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으며 피었나니...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문득 코끝이 찡해진다. 작은 바람에도 어쩌지 못하고 흔들리고 내리는 비에 속수무책 젖는 날이 허다했던 나로서는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있냐고, 그렇게 바람과 비에 젖으며 따뜻하게 피었났다고...토닥 토닥 등을 두드려주는 것만
같아 왈칵 서러움이 밀려온다.
몇 줄의 시어(詩語)는 때로 대하소설을 합친 것보다도 더 웅장하고 모든 우주의 기운이 깃든 것처럼 장엄하게 다가온다.
얼핏 A4용지를 반도 채우지 못한 언어가 온통 나를 흔들때가 있다.
그 많은 언어중에 어찌 이런 말들을 건져올릴 수 있는 것인지 그저 내 눈에는 의미없이 스쳐갔던 수 많은 언어가 부끄럽기도 하다.
봄부터 내내 마음아픈 일이 너무도 많았었다.
밤을 새우고 눈을 뜨는 아침이면 가슴 덜컥하는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들 가슴을 마구 휘젓는 날들이.
누가 누구에게 위로조차 할 수도 없이 거의 모두가 마구 흔들리는 그런 날들이.
'흔들리지 않고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있냐'는 시인의 말에 겨우 추스린 마음이 대책없이 무너져 내린다.
어느새 남녘의 섬에 들어와 산지가 5년이 되었다. 아름다운 풍광에 반하여 주저앉은 것만은 아니었다.
부는 바람에 마음을 붙들어둘 곳이 없어 흘러 흘러 섬에 닻을 내렸을까. '섬'이란 시에서 문득 발길이 멈추어진다.
'단 한 번의 큰 파도로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당신을 따라가다
그만 빈 갯벌이 되어 눕고 말았다
쓸쓸한 이 바다에도 다시 겨울이 오고 물살이 치고
돌아오지 못한 채 멈추어 선 나를
세월은 오래도록 가두어놓고 있었다' -섬중에서-
바람이었는지 큰 파도였는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린 나는 흘러흘러 섬에 도달했고 세월은 지금까지 나를 가두어놓고 있다.
사실 대륙 한 가운데에서도 섬은 있다. 스스로 갇힌 세상이 섬이고 시간이 섬이다.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얖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이 저녁 그대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깊은 물중에서-
억장이 무너져 내린다. 정작 가문 내 가슴에 종이배 하나라도 띄우지 못한 것은 물을 채우지 못한 빈 젖가슴 탓인 것을 내 여지껏
알지 못했다니. 빵빵하게 부푼 공갈빵을 열었을 때 터져나오는 허망함처럼 빈 가슴이 부끄럽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속에 시가 있다. 밋밋한 하얀 종이위에서 노니는 글보다 풍만한 유화속의 글들이 더 풍요스럽다.
원래 시집이란 것은 세월이 흘러도 신선하다. 마치 처음 본듯한 싯귀가 낯설게 다가오는 것은 내 무능한 기억력 탓만은 아니다.
잠시 내곁에 머물다 지나간 싯귀는 돌아돌아 다시 만나도 나이들지 않는다.
그래서 시집은 항상 청춘인 것만 같다.
문득 내 곁을 스쳐간 사람들과 시간들이 떠오른다.
지금쯤이면 '그대 잘 가라'하고 쿨하게 보내줘도 좋을 것만 같다. 가슴속에 고여 썩어만 가는 기억들은 오래오래 흐르는 강물을 따라
흘려보내야 할 시간이 온것같다.
오늘 내 곁에 머물렀던 아름다운 싯귀는 다시 첫날밤 색시처럼 나를 수줍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저 나만이 나이를 꾸역꾸역 먹고 늙어가겠거니.
시인이 '내 시가 위로의 언어이기를'소망했듯이 그의 마음이 잠시 내게 머물러 토닥토닥 마른 가슴을 덥히고 지나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