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갖되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갖되어 풀잎만 맺으려는고
부르기만 하여도 눈물이 주르르 흐를 것만 같았던 '동심초'의 노랫말이 당나라의 여류시인
설도의 '춘망사'에 나온 싯귀임을 이 책에서 알게되었다.
조선의 여류문인이었던 '허난설헌'을 떠올리게 하는 설도의 자가 '홍도'라고 했던가.
아비가 지어준 이름 영이라고 불렸던 여섯 살 아이는 영특한 재주를 기꺼워했던 죽도 할아버지에 의해
'홍도'하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핀란드 팜페레국제단편영화제에서 2등쯤에 해당하는 상을 수상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동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신이 사백서른세 살이라고 말하는 여인 '홍도'를 만난다.
리홍도 미가륵!
첫애인이었던 유정에게 배신당하고 떠난 전주여행에서 정여립의 흔적을 쫓게 된 동현은 언젠가 자신의 영화에
정여립을 등장시키리라 마음먹고 자료를 모으고 있었고 같은 비행기에 탔던 홍도는 그 스크랩북을 무심코 보게된다.
죽도할아버지라고 불렸던 정여립은 자신의 할머니의 남동생이었으며 정여립의 조카인 리길진이 아버지라고 말하는
그녀의 눈빛은 사람을 빨아들일 것 같이 깊었고 아름다웠다.
때는 조선에서 가장 한심했던 왕들 중에 하나였던 선조가 시원치않은 능력으로 나라를 이끌던 시절.
그저 역사시간에 '정여립의 난'으로만 만났던 '정여립'이 제왕을 부정하고 만민의 평등을 주장하고
대동계를 조직하고 외세와 배고픔에 지쳤던 백성들이 동요하던 시기였다.
하얀말을 타고 신선처럼 천반산 자락의 죽도에 나타나곤 했던 정여립은 선조의 부름을 받아 홍문관 수찬이 되어
한성으로 향한다. 조카인 리길진도 대과에 응시하기 위해 소의문안 만리현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자신을 낳다가 세상을 떠난 어미의 얼굴도 모른 채 할머니의 품에서 자란 홍도는 대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로
왕을 보좌하는 직책을 맡게된다. 아침이면 궁궐에 등청하는 아비를 따라 홍도는 문안 광통교에서 하루종일 놀았다.
자신의 볼을 쓰다듬어주던 아버의 손은 늘 따뜻하였다.
하지만 정여립이 백성을 미혹하는 대동계의 수장임을 알게된 선조는 그를 반역도당으로 몰아 그의 피붙이들을
숙청하게 된다. 피바람속에 아비 리길진과 할머니가 숨지고 홍도는 죽도 할아버지의 말고삐를 잡던 사내에게
업혀 목숨을 구하게 된다. 홍도가 직접 이름을 지어주었던 사내 자치기!
자치기는 홍도가 사백년을 넘게 살아오는 동안 그리워했던 남자가 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의 자손들과 함께 일본으로 인질이 되어 떠나게 된 홍도는 왜구와 싸우기 위해 군대로 끌려가면서
자치기가 준 '自治己' 알을 간직한 채 언젠가 꼭 다시 돌아오겠다는 그의 약속을 기억하며 살아간다.
전쟁이 끝난 후 조선으로 돌아온 홍도는 자치기와 재회하고 혼인한 후 아이를 낳는 날 도적떼에 의해 월악산 터전이 도륙되고
자치기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죽게된다. 천상의 선녀였다는 항아 할머니는 죽어가는 홍도에게 숨을 불어넣어 영원히 죽지 않는
목숨을 이어 받게 된다.
그 뒤 홍도가 건너야 했던 수많은 강들속에는 아버지 리길진의 환생이었던 김한빈과 선조의 딸이었던 정주옹주의 환생인
얀 안센과의 만남과 결혼이 있었고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여덟시간의 시간동안 동현은 홍도의 이야기를 믿게 된다.
사백년을 넘게 젊음을 간직한 채로 살아왔다는 여인 '홍도'의 이야기를 믿을 사람이 있을까.
동현역시 홍도가 극작가라고 생각했었다. 모든 이야기는 허구일 뿐이고.
하지만 그녀의 맑은 눈과 마음을 깨닫고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그녀에게 묻는다.
"왜 저에게 지나온 날들을 이야기하신 겁니까? 처음 보는 저에게....."
"아마도 알고 계실 겁니다...처음 죽도 할아버지를 아느냐고 묻던 순간, 알았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저절로 우연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自治己'라고 새겨진 자치기 알...이 동현 손안에 들어있다.' -381p
환생과 영생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황당한 소설이라고 할지 모른다.
과학적인 증명을 따지지 전에 허무하게 삶을 마감했던 수많은 혁명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쫓던 불쌍한 민초들을 떠올려본다.
역사의 갈림길에서 방황했던 수많은 목숨들과 잊혀졌던 이야기들을 끄집어낸 작가는 분명 홍도를 만난 것이 틀림없다.
4백년을 오가는 대서사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이끌어낸 역량도 대단하고 그동안의 혼불문학상 수상작중 최고임을 느끼게 된다.
일본의 낯선 땅에서 목을 맨 정주공주를 조선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에 묻고 오열하는 장면과 자치기와 재회하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터져나온다. '홍도'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많은 자료를 모으고 매일 그녀와 수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을 것이다.
때로는 사랑으로 때로는 질투로 때로는 그리움으로..
그렇게 세상에 나온 '홍도'을 알아봐주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했을 것이다.
노란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곱게 입은 홍도의 모습을 언젠가는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