수목원가든에 서 있던 고김종삼 시인의 시비는 2011년 12월 21일 고모리 저수지 수변공원 내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의정부 쪽으로 차를 달리다가 고모리 까페촌 길로 접어들어 언덕을 내려가다 보면 고모리 저수지가 눈에 들어온다. 시비가 옮겨진 물가에 자리한 '축제의 장'은 아직 공사가 진행 중이라 다소 어수선한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시비가 이 곳에 자리 잡은 사연을 알고나면 콧등이 찡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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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맞고 선 김종삼 시비는 조각가 최옥영 교수의 작품으로 글씨는 서예가 박양재가 썼다.국내 모든 시비 중 가장 잘 만들어진 아름답고 의미가 담뿍 담긴, 조형물로도 아주 훌륭한 시비로 꼽힌다. 시비의 오른 쪽엔 고 천상병 선생과 신경림 시인, 김광림 시인 등 9분의 서명이 담긴 시비록이 비스듬히 놓여 있다.
하빗돌에는 <민간인>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고, 상빗돌 뒤에는 <북치는 소년>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앞의 것은 분단문학, 뒤의 것은 순수문학이라는 김종삼의 시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민간인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嬰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단박에 독자들의 가슴을 에어내며 실향민과 고향 사이에 놓인 검디검은 심연을 환기시키는 이 시는 분단의 아픔을 소재로 한 유일한 작품이다. 김종삼의 시들은 그가 제 삶의 터전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을 거듭 보여준다. 그 삶의 터전이 그의 고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한 페르소나가 “나의 본적은/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 겨울이 온 교회당 한 모퉁이”(‘나의 본적’)라고 변죽을 울리는 그 고향은 딱히 휴전선 너머 은율이 아니다. 같은 화자가 “나의 본적은 푸른 눈을 가진 한 여인의 영원히 맑은 거울”이라고 말하는 데서도 설핏 비치듯, 그 고향은 어떤 지순(至純)의 관념 세계이고, 그 세계는 유라시아 대륙 저편에 놓여있는 게 아닐까 싶다.
북 치는 소년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이 시비가 처음 세워진 것은 김종삼 시인이 타계한 지 9년만인 1993년 12월이었다. 김종삼 시인을 흠모하며 명륜동에서 <쇠죽가마>라는 카페를 운영하던 박중식(朴重湜) 시인이 앞장서서 건립을 추진했다.
박 시인은 '김종삼 시비 건립 추진 본부'를 카페 2층에 마련하고 5년 동안 이 일을 추진하여 나갔다. 인사동 <돌> 갤러리에서 펼친 '고 김종삼 시인 시비건립을 위한 39인전'이 가장 핵심적인 사업이었다. 여기에는 김종삼 시인을 좋아하는 문인, 조각가, 화가 등이 참여하여 글씨, 그림, 조각품 등을 내어 놓고 이것들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구중서, 황명걸, 신경림, 김구용, 박두진, 이제하 등의 문인들은 물론 많은 조각가, 화가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많이 참여하여 건립된 뜻 깊은 시비였던 것이다.
]박 시인의 친구가 운영하는 신탄진의 석재공장에서 최옥영 조각가의 손에 의하여 시비는 만들어졌으나 이를 세울 만한 땅을 마련하기는 어려웠다.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당시 광릉수목원에 근무하는 공무원이었던 시인 한 분이 수목원에 바로 붙어 있는 <수목원 가든>을 소개하여 김종삼 시비가 거기에 자리를 잡고 18년간 서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관리는 소홀해졌고 주변의 나무들이 시비를 가려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그 위치가 국립수목원 주차장 확장 부지에 포함되어 이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유족들은 여러 모로 이전 장소를 물색하다가 파주의 헤이리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시비가 이전되어 다른 곳으로 옮겨질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주민들은 타지로의 시비 이전을 저지하고 문화적 가치가 높은 김종삼 시비를 관내에 유치 보전하기 위해 힘을 모았다.
주민자치원회 이제승 위원장은 같은 지역에 있는 대진대학교 교수들에게 유족 설득에 힘을 보태 줄 것을 요청하고, 포천시청에 이전 경비 지원을 요청하는 등 적극적이고 재빠른 대처를 함으로써 결국 소흘읍 고모리 저수지 친수 공간 조성사업 부지에 있는 '축제의 장' 건립 부지로 이전하여 시비는 다시 포천 땅에 남게 되었다.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나 소년기엔 평양에서 학교를 다녔고,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7년 동안 교육을 받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1947년 월남하여 죽는 날까지 고향을 그리워 하며 서울에서 가난하게 살며 디아스포라의 노래를 부르다 간 김종삼이 가장 미워한 것은 전쟁이었고, 가장 사랑한 것은 음악이었도, 가장 그리워 한 것은 고향이었다. 전갱과 음악이 분단문학과 순수문학으로 만들어 준 력이었다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어머니에 대한 시편들을 남기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라는 시에서 그의 시비가 포천에 남게 된 필연성을 찾아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나는 속으로 치열하게 외친다
부인터 공동묘지를 향하여
어머니 아직 나는 살아 있다고'
부인터 공동묘지는 김종삼 시인의 양친 묘소가 있는 곳인데 포천시 소흘읍에 있다. 여기서 시인은 지병으로 중태에 빠져 있음에도 어머니를 불러가며 삶의 의지를 다지고 있는 것이다. 김종삼 시인이 최후로 그리워 한 어머니, 그 어머니가 계신 곳이 다름 아닌 포천 땅이었다.부모님 묘소로부터 1.5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고모리에 시비가 다시 자리잡은 것이 우연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순수한 영혼을 지향했던 시인 김종삼, 그러나 전쟁과 이산 그리고 가난의 고통 속에서 언제나 향수 속에 살던 그는 죽어서 마지막 고향으로 포천 땅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의 시비가 서 있었고 또 앞으로 영원히 서 있을 포천 땅은 산자수명의 아름다운 이상향으로서 김종삼 시인의 영혼을 포근히 언제까지나 감싸 줄 것이다. 포천과 더불어 그의 시문학의 예술성이 길게 멀리 눈부시게 빛나게 될 것이다. 1947년에 월남해 약 216편의 시를 남겼으며, 한국시인협회에서는 순수 서정시의 거두로서 한국시문학사에 길이 빛날 족적을 남긴 시인으로 재조명 사업이 진행중인 인물이다.
지금의 자리로시비를 옮기는데 관여했던 한 시인은 "김수영보다도, 김춘수보다도, 미당 서정주 버금가는 시인이라 다른 도시에 빼앗기면 절대 안된다.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 시인이 있다면 이 분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종삼 시인의 부인 정귀례 여사는 고생은 했지만 행복했노라고 했다. 괜찮은 사내 하나 옆에 끼고 살려면 엔간한 고생쯤은 감수해야 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끝으로 내가 좋아하는 그의 시 '묵화'를 소개하며 김종삼의 시비와 작별하려 한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김종삼(1921~1 984) '묵화(墨畵)'
고모리의 김종삼 시비를 뒤로 하고 다시 북쪽으로 20여 분 차를 달리면 신북면 주민센터가 있는 기지리에 이른다.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폐석장을 문화공간으로 바꾸어 놓은 포천아트밸리가 있고 오른 쪽으로 다리를 건너면 가까이에 경복대학교가 있다. 경복대학교 정문을 들어서서 100여 미터쯤 올라가다 보면 우측에 봉분이 하나 눈에 들어오는데 이 묘의 주인이 개화기의 선각자이자 근대소설의 개척자인 동농 이해조 선생이다.
이해조 선생은 조선조 16대 왕인 인조의 셋째 왕자인 인평대군의 10대 손으로 포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호는 동농(東濃), 이열재(李悅齎)이고, 필명은 우산거사(牛山居士), 선음자(善飮子), 하관생(遐觀生), 석춘자(惜春子), 신안생(神眼生), 해관자(解觀子)등이다.
어려서는 전통적인 양반 가문 출신으로 한문 공부를 하여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신문학에 관심을 두고 이에 전념하였다. 취미로는 거문고 타기와 활쏘기였으며 국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1906년 11월부터 소년 한반도(少年 韓半島)에 소설 ‘잠상태(岑上苔)’를 연재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1907년에는 대한협회, 1908년에는 기호학회(畿湖學會)에 가담하면서 신문학의 소개와 민중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한편 매일신보(每日新報), 황성신문(皇城新聞) 등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많은 신소설을 발표하여 신소설의 초창으로 알려졌다. 작품을 통하여 봉건제도의 비판, 여권신장(女權伸張), 미신 타파, 사회풍속 개량 등과 우리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가정의 비극적 주제를 보여주는 춘외춘(春外春)(1912), 구의산(九疑山)(1912), 미신 타파를 내세운 구마검(軀魔劍) (1908), 화세계(花世界)(1911), 원앙도(鴛鴦圖), 봉선화(鳳仙花) 등 많은 작품이 있다.
줄 베르누(Jules verne)의 철세계(鐵世界)를 번안했고 고대소설을 신소설화하여 춘향전을 옥중화(獄中花)로, 심청전을 강상연(江上蓮 )으로, 별주부전을 토(兎)의 간(肝)으로, 흥부전을 연(燕)의 각(脚)으로, 소양정기를 소양정(昭陽亭)으로 발표하여 큰 화제를 일으켰다.
그의 소설은 사회 계몽이라는 도덕적 기능과 오락적 기능에 대하여 동시적 인식으로 최초의 근대적인 문학관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그의 소설은 구어체의 특징과 인물 성격의 사실적 묘사와 기자 생활에서 오는 보고체 문장 형식 등이 두드러지며 특히 고전 소설의 구조적 특징과 이념형 인간들을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근대적 사상을 깔고 있다는 점에서 국초(國初) 이인직(李人稙)과 더불어 신소설을 개척한 선구자로서 공로가 있다.
우리 소설사는 대표적인 신소설 작가로 이인직과 이해조를 꼽는다. 1930년대 말에 임화가 이인직이 개척한 신소설이 이해조에 의해 공고한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내린 후 지금까지 쭈욱 이어져왔다. 그런 까닭으로 두 사람을 유사한 신소설작가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지만 두 사람은 출신 성분도 태어난 시기도 달랐다. 내가 먹은 음식이 나를 만들듯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산천의 풍토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그런 의미에서 한미한 출신의 이인직이 친일을 했던데 반해 왕가의 후손이었던 이해조가 친일 행적을 보이지 않은 것을 출신의 차이가 행동과 문학적 차이를 만들어 냈을 것이라 유추해 볼 수 있다. 많은 유명무명의 문인이 친일 인명록에 이름을 올리며 문학적 성과를 훼손당했음에도 이해조 선생이 친일논란에서 벗어나 포천이 낳은 신소설의 개척자로 기억된다는 것은 동향인으로서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통소설을 신소설화하여 근대소설의 원형을 제시하며 '자유종'에 압축된 애국계몽사상가로 40여 편의 소설을 집필하여 전통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시기에 문화적 유산을 남긴 중체서용의 근대정신을 문학, 언론, 교육활동을 통해 실천했던 동농 이해조 선생은 포천 뿐이 아니라 온 국민이 기려야 할 인물임에도 아직 문확관조차 마련되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의 밎처럼 커다란 돌덩이가 되어 가슴에 얹힌다.
봉선사에서 시작하여 춘원 이광수와 시인 김종삼, 신소설의 개척자 이해조 선생까지 일별하며 문학의 향기로 영혼의 허기를 채웠으니 이제 슬슬 육신의 허기도 메워야 할 시간이다. 포천의 대표적인 음식을 꼽자면 이동갈비와 포천막걸리, 그리고 파주골 손두부가 유명하다. 43번 국도를 따라 산정호수를 향해 달리다가 성동검문소 지나 천변을 따라 이동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파주골 손두부촌이 나온다.
파주골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명성산에서 왕건에게 패하여 도주한 곳이라 하여 패주골로 불리다가 파주골이 되었는데 국산콩만을 고집하는 파주골 손두부는 착한 가격의 웰빙 음식으로 여행에 지친 나그네에게 구수한 고향의 맛을 흠뻑 느끼게 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두부전골에 백운산 맑은 계곡물로 빚은 이동막걸리까지 곁들이면 취생몽사 한다 해도 억울할 게 없을만큼 천상의 궁합이다.
파주골 손두부로 배를 채운 뒤 소화도 시킬 겸 다음으로 찾아가는 곳은 산정호수 근처의 평강식물원이다.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많은 계곡을 품고 있는 포천엔 식물원이 유독 많다. 허브 아일랜드를 비롯하여 아이리스 식물원인 유 식물원, 양귀비꽃의 군무가 매혹적인 뷰식물원, 그리고 한의사 이환용 원장이 십여 년 넘게 공들여 일군 평강식물원이 대표적인 식물원이다.
그중에도 평강식물원은 아시아 최대 규모인 1,800여 평의 암석원과, 50여 개의 수련들을 모아 놓아 개화시기에 그 찬란함을 자랑하는 연못정원, 데크를 따라 걸으며 자연 생태를 바로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습지원, 사철 늘 푸른 잔디광장, 만병초원, 이끼원, 고사리원 등 12개의 테마로 조성되어 많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식물원으로 고 노무현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는 유일하게 방문했던 식물원이기도 하다.
난민촌에서 태어나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며 스스로 생계를 꾸려야 했던 이환용원장은 교통사고로 인한 다리마비로 고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시인의 꿈을 안고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했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교통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가 마비되었는데 우연히 라디오에서 지압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압과 침을 배워 스스로의 다리를 치료했는데 신통하게도 마비되었던 다리가 서서히 풀렸다.
그때부터 한의사가 자신의 길이라고 결심한 이 원장은 한의대를 향한 도전을 시작한다. 하지만 한의대에 벽은 높기만 하여 3수를 하고도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군에 입대를 했다. 군에서도 열심히 노력하는 그를 보고 상관의 배려로 시험을 볼 수 있긴 했지만 대학입학은 요원하기만 했다. 제대 후 학원 칠판을 닦으며 10년 가까이 공부한 끝에 9번 째 도전 끝에 동국대 한의대에 당당히 합격을 한다.
온갖 고생을 하며 한의대를 겨우 졸업하고 빚을 내어 평강한의원을 개원했지만 은행빚을 갚지 못해 거의 망해갈 즈음 코나무 뿌리껍질을 먹고 축농증이 나았다는 할머니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어 8년 간의 연구 끝에 콧병치료약인 청비환을 개발, 전국의 비염환자들이 모여들며 한의원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이원장은 유명인사가 된다.
그때 그에게 떠오른 또다른 꿈이 '어릴 적 뛰놀던 고향 앞동산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청비환으로 번 돈을 모두 쏟아부어 8년에 걸친 노력 끝에 국내 최대규모의 자연생태식물원인 평강식물원을 만들었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은 인디언의 기우제처럼 이루어질 떄까지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한다는 것을 이환용 원장의 평강식물원을 보면 알 수 있다. 휴전선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우리나라 최북단에 위치한 평강식물원엔 아직 꽃들이 만개하지 않았다. 5월 기행 때 어여쁜 자태를 내보이려고 아직 깊이 숨겨둔 모양이다.
평강식물원의 꽃들을 만나보고 길을 내려와 다신 산길을 따라오르면 포천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산정호수가 명성산의 산그림자를 드리운 채 우리를 반긴다.
병풍과 같이 푸근한 명성산과 망봉산, 망무봉을 끼고 있는 그림 같은 호수. 산속의 우물과 같이 맑은 호수라 해서 ‘산정(山井)호수’로 불린다. 일제 시대에 농업용 저수지로 만들어졌으나 호수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워 관광지로 인기를 얻고 있다. 호수 주위를 도는 5㎞의 산책로는 연인들에게 인기 있는 데이트 코스로 하늘을 담고 있는 호수 위에 산 그림자까지 겹쳐지면 그 풍경이 환상적이다.
봄이면 꽃길이 되고 가을이면 단풍 길로 변하는 산책로는 특히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이른 아침이나 가로등이 불을 밝히기 시작하는 일몰 전후가 멋지고, 겨울날 꽁꽁 언 호수의 풍경도 일품이다. 즐길거리도 많아 호수 위에서는 보트 놀이를 즐길 수 있고 겨울철이면 스케이트와 눈썰매를 즐길 수도 있다. 버섯과 도토리 등 웰빙 재료를 이용해 음식을 내는 식당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가 망국의 슬픔으로 산기슭에서 터뜨린 통곡이 산천을 울렸다는 전설을 간직한 산정호수 앞 명성산(일명 울음산)의 정상 부근은 30만㎡의 억새꽃밭이 완만하게 형성돼 있다. 해마다 10월이면 이곳의 은빛 장관을 만나기 위해 많은 등산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거울 같은 산정호수에 눈을 씻고 마지막 기행지로 점 찍어둔 배상면주가의 '산사원'으로 차를 달린다.
전통술 갤러리 '산사원'은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에 있는 술 관련 문화센터다. 한국의 전통술과 관련한 자료를 주로 전시하고 있다. 전통술 갤러리 산사원이 처음 세워진 것은 1996년이다. 설립 당시 산사원은 ‘전통술 박물관’이라는 이름의 박물관이었다. 전통주 제조업체인 국순당 창업자 배상면 회장의 차남 배영호 대표가 부친의 도움으로 포천에서 배상면주가를 창업하면서 박물관도 함께 설립했다.
술을 만드는 공장 기계 대신 조상들이 직접 술을 빚는 데 사용했던 누룩의 모양을 잡아주는 틀 등 전통 도구들을 모아 쌓아놓는 형태로 전시한 것이 박물관의 출발점이었다. 이후 박물관에는 다양한 볼거리와 먹을거리 등이 보강됐고 2002년 전통술 갤러리 산사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산사원’이라는 이름은 배상면주가의 대표 술인 ‘산사춘’의 원료 산사나무로 가꿔진 정원이라는 뜻이다. 산사원은 전통술과 관련한 전시공간이지만 술을 직접 빚어보고 맛 볼 수 있는 문화 센터에 가깝다. 배 대표는 “이야기(Story)를 만들고, 역사(History)를 만들고, 전통(Tradition)을 만들고, 문화(Culture)를 만들어가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실제 술을 빚는 데 사용되는 50여 개의 전통 장독이 산사정원이라는 이름의 야외 정원에 늘어서 있다. 또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마실 수 있도록 한 유상곡수라는 공간도 있다. 실내 전시 공간 1층에는 전통술과 관련한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전통 증류주를 맛볼 수 있는 무료 시음 공간과 술이 보관돼 있는 와이너리 등이 갖춰져 있다. 산사원은 전통 방식으로 술을 빚은 뒤 관람객이 빚을 술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가양주 교실>을 따로 운영하고 있다. 전통 술갤러리에서 입장료를 내면 작은 작은 술잔을 나눠주는데 갤러리 안의 다양한 술을 시음하며 입맛에 맞는 술을 쇼핑할 수도 있다. 알맞게 취기가 오른 뒤에 산사정원을 천천히 거닐며 봄과 작별하는 풍류를 즐겨볼만 하다.
포천의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포천석’이다.
청와대 영빈관에는 18개의 돌기둥 있는데 이곳 전면의 돌기둥 4개가 포천석이다. 포천석은 익산의 황등석, 거창의 거창석 등과 더불어 국내에서 생산되는 3대 화강석으로, 품질이나 아름다움이 국내는 물론 외국산에 비해 서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때문에 포천에는 지금도 채석장이 적지 않다. 그 중 30여 년 동안 방치됐던 폐채석장 한 곳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탈바꿈 시킨 게 바로 포천 아트밸리다.
포천시가 155억 원을 들여 신북면 기지리 14만 743㎡에 조성한 포천아트밸리는 2009년 10월 개장했다. 병풍처럼 둘러싸인 절벽과 채석과정에서 만들어진 7400㎡ 의 인공호수가 어우러져 비경을 이룬다. 야외공연장 2곳과 이벤트 광장, 호수의 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산책로와 전망데크도 설치돼 있다. 특히 매표소에서 전시관까지 420m 주 보행로에는 50명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는 친환경 모노레일이 운행되고 있다. 아트센터에서는 각종 거리·무대공연은 물론 전시행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연중무휴로 펼쳐지고 있다.
기행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하루 일정으로 어느 한 지역을 세세히 돌아보는 일은 불가능 하다. 서울과 가까이 있어 조금은 시간이 여유로울 거라 생각했는데 산사원을 돌고 나니 날이 저문다.
말에 ‘살아서는 포천 가야 양반이고, 죽어서는 장단 가야 양반이다’라는 말이 있다.오성과 한음이 태어난 내 고향 포천은 계곡이 많고 물이 많아 곳곳에 숨겨진 비경이 많고 명현의 고장답게 뛰어난 인물들이 많다. 태산가로 유명한 봉래 양사언의 금수정을 포함한 영평팔경은 돌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응부와 영의정을 지낸 유순, 이항복, 이덕형, 구한말의 애국지사 면암 최익현의 족적도 살필 겨를이 없었다.
모두 돌아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사람의 걸음걸이의 속도에 맞춰 피어나는 꽃처럼 시간을 두고 찬찬히 돌아보면 고향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라 자위해 본다. 문향을 따라 고향땅을 휘이 한바퀴 돌고 나니 가슴에 알 수 없는 감회가 술기운처럼 번져간다. 아쉬움을 광릉숲에서 받아 적은 나의 졸시로 달래며 포천기행에 마침표를 찍는다.
광릉숲
바람이 꾹꾹
허공을 밟고 간 자국마다
꽃이 피고
빗방울 툭툭
나무를 스치운 자리마다
새 잎이 돋았다
그대 향기로
내 안이 환해지는
늦은 봄날
광릉숲에 들어
초록의 문장을 읽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