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선물해준 진정한 가족 사랑
부자유친로드맵
저자 김정명 교수
배낭여행을 한다는 것 – 해외여행이 이미 보편화 된 요즘에도 배낭여행이란 말을 들으면 여전히 자유로움과 설렘이 느껴진다. 배낭여행을 한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열린 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여행 중 보고 느낄 그 무엇인가를 위해 어느 정도의 불편함과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러한 배낭여행이기에 ‘누구와’ 그 여행을 함께 했는가는 더더욱 중요하다. 여기, 아버지와 아들의 아주 특별한 배낭여행기가 있다. 터키로부터 시작해서 그리스, 이탈리아에 이르는 지중해 국가들을 약 20일 동안 두 부자가 함께 했다. 마치 교환일기처럼 써 내려간 이들의 여행기는 마치 명백한 세대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듯해 비교하는 재미도 있다. 사색의향기는 아버지 김정명 씨를 만나 부자간의 특별한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아버지, 아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다
비록 내가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은 적겠지만 오가는 대화 속에 그리고 녀석이 품게 될 세상이 그를 키우리라는 나름의 확신이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준비물이다. 또한 가장 아름다운 시기인 ‘아들의 사춘기’를 함께하고 싶은 욕심도 나를 부추겼다.
우리 아버지들의 역할은 참으로 고되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 하더라도, ‘아버지’라는 단어 속에는 불완전함이 배제되어 있는 게 사실이니까. 아버지도 때론 눈물 흘릴 수 있고, 센티멘탈해질 수 있으며, 말도 안 되는 실수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아버지답지 못한 것’으로 치부돼 버린다. 따라서 김정명 씨가 당시 열일곱이었던 아들에게 단 둘만의 배낭여행을 제안한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여행을 떠나는 것 자체도 그렇거니와 우리나라의 고등학생처럼 바쁜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가 내민 손을 흔쾌히 잡았고, 여행을 떠난 순간부터 두 사람은 부자가 아닌 친구가 되었다.
“우리나라 고등학생이라면 방학 때 해외배낭여행은 꿈도 못 꾸는 게 현실입니다. 그러나 학교와 집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있고, 여행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게 따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들 녀석도 제 마음을 알았는지 얼른 따라나서 줬지요.”
명지대 사회체육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김정명 씨의 교육관은 독특하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다들 강남으로 이사를 가는 와중에도 그는 전인교육을 위해 가족들을 이끌고 산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스스로 배운다’는 신념으로 과외는커녕 학원도 잘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진정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깊게 고민한 데서 나온 배려 깊은 결정이었다. 그래서일까? 김정명 씨 가족의 모습은 사랑과 믿음으로 가득한 모범 가정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아들, 아버지가 내민 손을 잡다
아버지께서 여행을 가자고 하시는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한다. 그리고 싱긋 웃으시며 뭐든지 안될 것 없다는 듯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눈빛이 날 안심하게 했다. 세상에는 배울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교실에서,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세상을 향해 몸과 마음을 열면 또 다른 값진 배움이 빛처럼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이 시대 고등학생들은 괴롭다. 가장 큰 꿈에 부풀고 포부에 가득 찬 시기여야 함에도 이들은 늘 코너에 몰려 있다. 날이 밝으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입시제도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리고 나면 제 자리에 서 있기 조차 힘든 우리 고등학생들에게 여행은 한낱 사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 부자가 여행하면서 한국 사람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어떻게 고등학생이 방학 때 보충수업을 받지 않고 여행 다닐 수 있느냐’였다니, 사정을 알 만하다.
“그 때 보광이가 민족사관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기숙사 학교라 얼굴을 볼 시간이 없었지요. 애가 사춘기에 접어들수록 점점 멀어진다는 느낌도 들었고. 또 ‘배운다’는 건 학교에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제 아이에게 산 체험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은 욕심도 있었습니다.”
여행을 다녀온 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김정명 씨는 주위에게 자녀와 함께 여행을 떠날 것을 권한다고 한다. 진정한 교육은 갑갑한 교실에서가 아니라 세상 밖에서 얻는 것임을 여행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막둥이 아들이 조금만 더 자라면 반드시 같이 여행을 할거라며 기분 좋은 듯 웃는 김정명 씨는 영락없는 우리 시대 소중한 ‘아버지’다
가족, 여행 속에서 재발견한 가치
유럽에 사는 이들이 부러운 이유. 그들은 맘만 먹으면 주말여행으로도 유럽 어느 곳이나 여행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도 하루빨리 대륙으로 나아가는 통로가 뚫려 그 넓은 아시아를 맘대로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두 부자가 여행을 다녀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아내 최승은 씨도 딸 보희양과 함께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로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참 잘 어울리는 가족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온 가족이 한 달 동안 캠핑카를 타고 다니며 미 대륙 횡단여행을 다녀온 전력도 있는 터이다. 가족이 함께 하는 여행은 어떤 특별한 재미라도 있는 걸까?
“제가 워낙 여행을 좋아해서 그런지, 가족들을 끌고 많이 다니는 편입니다. 여행을 하는 동안 아이들이 훌쩍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큰 재미고요.”
그렇다. 김정명 씨의 이론에 의하면 한 번의 여행으로도 아이들은 한 뼘 더 성장한다. 보광과의 유럽여행이 특별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소극적이고 추진력이 없다고 못마땅하게만 여겼던 아들을 이 여행을 통해 완전한 인격체로 다시 보게 됐다고 김정명 씨는 말한다. 아들 보광도 마찬가지다. 조금은 어려웠던 아버지지만 아버지라고 해서 모든 것이 완벽할 수 없음을, 자신이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드려야 할 것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 가족의 참 의미이리라.
어쨌든 여행은 끝났다. 여행 초 둘이 했던 약속의 결과물인 일기가 이 책으로 세상에 나왔고 보광은 그새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유학을 떠났으며 김정명 씨는 여전히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떨어져 있지만 두 부자는 간간히 지난 여행을 추억으로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이 뒤에 있음을 기억하며 행복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글, 사진 | 홍유진 기자
